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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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백자의 변천

 조선백자의 시대구분은 일반역사·정치사·사상사의 구분을 따르거나 미술사의 시대구분을 따를 수도 있으나, 일반역사와 미술사의 시대구분을 참조하면서 백자 그 자체의 변천을 시대구분의 기준으로 삼았다. 다시 말하면 조선백자의 시대구분을 전기/중기/후기로 나누면서 경기도 광주일대의 요지를 조사하고 백자의 질과 조형을 비교한 결과 현저하게 변모하는 시점을 시대구분의 분기점으로 삼으면, 전기는 태조 원년(1392)에서 인조 27년(1649)까지로, 중기는 효종 원년(1650)부터 영조 27년(1751)까지로, 후기는 영조 28년(1752)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조선 전기 백자의 변천상황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 전기 백자의 변천상황을 보다 세분하면, 15세기는 백자가 완성되고 발전하는 시기이며, 16세기는 15세기 백자가 전국으로 확산하고 조금씩 변모하는 시기이다. 뒤이어 17세기 전반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도자기 산업이 일시 크게 위축되었으나 16세기에 이어 다시 백자가 확산되고 백자 기형의 일부와 질이 점차 변모하는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구분을 염두에 두고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는 국초부터 백자의 생산과 관리에 힘을 기울이고 전국민들의 백자에 대한 선호도 대단히 높아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용재총화≫권 10에 “세종대의 어기는 백자만을 사용한다”라는 기록과 세종 7년(1425)에는 명의 사신이 백자를 요구한 사실이 있었으며, 광해군 때에도 왕은 백자를 사용한다고 한 기록들을 보면 이미 조선 초기에 우수한 백자를 생산할 수 있었던 실정을 잘 알려주고 있다.

 조선백자는 처음 경기도 광주·관악산·북한산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그 중에서 광주는 중앙관요로 조선백자가마의 핵심이었다. 광주에서 생산되는 백자는 전기와 중기 초반까지는 상품·중품·하품이 있었으며 중기 후반 이후부터 후기까지는 거의 상품 위주로 생산하였다. 상품 백자는 우수한 태토와 유약을 선정하고 수비하여 그릇을 빗고 초벌구이하고 유약을 씌운 다음 이를 다시 匣(匣鉢;개비)에 넣고 번조하였기 때문에 형태와 질과 색이 아주 우수한 것이며 이를 匣燔이라고 불렀다. 갑번은 왕실에서 사용하는 것이었으나 모든 사람들이 분원의 갑번자기를 쓰고 싶어하였다.≪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상품 백자는 경기도 廣州牧 樊川里, 경상북도 尙州牧 中牟縣 北楸縣里와 巳未隈里, 경상남도 高靈縣 曳峴里 등 4개소의 가마가 있었다. 광주 번천리 가마는 상품 백자를 생산하고 있었음이 밝혀졌으며 고령에서도 상품 백자가 발견되었으나 아직까지 상주의 상품 백자요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조선 전기의 상품 백자는 경기도 광주의 중부면 번천리·오전리와 退村面 道馬里·牛山里·觀音里·도장골·亭支里 등이 있고 초월면에는 武甲里에서 상품 백자가 발견되었다. 상품 백자는 갑에 넣고 번조하여 티하나 없는 청정한 것으로 유약은 거의 빙열이 없고 약간 푸르름을 머금었으며 약간 두껍게 시유되었고 은은한 광택이 있다. 잘 번조된 것은 유약 내에 기포가 적절히 포함되었고, 표면에 미세한 요철이 있어 면이 부드러우며 태토는 순백으로 유약과 태토가 밀착되어 박락된 예가 없으며 가는 모래받침으로 번조하였다. 이 백자의 색은 마치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난 후에 맑게 갠 하늘 아래서 소복이 쌓인 포근한 눈을 보는 것 같다. 중품은 상품의 굽받침과 대체로 유사하지만 태토 내에 약간의 철분이 함유되어 태토색이 담회색이며 유약내에도 미량의 철분이 들어 있어 회청색을 머금어 표면색은 담담한 회청색이다. 유약에는 미세한 빙열이 있는 경우가 많으며 가는 모래받침으로 번조하였다. 하품은 태토가 순백이고 유약 내에는 미량의 철분이 함유되어 있어 약간의 푸르름을 머금고 있다. 기면에 물레자국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고 죽절굽이 많으며 태토빚음눈으로 번조하였다.

 전기백자의 기형은 원만하고 유연하면서 조선 초기 국가이념을 형상화한 품격이 있다. 원만하면서 풍만하지 않고 유려한 선이 아닌 유연한 선의 흐름에서 절제하면서 내면에 선비다운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전기 후반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나라가 크게 황폐하였으며 우리의 도자기산업도 크게 위축되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陶磁器戰爭’ 또는 ‘茶碗戰爭’이라고도 부른다. 그 이유는 일본보다 선진문화국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진기술인 도자기에 대한 오랜 선망과 이를 갖고자 하는 욕망이 침략 원인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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