•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2. 건축
  • 2) 도성의 건설
  • (4) 세종과 그 이후의 도성건설

(4) 세종과 그 이후의 도성건설

 국왕이 양위하면 時御所였던 궁을 떠나 따로 옮겨사는 것이 관례였다. 세종은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위해 창덕궁 옆에 신궁을 경영하고 壽康宮이라 하였다.628)≪世宗實錄≫ 권 2, 세종 즉위년 11월 기유. 세종 즉위년(1418) 11월 7일 태종은 수강궁으로 옮겼는데 그 궁이 어떤 규모로 경영되었는지에 대하여는≪世宗實錄≫에 언급이 없다. 여러 단편적인 자료에 의하면 수강궁에 정전이 있었고 月臺가 부설되어 있었으며629)≪世宗實錄≫ 권 2, 세종 즉위년 11월 경신. 內庭과 外庭, 宮門, 南廊과 正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630)≪世宗實錄≫ 권 3, 세종 원년 정월 계축조에 의하면, 수강궁은 세종 원년 정월에 수리되었다.

 성종의 모후와 대비들이 창덕궁을 떠나 수강궁으로 이어하길 바랐으나 수강궁은 성종 때에 이르러 이미 낡았으므로 우선 경복궁으로 모시고 수리를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성종 14년(1483)에 새로 짓게 되었고, 궁의 이름도 昌慶宮으로 바꾸었다.631)≪成宗實錄≫ 권 152, 성종 14년 3월 갑오. 그러나 원로 신하들이 이 공역을 반대하였으므로 완성단계에 접어들어서야 창경궁이란 명칭을 쓰게 하였다.632)≪成宗實錄≫ 권 170, 성종 15년 9월 신해.

 성종은 수리도감을 열어 창경궁의 일을 맡아 보게 하였고633)≪成宗實錄≫ 권 171, 성종 15년 10월 무오. 법전은 당연히 남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가 동향도 무관하다고 생각을 바꾸었으며 승정원을 비롯한 여러 관아를 갖추어 여기에서도 정사를 볼 수 있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창경궁은 수강궁과는 완전히 다른 면모가 되었으며, 그 후 연산군이 瑞葱臺를 쌓았다.634)≪燕山君日記≫ 권 58, 연산군 11년 5월 신묘 및 6월 을축·기묘.

 이 밖에 세종초에 도성 내외에 여러 이궁이 이룩되었는데 이는 대부분 상왕인 태종의 주관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 도성내에는 蓮花坊 新宮과 泉達坊 신궁이 들어섰다. 세종 때의 대표적 사업인 도성 개축도 태종이 주관하였다. 태종은 재위시에도 개축을 기획하고 있었으나 지나친 백성들의 노고를 염려하여 자제하고 있다가 세종에게 양위한 후 스스로 사업을 맡았다. 도성수축도감을 열어 도제조와 제조들을 임명하고635)≪世宗實錄≫ 권 13, 세종 3년 10월 임인. 수축할 부분을 정하였으며 동원할 인원을 계산하여 총 403,755명이 40일간 작업해야 한다고 보았다. 세종은 태조 때 다시 쌓을 때도 그만한 인원이 동원되지 않았다고 의문을 표시하여 다음과 같이 다시 인원을 조정하였다.

1. 경기도 丁夫 20,188명

2. 충청도 정부 56,112명

3. 강원도 정부 21,200명

4. 황해도 정부 39,888명

5. 전라도 정부 49,104명

6. 경상도 정부 87,368명

7. 평안도 정부 43,392명

8. 함길도 정부  5,208명

    합 계 322,400명 (실제로는 322,460명임)

9. 工匠 2,211명

10. 各色軍 115명

 이날 우의정을 도제조에 추가하고 33명의 제조와 사, 부사, 판관, 녹사 등 190인을 더 참여시켜636)≪世宗實錄≫ 권 14, 세종 3년 12월 을해. 세종 4년(1422) 2월 23일에 도성 개축을 끝냈다. 태조 때의 토축을 모두 석축으로 바꾸고 수구문을 증치하였으며 서전문을 닫고 돈의문을 여는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도로도 열었다.637)≪世宗實錄≫ 권 15, 세종 4년 정월 갑술.

 세종은 태종같이 수많은 인원을 동원하여 대규모로 진척시키는 방도를 취하지 않고 동왕 6년부터 16년 2월에 이르기까지 농한기를 이용하여 조금씩 손을 대어 나아갔다. 수문을 더 설치하고 호안을 석축으로 하고 돌다리로 바꾸지 못하였던 정선방·연화방·창선방·덕성방의 다리를 석교로 가설하고 모화관 앞과 건춘문 앞 내도 개천하는 등 지류세천에 이르기까지 정비하였다.638)≪世宗實錄≫ 권 12, 세종 3년 7월 계해·4년 정월 을해·12년 6월 을미·16년 2월 기유 등의 기사 참조. 또 세종은 마전다리 앞과 한강변에도 水標를 세웠고 측우기도 만들어 보급하였다. 이외에도 강령전을 고쳐 짓는 일, 건춘문 개건, 여러 개천의 호안석축을 쌓는 일, 남대문 밖에 못을 파는 일들이 계속되었다. 세종 30년에는 남대문 중수공사에 착수하였다.639) 이 때 공사가 견고하지 못하여 성종 때에 남대문이 기울자 성종 10년에 다시 수리하였다. 이 사실은 1962년 남대문 중수공사시 상량문에 나타나 있다.

 문종 원년(1451) 정월에는 무너진 도성을 개축하면서 동대문을 수리하였는데 신통치 못하여 10월에 다시 고쳐 짓기 시작하였다.640)≪文宗實錄≫ 권 6, 문종 원년 10월 병인. 이 작업은 단종 때 가서야 끝이 났다.

 세종대 이후로는 태조와 세종에 의하여 기반이 조성된 것을 고치거나 보완하고 더 필요로 하는 것을 추가하는 정도로 도성건설이 지속되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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