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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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백자의 시작과 확산

 조선 전기 백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치밀질 백자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새로운 백자의 확산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지도이념으로 표방하고 건국한 나라이다. 새나라의 새로운 근본 이념에 맞는 정책과 제반 시책이 필요하였을 것이며, 이 때 백자 제조기술의 습득과 백자의 확산은 그 시책에 적합한 것이었다. 치밀질 백자는 기술적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고 검약을 기본 덕목으로 삼는 유학의 사상에도 白色의 백자는 합당한 색상이었다고 생각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국의 도자기 가마를 조사하여 자기와 도기로 나누고 소재지와 품질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질과 조형을 갖춘 백성들의 생활용기로 생산지와 품질을 파악한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였으며 유교주의를 표방하며 실천에 옮기는데도 반드시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磁器所 139개소와 陶器所 185개소의 현재 위치와 거기서 생산되었던 자기와 도기의 성격 등을 아직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324개소의 도기소와 자기소 중 上品으로 표시된 곳은 廣州·尙州·高靈 등 세군데이며 中品은 자기소 45개소, 도기소 32개소 등 77개소이다.

 고려시대에는 청자가 번창하였지만 청자가마는 물론 청자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고 초기에 서남해안 일대에 산재하던 가마가 康津과 扶安으로 집결되면서 다른 지방에는 소규모의 가마가 불과 수개소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말에는 다시 분산되어 전국으로 가마가 확산되었는데, 바로 세종 때에 이들 가마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진행되어 가마의 확산과 도자기 수요의 확대가 전국적으로 급속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국가적인 시책이 필요하였으리라는 것도 이해된다.

 조선초에 이미 名窯로 알려진 광주 白磁窯는 세종 때부터 御用器를 번조하는 中央窯가 되었다고 생각되며 다른 지방의 모든 가마들도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 이 많은 가마들이 지향하고 있는 것은 백색으로의 발전이었으며 결국 모든 가마가 백자가마가 되는 것이었다.

 이성계가 세운 금강산 월출봉 사리탑에서 발견된 것은 백자였다. 그 때까지 청자가 존재하였고 분청사기가 태동하는 단계였으나 사리탑에 入納하는 중요한 그릇을 백자로만 번조했다는 것은 그 시대상황을 말해주는 한 증거라고 하겠다.≪慵齋叢話≫에는 “세종 때 御器는 오로지 백자만을 사용한다”라고 하였으며, “왕실용기도 銀器에서 백자로 교체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738) 成俔,≪慵齋叢話≫권 2. 세종 때 金宗瑞가 경상도 고령현의 백자를 보고 “白沙器는 귀현의 사기가 매우 좋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739) 金宗直,≪佔畢齋集≫彝尊錄 下, 先公事業 4.는≪岾畢齋集≫의 기록 등으로 보아 백자에 대한 높은 안목과 이해와 관심이 매우 높았음에 틀림이 없다. 새로운 백자에 대한 이해와 수요는 지방과 일반인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었다. 세종 6년(1424) 8월의 기록에는 “평안도에는 원래 磁器匠人이 없었으므로 중국사신의 내왕접대에 사용되는 器皿이 깨끗하지 않다. 그래서 충청도 각 관사로부터 숙련된 자기장 2명을 여기에 보내어 자기를 제조하고 가르치게 하였다”740)≪世宗實錄≫권 25, 세종 6년 8월 경신.는 기록이 있어, 이미 충청도에는 자기제작이 활발하여 자기장인을 평안도에 파견할 수 있었고 평안도에까지 자기가 확산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기(백자)의 확산으로 세조 12년 4월에는 “자기는 진상 이외는 공사를 불문하고 일절 사용을 금지하며…”741)≪世祖實錄≫권 38, 세조 12년 4월 무오.라는 기록과, 같은 해 6월에는 “白磁器는 獻上品, 이미 번조된 것, 사용중인 것을 제외하고는 공사간에 일절 사용을 금한다…”742)≪世祖實錄≫권 29, 세조 12년 6월 병오.라고 하여, 백토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産地를 빠짐없이 공조와 승정원에 기록하여 비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금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늘어나서 중종 32년(1537)에는 변방인 함경도 六鎭에서 조차 모두 백자를 사용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선 초기부터 새로운 백자의 제조와 수요가 신장·확산되어 16세기가 되면 거의 전국에 걸쳐 백자가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백자의 태동은 이미 고려말에 시작되었으며 조선 초기에 양질의 백자를 생산할 수 있을 만큼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세종실록지리지≫에 상품 자기소가 광주·상주·고령에 있다고 하였는데, 광주에는 牛山里·樊川里 등 요지에서 조선초로 생각되는 우수한 백자(상품)요지를 발견·조사한 바 있으며, 광주시 무등산록의 충효동 금곡리가마에서는 성종 8년(1477)에 제작된 것이 분명한 양질의 백자가 대량 발견된 바 있다.

 또한 세종 7년(1425)에 명의 사신 尹鳳이 聖旨라 하고 10개의 탁자에 쓸 沙器進獻을 요구한 사실은743)≪世宗實錄≫권 27, 세종 7년 2월 을묘. 세종초에 이미 우리 자기가 백자의 선진국인 명의 황실에서 필요할 만큼 발달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도 “매 탁자마다 대·중·소의 椀이 각각 1개, 대·중·소의 楪兒 각각 5개, 대·중·소의 獐本 10개면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수량도 많고 탁자에 필요한 격식을 갖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봉의 요구에 대하여 조정에서는 “광주목사에게 명나라에 보낼 ‘대·중·소 백자 장본 10개’를 精細하게 번조하여 바치라”고 하였다.≪용재총화≫에서 광주의 백자가 가장 정절하다고 한 것과 일치되는 내용으로 당시 광주에서는 매우 우수한 백자를 생산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이 때 명은 永樂帝에서 善德帝로 이어지는 기간으로 명의 백자가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앞으로≪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자기소와 도기소를 전면 조사한다면 조선 초기 백자산업의 모습이 더욱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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