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2. 건축
  • 3) 읍성의 축조와 관아시설
  • (1) 읍성의 축조

(1) 읍성의 축조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의 治地에 읍성을 쌓았다. 산곡 내륙의 읍치는 그렇지 않았지만 요충지에는 으레 읍성 쌓는 것을 기본으로 알았다. 읍성이 행정구역 단위에 축조되었다고 하여 행정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고 있으나, 군사적 목적으로 축성되는 성채와 다를 바 없었다. 유사시에는 관원과 군인·백성들이 합세하여 성을 지키면서 적을 막았다. 평상시의 행정적인 기능과 유사시의 군사적인 기능을 함께 지녔던 것인데, 이는 조선시대의 행정·군사의 편제에서 牧使와 兵使의 이원적 조직을 갖추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조선 초기·중기의 행정구역은 모두 330개소에 달하였다. 그 중 읍성은 한양의 도성을 비롯하여 160기의 성이 기록되어 있다. 읍치에는 읍성 이외에 다른 성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昌城都護府에는 읍성 이외에 靑山城·行城이 더 있었고 평양부에는 內城과 外城이 있었다.641)≪新增東國輿地勝覽≫ 권 53, 昌城 및 권 51, 平壤. 이런 성이 전국에 30기가 더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고적조에도 성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으나 이들은 거의 폐기된 전대의 것이므로 성곽조에 기록된 190기만이 당대의 것으로 보인다. 이 성들을 분류하면 다음<표>와 같이 돌로 쌓은 석성이 179기이고, 흙으로 쌓은 토성은 11기였다.

지 역 행정구역 읍성이
있는 군현
읍 성 비 고
석축 토축
한 성 부 1 1 1 1   都城
개 성 부 1 1 2 2   內外城

좌 도 22 1 1 1   水原都護府
우 도 15 1 1 1   喬桐縣

좌 도 21 5 5 5    
우 도 33 19 20 19 1 乾至山城 포함

좌 도 35 20 23 23   慶州, 梁山, 寧海山城 포함
우 도 31 21 22 19 2 咸陽沙近城 포함

좌 도 21 8 11 11   南原 鉸龍山城 포함
우 도 36 25 28 26 2 珍島 金鴨 南姚浦城 포함

좌 도 14 2 2 2    
우 도 10 6 6 6    

좌 도 9 9 11 9 2 三陟,沃原城, 通川北山城 포함
우 도 17 1 1 1    

좌 도 13 8 11 11   永興 山倉洞城, 甲山外城
三水 鴨綠江行城 포함
우 도 9 9 12 10 2 土築 2개소는 미상
鏡城南山城 등 포함

좌 도 21 12 18 17 1 平壤外城, 昌城의 靑山城과
行城, 朔州의 行城 등 포함
우 도 21 11 16 14 1 渭原 加工軍洞行城, 洞口行
城 碧潼行城 등 포함
330 160 190기 179기 11기  

<표>조선 초기 행정구역과 읍성

 읍성이 행정적인 성이라 한다면 요새에는 군사적인 목적에서 축성된 성이 따로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군·현에 읍성과 함께 行城·山城·營城·鎭城·堡城·倉城·所城·戍城·長城·關城 등이 있었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그런 성이 555기 가량 있다고 하였다. 또 옛날에 쌓은 것 중에 잔형이 남아 있는 성이 200여 기나 된다고 하였다. 읍성 외에 군대 주둔용 등의 작은 성들을 따로 두었던 것은 요소에 분산 주둔하였다가 서로 도우며 기습하거나 구원하는 전법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었다.642)≪文宗實錄≫ 권 3, 문종 즉위년 8월 을해.
그런 견해를 문종대 兵曹의 인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下三道에는 진·성·수·소 등의 작은 성들이 많았다. 그것은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왜구의 침입이 지속되어 그들을 막는 일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종대부터 문종대에 걸쳐 축성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단종 때에도 하삼도의 성벽 중 퇴락한 것의 보수문제가 논의되었다. 충청·경상·전라도 都體察使 鄭苯의 청에 따라 경상도의 蔚山 柳浦石堡, 충청도의 瑞山城을 쌓았고 조성중이던 경상도 昆陽·機張·東萊·固城·巨濟城의 海子와 鎭海·河東城의 敵臺, 그리고 전라도 興陽·順天·光陽城의 擁城을 각 읍 수령 책임하에 완성케 하고, 충청·경상·전라도의 관찰사들에게 감수하도록 하였다.643)≪端宗實錄≫ 권 2, 단종 즉위년 8월 신유.

 정분은 전에도 문종에게 東西兩界의 축성은 대신을 보내어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을 감독케 하였지만 하삼도는 감찰사의 지휘하에 전례에 따라 이룩하는 것이 번거롭지 않아 실리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앙에서 꼭 사람을 보내야 한다면 전문가를 畵工과 함께 파견하여 각 도의 감사와 고을의 수령이 공동으로 살펴서 城基를 정한 것을 낱낱이 그려서 廟堂에 복명하면 그것을 대신들이 검토하여 결정함이 좋겠다고 아뢰었다.644)≪文宗實錄≫ 권 4, 문종 즉위년 10월 무인의 司諫院左正言 具人文의 啓. 이는 대신이 지방에 거동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방지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하삼도의 읍성들은 城制가 제각기여서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적지 않았다. 당시 법으로 정하였던 성제의 대요는 하삼도의 읍성 실태를 직접 조사한 도체찰사 정분이 개축시에 반드시 교정해야 한다고 지적한 31기 성의 불완전한 점들을 검토하면 파악할 수 있다.

 정분은 慶州읍성의 둘레에 해자가 없다고 하면서 당시 읍성의 규모와 시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경주부읍성 둘레 4,075尺, 높이 11척 6寸, 성가퀴 높이 1척 4촌, 敵臺 26, 門 3, 無擁城 성가퀴 1,155, 城內 우물 83, 海子 아직 파지 못함(≪文宗實錄≫ 권 9, 문종 원년 9월 경자).

 이어서 정분은 30곳의 성을 지목하면서 현재 상태와 보완할 부분을 지적하였다.645)≪文宗實錄≫ 권 9, 문종 원년 9월 경자.

 수시로 이러한 진단을 함에 따라 거제의 읍성도 새로 城基를 정하고 읍성 해자를 개축하였다. 원래보다 동북쪽으로 1,000여 척 확대시켰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받고, 巡察使로 하여금 편리한지 여부를 살펴 성기를 정하기로 하였다.646)≪文宗實錄≫ 권 3, 문종 즉위년 9월 계묘. 이에 따라 도체찰사 정분이 기존의 읍성을 살핀 후 법도에 맞지 않게 쌓았으므로, 성의 둘레를 1,916척으로 쌓으면 성의 백성들이 다 들어갈 수 있겠다고 하였다. 또 古丁部曲의 지세가 평탄하고 골이 깊으니 샘을 파서 물을 얻기에 좋고 살기에도 좋으므로, 읍성을 이리로 옮기는 것이 좋겠으며 내년 10월쯤에 축성하면 편의하겠다고 하였다. 단 永登浦와 玉浦와의 사이가 너무 떨어져 있어서 주야로 들에서 일을 하다가 왜구의 습격을 받으면 요해지를 잃을 염려가 있으니 두 포의 사이에 栗浦를 두어 木柵을 설치하고 船軍을 영등포에 20명, 옥포에 30명을 배치하여 군관 한 사람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자고 하였다. 또 知世와 吾兒의 사이도 너무 떨어져 연계되기 어려우니 그 사이에 助羅浦를 설치하고 나누어 지키게 함이 옳겠다고 보고하였다.647)≪文宗實錄≫ 권 4, 문종 즉위년 10월 무술.

 이 건의에 대하여 읍성을 옮기는 것은 좋으나 沙等里에 읍성을 건설한 지 얼마되지 않아 난감하다는 여론이 있어, 문종은 이를 다시 검토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때 倭護軍 藤九郞으로부터 왜구가 침입할 기미가 있다는 첩보가 왔으므로 그에 대한 대비책이 마련되어야 했고 대신들은 읍성을 옮기는 일이 마땅하다고 하였다.648)≪文宗實錄≫ 권 7, 문종 원년 5월 계묘.

 하삼도의 방비가 자주 침구하는 소규모 집단의 기습공격을 방어하는 대책이었다면, 북방은 육로로 대규모 집단이 일시에 국경을 침범하는 사변을 제어하려는 방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말 홍건적의 침입을 경험한 일이 있었으므로 문종초에도 그에 대한 대비책을 미리 마련하자는 분위기였다.649)≪文宗實錄≫ 권 5, 문종 원년 정월 기사.

 또 중국쪽에서 심상치 않은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좌의정 黃甫仁이 장성을 쌓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50)≪文宗實錄≫ 권 1, 문종 즉위년 5월 임신. 또 하삼도의 읍성 정비안을 준비하고 있던 정분은 태종 때 성산부원군 이직이 함길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吉州·端川·北靑·甲山 등에 산성을 쌓는 일의 타당성을 조사한 결과 축성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던 사실을 들어 함길도·평안도 지역에서 산성축조에 착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651)≪文宗實錄≫ 권 3, 문종 즉위년 9월 경신. 함길도 절제사 李澄玉도 야인들의 동정이 심상치 않다고 변방사태를 보고하면서 會寧·慶源 등의 성이 견고하지 못하고 穩城과 鍾城의 성도 완성되지 못하였으므로 더 쌓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652)≪文宗實錄≫ 권 5, 문종 원년 정월 무신.

 성을 쌓는 데에는 돌이나 흙으로 쌓는 방법 외에 목책으로 방어벽을 만드는 수도 있었으며 鹿角木柵 등의 기법도 있었다. 예를 들면 함길도 會寧鎭의 甫乙下口子城은 목책으로 하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목재는 다루기 어렵다고 하여 토축하게 해달라는 건의가 있었다. 결국 황보인이 돌 뜨는 곳도 가까우므로 석성으로 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주장에 따라 원래 책정된 150명에 50명을 더 주어 성벽을 쌓게 하였다.653)≪文宗實錄≫ 권 8, 문종 원년 7월 계묘.

 함흥과 온성·갑산 등지에서 읍성의 기능에 따른 증설사업도 실시되었다. 함흥에서는 안변 이북, 북청 이남의 여러 고을에서 5,000명을 동원하여 본래의 성에 10,314척을 더 쌓아 咸興府城을 완성하였다. 穩城府城은 7,000명을 동원하여 서·남쪽으로 500자 넓이를 추가하였다.654)≪端宗實錄≫ 권 1, 단종 즉위년 6월 무인.

 평안도 방면의 축성도 논의되어 평양성을 비롯한 여러 고을의 읍성이나 산성들이 수축되거나 신설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義州城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처음에는 문종 원년(1451) 2월 초하루에 공사를 시작해서 그믐날 끝내기로 하고 사전준비를 진행하였으나 문종의 지시로 계획이 변경되었다. 문종은 당장 성벽을 쌓아 고치는 일보다는 퇴락한 성문을 고치고 池壕를 깊게 하는 한편으로, 전돌과 석회를 굽게 하여 5,600인의 인력으로 강이 얼었을 때 수송해 이듬해 봄이나 가을에 성벽을 쌓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의주성이 석성이지만 磚壁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655)≪文宗實錄≫ 권 5, 문종 원년 정월 기유. 의주성의 구조는 皇甫仁·金宗瑞가 제시한 다음의 개수지침을 살펴보면 짐작할 수 있다.

남문에서 동문에 이르기까지는 더 쌓는 성벽 높이를 30척, 短墻 높이 두 자, 성가퀴의 높이를 석 자로, 남문은 문루를 헐고 다시 짓고 문 밖 옹성은 虹橋를 없애고 대신 懸門을 설치하되 그 위에 건물을 간결하게 짓는다. 동문도 문루를 더 쌓고 홍교를 치우고 문루를 세우며 그 밖에 다시 옹성을 더 쌓아서 현문을 설치하고 지붕을 씌운다. 또 서문의 옹성에도 역시 현문을 설치하고 지붕을 구성한다. 또 동문에서 북문까지의 城子는 높은 곳은 단단하게 쌓였으므로 낮은 곳만 덧쌓는다(≪文宗實錄≫ 권 7, 문종 원년 4월 경진).

 이 지침에 따라 우선 10월까지 선군 1,000명을 동원하여 於外洞 등으로 석재를 옮기고 이듬해 공역이 시작되면서 다시 필요한 자리로 운반하였다. 또 의주의 선군 250명을 7월 1일부터 9월말까지 동원하여 전돌을 굽게 하고 특히 성문의 취약성을 고려하여 문짝에 사용할 鐵牒釘 등의 제작에 힘쓰기로 하였다.656)≪文宗實錄≫ 권 7, 문종 원년 4월 경진.

 성문에 懸門을 설치하자는 안이 김종서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현문의 체제에 약점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657)≪文宗實錄≫ 권 6, 문종 원년 3월 임자. 상당히 견고하여 방비에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 고려되어,658)≪文宗實錄≫ 권 6, 문종 원년 2월 신미. 문종 원년 6월 의주성에 새로 만든 현문을 설치하는 시험을 하였다.659)≪文宗實錄≫ 권 8, 문종 원년 6월 임신.

 한편 외따로 떨어져 있는 성으로는 효과적인 방어가 어려우므로 장성을 쌓거나 행성을 쌓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황보인이 함길도에 장성을 쌓자고 주장하였고,660)≪文宗實錄≫ 권 1, 문종 즉위년 5월 임신. 사헌부 장령 河緯地가 문종 즉위년 가을에 함길도의 행성을 쌓기로 한 것은 세종이 돌아가신 시기에 해당하니 늦추자고 하였으나 문종이 세종의 뜻이라고 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다.661)≪文宗實錄≫ 권 2, 문종 즉위년 6월 기축. 또 함길도 관찰사 金文起는 야인들의 동정이 조금 뜸한 틈을 타서 온성에서 회령에 이르는 행성을 쌓자고 건의하였다.

 행성의 이점은 同知中樞院使 趙克寬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되었고, 이 건의가 채택되어 온성과 종성에서부터 회령에 이르는 구간에 행성이 축조되었다.662)≪文宗實錄≫ 권 6, 문종 원년 2월 정해.

沿邊의 여러 鎭이 賊路에 연접하여 있으니, 만일 행성이 없으면 우리의 單弱한 군졸만으로는 부지하기 어렵습니다. 행성을 쌓는 일이야말로 국가에서 제일 가는 급한 일입니다(≪文宗實錄≫ 권 6, 문종 원년 2월 임오).

 ≪신증동국여지승람≫ 온성도호부 성곽조에는 석축한 읍성과 함께 행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에 의하면 온성도호부의 행성은 길이가 143,768척, 높이가 12척이었으며, 종성도호부의 행성은 석축한 길이가 62,408척, 토축한 길이가 85,600척이고 3,582척은 木柵하였다. 읍성은 따로 석축한 것이 있다고 하였다. 회령도호부의 읍성은 중종 2년(1507)에 증축한 것인데, 그 길이가 11,720척, 높이가 15척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三水郡條에 의하면 읍성과 함께 군 북쪽 1리에 ‘鴨綠江行城’이 있었는데 석축의 길이가 1,517척, 높이가 5척이었다. 평안도에서는 昌城·朔州·渭原·理山·碧潼 등 압록강에 연하여 있는 고을에 행성을 쌓아 두만강가의 행성과 대등하게 하였다.663)≪新增東國輿地勝覽≫ 권 53 및 권 55의 昌城都護府 行城·朔州都護府 行城·渭原郡 加乙罕洞 行城·理山郡 行城·碧潼郡 行城 참조. 이들 행성은 장성이라 불리우기도 하였다.664)≪文宗實錄≫ 권 7, 문종 원년 7월 임인.

 이와 같이 문종대에는 축성을 통해 북방과 하삼도의 방어책을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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