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2. 건축
  • 5) 사원의 건축

5) 사원의 건축

 ≪조선왕조실록≫의 태조 때부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까지의 기사에서 절이름이 거명된 것을 찾아보면, 대략 340개소 가량이 된다. 이 중엔 중종 때 경기, 전라도의 사찰을 훼철하면서 거론된 것도 있다. 사찰의 창건을 억제하기 위하여 훼철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사원도 철거시켰다.

 기존의 사찰이란 圖籍710)≪中宗實錄≫ 권 91, 중종 34년 6월 을해·경자·병오·무신.에 등재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의 도적이≪동국여지승람≫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어 있는 각 고을의 사찰수는 대략 1,692개소이다.

 조선 초기의 불교정책은 군주에 따라 일관되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사원이 개창 또는 중창되거나 훼철되는 미묘한 사태를 겪었다. 태조의 건국이념은 ‘崇儒’에 있었지만 스스로는 불심이 강하여 등극 이전, 재위중, 양위후에 많은 사찰과 인연을 맺었다. 그 중에서 유명한 것이 檜巖寺이다. 태조는 그가 임금이 될 포부를 털어놓았던 釋王寺의 승려 無學 自超를 회암사에 주석하게 하였다. 자초는 懶翁과의 인연으로 회암사와 관련이 있었지만 그곳은 태조가 역성혁명을 하는데 일종의 기지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혁명이 성사된 후 태조는 회암사를 특별히 대우하였다.711)≪太祖實錄≫ 권 2, 태조 2년 정월 정묘.
태조는 회암사에 대하여 飯僧, 問安, 賜米, 賜物, 設法席, 賜田, 重修, 施納, 訪問 등 꾸준한 관심을 보였고 태종 2년에는 그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오래 머물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회암사는 지금도 거대한 터전에 유구와 유지를 남기고 있다. 고려 말엽에 창건된 것이긴 하지만 조선 초기에 중창된 사원으로서는 가장 규모가 장대하다.712) 楊州郡 檜泉面 檜巖里 天寶山 아래에 있다. 고려 충숙왕 15년(1328) 指空이 창건, 禑王 2년(1376) 懶翁 중창, 태조의 중창, 세조비 정희왕후가 성종 3년(1472)에 중창한 바 있다. 李穡이 지은<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 의하면 법당을 위시한 대소 전각이 262칸에 이르렀다고 한다.713) 李穡,≪牧隱文藁≫ 권 2,<天寶山檜巖寺修造記>. 유지에 남아 있는 건물지의 발굴 등을 통하여 확인되는 것만 보아도 중층의 건물이 조영되었었고, 주변의 축석한 石臺의 구성 또한 대단하다. 또 일부의 석물과 지공·나옹·무학 등 왕사들의 독특한 팔각의 부도가 아직 남아 있어 당시의 장관을 짐작할 수 있다.714)≪85’ 檜巖寺址 現況調査 一次調査報告書≫(楊州郡, 1985. 7).

 태조가 먼저 죽은 신덕왕후를 위하여 정릉 옆에 경영한 것이 興天寺이다. 태조는 山役을 하면서 절도 짓기 시작하였고715)≪太祖實錄≫ 권 10, 태조 5년 12월 병술. 3층 사리탑을 목조하기로 하여 동왕 7년(1398) 4월에 터를 잡고 5월부터 공사에 착수하였다. 정종 원년(1399)에 완성되자716)≪定宗實錄≫ 권 2, 정종 원년 10월. 태조는 신덕왕후와 함께 왕자의 난 때 살해된 어린 왕자와 사위를 위하여 여기에서 제를 올리고 몰살당한 왕씨들의 명복을 빌었다. 또 태조는 사리탑에 부처 분신사리 4매를 봉안하고 楡洞에 지은 법당에도 사리를 봉안하였다.717)≪定宗實錄≫ 권 4, 정종 2년 4월. 태종 때 박자청을 시켜 사리탑을 중수하였으나 중종대 무렵에 흥천사는 없어지고 말았다.

 흥천사는 조선왕조의 陵寢寺社로 경영된 것이다. 이 밖에 능침사사로는 衍慶·開慶·興敎·正因·奉先·報恩·奉恩·奉陵·奉國·龍珠寺 등이 조영되었는데, 이 중 봉은사까지가 초기의 것에 해당한다.718)

  사 찰 명 위 치 수 호 능 명
태조 6년(1397) 興 天 寺 西部 皇華坊 貞陵(神德王后)
정종 원년(1399) 衍 慶 寺 開豊郡 上道面 齋陵(神懿王后)
태종 8년(1408) 開 慶 寺 楊州郡 東九陵 健元陵(태조)
세종 2년(1420) 興 敎 寺 開豊郡 興敎面 厚陵(정종)
세조 3년(1457) 正 因 寺 高陽郡 陵西面 敬陵(단종) 昌陵(예종)
예종 원년(1469) 奉 先 寺 南楊州郡 榛接面 光陵(세조)
성종 4년(1473) 神 勒 寺* 驪州部 陵西面 英陵(세종)
명종 17년(1562) 奉 恩 寺 江南區 三成洞 宣陵(성종) 靖陵(중종)

조선 초기의 능침사사 일람표

神勒寺는 報恩寺.
이들 중에는 오늘날에도 향화가 계속되는 사찰도 있으나, 임진왜란 등으로 훼손되었기 때문에 당초의 盛觀을 알아 볼 수 없어 조선 전기의 능침사사의 구조는 알기 어렵다. 영릉의 보은사인 神勒寺는 전대부터의 사찰을 활용한 것이어서 능침사사로 특별히 경영한 것은 아니었다.

 이 밖에 태조는 興德寺·興福寺 등을 개창하고 海印寺 탑 중수와 안변 釋王寺의 수축을 도왔다. 또 태조는 津寬寺 중수에 힘을 썼고 演福寺에는 5층 목탑을 세웠다.719)≪太祖實錄≫ 권 3, 태조 2년 3월 계유. 이러한 호불정책은 태조가 불교와 인연이 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720)≪太祖實錄≫ 권 1, 總書에는 태조의 가계와 불교와의 깊은 인연이 실려 있다. 즉 度祖의 어머니 최씨부인이 아들이 없던 중에 洛山 관음굴에 가서 기도하였다. 하루밤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귀한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마침 아들이 태어났다. 그가 도조이고 그의 아들 익조도 굴에 다니며 치성을 다하였다. 그래서 결국 태조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태조의 불교귀의를 숙명적으로 합리화한 내용이라고 하겠다.

 태종은 자신의 능침에 절을 세우지 못하게 할 정도로 숭유의 기풍을 지녔지만, 태조를 위하여 회암사에 많은 田結을 주고 개풍군 興敎寺의 탑을 연경사로 이건하고, 松林縣 禪興寺의 탑을 開慶寺에 옮겼다. 그러나 한편으로 태종은 전국의 사찰 중에서 232개소만 인정하여 불교사원을 정리하였다. 이어서 세종은 이들 사찰의 종파인 曹溪·天台·摠南의 셋을 합쳐 禪宗으로, 華嚴·慈恩·中神·始興의 네 종파를 통합하여 敎宗으로 삼았다. 또 흥천사를 선종의 都會所로, 흥덕사를 교종의 도회소로 삼아 전국의 36개 사원만 인정하였다. 그러나 세종 11년(1429)부터는 억불정책을 완화하여 흥천사를 중창하고 경복궁 文昭殿 옆에 내원당을 지었다.

 세조는 수양대군 시절에≪釋譜詳節≫을 지었을 정도로 ‘호불대왕’이라 불렸다. 上院寺·洛山寺·神勒寺·海印寺·금강산 乾鳳寺·表訓寺·楡岾寺·양주 회암사·영암 道岬寺 등을 중수하였다. 그 중에서 지금도 전하여 오는 낙산사 석탑과 도갑사 해탈문은 불교건축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또 大圓覺寺의 10층석탑과 홍천사의 大鐘은 조선 초기 건축과 공예를 대표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현존하고 있어 당시의 기술과 예술성이 어떤 정도였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한편 세조는 세종 초기에 폐사되어 관사가 따로 없는 관청의 공해로 이용되고 있었던721) 大殿과 東西禪堂이 아직 있었는데 관습도감이 西禪堂에, 예장도감이 동선당에, 대전 뒷편 건물은 중부 유생들이 모이는 처소로 사용되었다(≪成俔,≪慵齋叢話≫ 권 7). 흥복사터에 원각사를 세웠다. 세조는 10년(1464) 5월 조성도감을 열고 孝寧大君, 臨瀛大君, 永膺大君, 永順君, 영의정, 좌의정, 雲城府院君, 河城尉 등을 도제조로, 예조·호조·병조판서와 中樞院副使를 제조로, 僉知中樞院事와 도승지를 부제조로 임명하였다.722)≪世祖實錄≫ 권 33, 세조 10년 5월 을묘.
이렇게 도심 창사에 수뇌부가 대거 참여하였던 것은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圓覺법회를 열었을 때 여래가 現相하고 甘露하였으며 탑의 繞塔精勤시에 放光이 대낮 같고 아름다운 안개가 가득차고 사리분신이 수백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世祖實錄≫권 33, 세조 10년 5월 갑인).

 큰 법당, 大光明殿, 東西禪堂, 중문인 적광문, 중외문인 반야문, 총문인 해탈문과 법뢰각이라는 종각 그리고 큰 법당 뒤편에 대장경을 간직하기 위한 해장문과 海藏殿이 이룩되었다. 중요 건물에는 청기와를 덮었는데 8만 장이 소요되었다.723)≪世祖實錄≫ 권 33, 세조 10년 6월 계사. 공역은 부역군인 2,100명과 기능인들에 의하여 진행되고 부지확보를 위하여 철거된 민가가 200여 채나 되었다.724)≪世祖實錄≫ 권 33, 세조 10년 6월 정해·정유. 또 원각사의 대종이 주성되었는데 구리 5만 근이 소요되었고725)≪世祖實錄≫ 권 33, 세조 10년 6월 무술 세조 11년 정월에 완성되었다.726)≪世祖實錄≫ 권 35, 세조 11년 정월 갑자. 그런데 종의 명문에는 4월에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세조 13년 4월에는 탑이 준공되었다.

 원각사는 연산군 10년(1504)에 폐사조치되었다.727)≪燕山君日記≫ 권 54, 연산군 10년 7월 무술. 임진왜란을 겪은 뒤 원각사터에는 석탑과, 성종 2년(1471) 金守溫이 비문을 지어 세운 비석만이 남아 있었다. 그후 중종반정 이후에 원각사를 다시 세울 일을 의논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활발했던 도성에서의 사원건축은 성종대를 지나면서 쇠퇴되기 시작하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중창되지 않았다. 반면 지방에서는 대군·군·공주·옹주 등의 원찰이나, 비·빈의 비호나 토호세력들의 지지 속에서 전대로부터 존속되어 오던 사원들이 향화를 계속하였고 수보, 중수, 중창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임진왜란 등의 병화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중에는 다음과 같이 오늘날에도 잔존하고 있는 것이 있어서 당대 건축의 추세를 짐작할 수 있다.

 목조건축물로는 松廣寺 국사전(1404년, 국보 제56호), 無爲寺 극락전(1476년 이전, 국보 제13호), 도갑사 해탈문(1473년경, 국보 제50호), 15세기의 송광사 하사당(보물 제263호), 觀龍寺 약사전(보물 제146호), 해인사 대장경판전(국보 제52호), 開心寺 대웅보전(보물 제143호), 개심사 심검당, 銀海寺 거조암 영산전(국보 제14호), 淸平寺 회전문(1557년경, 보물 제164호), 淨水寺 법당(1423년경 중수, 보물 제161호), 14세기경의 鳳停寺 대웅전(보물 제55호) 등이 있다. 그리고 淨巖寺 수마노탑(보물 제410호), 원각사탑(국보 제2호), 신륵사 다층석탑(1472년, 보물 제225호), 낙산사 칠층탑(1468년 이전, 보물 제499호), 水鍾寺 팔각오층탑(1493년), 碧松寺 삼층탑(1520년, 보물 제474호), 회암사 사리탑(1407년, 보물 제888호), 福泉庵 수앙호상탑(1486년), 學祖燈谷和尙塔(1514년), 靑龍寺 普覺國師 定慧圓融塔(1393년, 국보 제197호), 龍門寺 正智國師碑(1398년, 보물 제531호), 원각사비(보물 제3호), 億政寺 대지국사비(1393년, 보물 제16호),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탑비(1394년, 보물 제658호) 등이 있다.

 조선 초기에 개창된 사찰이라도 현존하는 전각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중창된 것들이어서 거론하지 못한 예도 적지 않다. 억불정책 때문에 피폐된 것이 적지 않지만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찰이 온전히 유지되고 있으므로 조선왕조가 불교건축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전대에 비하여 규모나 장엄함 등에서 많이 위축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원건축기법에서는 중기 이후의 사원건축의 변모가 이미 초기에 잉태되었다. 사원 宗派의 교리에 따라 조금씩 法殿의 형태를 달리하였던 듯하다. 龕室로서의 기능이 요망되는 유형과 법당으로 개방되는 것을 전제한 유파에 따라 형상을 각각 구성하였던 듯하다. 金堂과 대웅전 등 본존 봉안에 따른 호칭이 법전에 부여되는 차이이기도 한데 후기에 이르러 금당이 쇠퇴해 버리는 경향이 이미 이 때 잉태되기 시작하였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시대 사원의 금당터 발굴에서 드러난 바로는 本尊·脇侍·眷屬 들이 금당 중심부에 자리잡거나 좌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불단이 조성되고 장엄된 光背가 장중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 이후가 되면 법전의 대좌가 빈약해지고 건물 중심부에서 뒷편으로 물러 앉았다. 봉정사 대웅전이나 무위사 극락전에서 불단이 위축되거나 후방으로 후퇴한 사례를 볼 수 있듯이 이미 조선 초기에는 그런 기미가 무르익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본존이 건물중심에 진좌하던 때의 금당을 감실형이라 한다면 뒷편으로 불단이 치우쳐 있는 것을 법당형이라 할 수 있다. 감실형에는 승속의 출입이 억제되었지만 법당형에는 승속의 출입이 허용되는 특색을 지녔다고 하겠다. 본존이 후방에 치우침에 따라 대좌가 위축됨은 물론이고 광배가 차츰 쇠퇴해 가다가 마침내는 사라져 갔다. 대신 부처 배후의 後佛壁에 탱화를 부착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上壇幀畵’라 불렀다.

 감실형일 때에는 건물 내부의 어두운 점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다. 당내에 당연히 부처가 진좌하고 있다는 신념으로 頂禮를 올리면 되었지만, 법당형이 되어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조명이 문제점으로 등장하였다. 감실형의 경우 중앙에 板扇을 두 짝 단 거대한 板門을 설치하고 좌우 협간이나 퇴간에 光窓을 내는 정도였다. 나머지는 벽체로 정리하여 감실로서의 진중함이 돋보였다. 그러나 법당이 되면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사람들이 드나들며 안에서 의식을 하자니 밝아야 했다. 판문짝 대신 빛이 많이 통과하는 문짝을 달아야 했고, 겨울에 실내에서 추위를 견디기 위하여 광창 대신에 창호지를 바른 구조물을 설치하여야 했다. 이는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여 새로운 도구와 기법의 훈련이 요구되었고, 지금까지보다 防風 또는 防寒에 뛰어난 구조가 요망되었다. 여기서 중기와 후기에 볼 수 있는 분합문이 배태되었다. 살대가 제작 조립되었고 꽃살무늬구조로 장엄하였다.

 감실시대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극히 제한되고 특별한 의례가 금당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건물바닥에 별다른 주의가 없어도 괜찮았다. 심하면 맨바닥이어도 무방하고 地衣를 덮는 정도로 용납되기도 하였다. 물론 격조있는 금당에는 方塼을 깔기도 하였다. 민무늬이기도 하고 무늬를 베풀기도 하였다. 이는 불단의 장엄한 무늬가 있는 壁甎과 연계되면서 아름답게 치장하는 요소가 되었다. 사원의 건물터에서 수습되는 방전·벽전류가 그런 것들이고 부여 절터에서 출토된 山景文塼類도 그런 유형에 속한다. 산경문전류는 무늬가 마모될 정도의 軟質로, 바닥에 까는 寶相華文方塼類에 비하면 매우 약하였다. 불단 벽면에 부착하여 장식하던 것이므로 경질이어야 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고 법당화하여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민무늬 바닥이기는 하지만 들어가 절하는 사람에게는 불편하게 되었다. 구들과 마루의 생활에 익숙한 이들에게 塼을 깐 바닥은 생소하였으므로 마루를 방전 위에 덧깔았다. 무위사 극락전의 경우728) 1957년에 해체·중수하면서 마루밑에서 조선 초기의 방전 깐 바닥이 출현하여 마루를 제거한 바 있다.처럼 마루의 채택은 법당 건물에 획기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새로운 감각이 팽배한 결과인데 이는 궁실과 관아에도 여파를 미쳤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의 대두는 고려시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경향이라는 점에서 조선 초기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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