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3. 도자
  • 4) 조선백자의 문양

4) 조선백자의 문양

 백자의 문양은 시문기법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전통이 오래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태토에 문양을 나타내고 그 위에 유약을 입혀 번조하는 방법이다. 두번째는 태토 위에 유약을 씌워 완전히 번조하고 난 다음에 유면에 소오다釉·錫釉나 주로 鉛釉의 低火度熔融材를 섞어 문양을 나타낸 후, 600∼800℃의 낮은 火度에서 다시 한번 구워내어 문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첫번째는 釉下施文이고 두번째는 釉上施文이다. 유하시문으로는 백자에 陰刻(押印陰刻도 있음)·陽刻(半陽刻도 있으며 押印陽刻도 있음)·透刻 등으로 문양을 나타낼 수 있으며 象形으로 형상을 나타낼 수도 있다. 또한 酸化鐵·酸化銅·산화코발트 등의 顔料로 그림을 그려 문양을 나타내기도 한다. 음각·양각·투각·상형 등은 백자의 태토와 유약에 의한 문양 표현수단이고 산화철·산화동·코발트 등은 백자와는 전혀 다른 彩料를 가지고 문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음각·양각·투각·상형 등은 백자 자체 내에 변화를 주는 순수한 백자이며 채료로 문양을 나타내면 다른 색에 의해서 그 겉모습이 달라진 것으로 순백자라고는 하지 않는다. 우리 나라 백자는 이러한 유하시문을 하였으며, 유하시문보다는 아주 문양이 없는 순수한 백자를 더욱 사랑하였다.

 중국에서는 鉛釉彩料로 문양을 나타내는 유상시문이 금대로부터 시작하여 원대를 거쳐 명대에 크게 발전하고 청대에 극성하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상품 백자에는 거의 전부 유상시문이 있을 정도로 鉛釉系에 채료를 섞어 나타내는 문양을 즐겼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중국과 몇 천년 동안 교류가 빈번하면서도 명대 이후 그들이 그토록 좋아했던 유상시문을 한번도 번조하려고 시도해 본 일이 없었다. 우리는 독특하고 독창적이며 우수한 문화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화려하고 우수한 문화라 해도 함부로 우리에게 들어올 수 없었고, 우리 자신은 우리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을 선별해서 받아들여 자기화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는 백자시대라고 할 수 있다. 분청사기와 청자가 백자에 흡수되고 17세기 후반부터는 거의 백자 일색이었으며 그 중에도 아주 문양이 없는 純白磁가 90% 이상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백자에 음각과 양각은 발견된 예가 없고 매우 드물지만 투각과 상형이 있으며 산화철로 문양을 나타내는 철화백자와 산화코발트로 문양을 나타내는 靑華白磁(靑畵白磁), 黑象嵌을 시문한 象嵌白磁가 있다.

 중기에도 음각이 발견된 예는 아직 없으나 아주 드물지만 양각(陽印刻)이 있고 투각과 상형이 점차 늘어나며 청화백자·鐵畵白磁·銅畵白磁(辰砂白磁)가 있으며, 철화와 청화를 또는 철화·청화·동화·양인각을 같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후기에는 중기부터 다종다양해진 기종과 함께 문양의 내용도 다양해지고 문양의 표현기법도 폭이 넓어졌다. 수량은 매우 적지만 음각이 있으며 양인각과 투각·상형이 중기보다 더 늘어나고 청화백자는 급격히 그 수량이 많아졌다. 철화백자도 중기 말경부터 그 수량이 많아졌으나 철화문은 증가하지 않았다. 중기에서 비롯된 철화와 청화·동화 또는 철화와 동화·청화를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며 양인각과 상형에 여러 가지 안료를 같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또 후기에는 전면을 안료로 바르는 청화채·철채·동채가 등장하고 청화채음각·동채양인각·철채양인각도 나타난다. 철채에 청화와 동채 및 양인각을 같이 사용하는 경우도 있으며, 드물지만 露胎面과 시유면을 같이 이용하여 문양을 나타내는 방법도 있다.

 조선백자는 후기로 내려올수록 다종다양한 기형과 문양이 창출되어 후기의 후반경에는 마치 만화방창한 듯 화사한 국면을 연출하였다. 그러나 기형과 문양의 지나친 기교나 실용과 기능에 벗어나는 예는 거의 없었다. 19세기 당시 사회 일각에서는 순백자만을 지향하지 말고 보다 적극적으로 제반 백자기술을 도입하여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이 있는 백자도 생산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러한 시각이 점차 확산되고 시장경제가 발달하여 매우 다종다양한 器種과 문양이 후기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수구적인 안목과 넓은 시각을 지닌 정책의 미흡으로 자율적이고 분방한 발전은 이룩하지 못하고, 또한 검약사상에 길들여진 순백자에 대한 선호도는 끝까지 우리 마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선백자는 기능미를 살려 간결·소탈하고 단정·정직하며 그 속에 유머와 해학이 있다. 언제나 자연스럽고 어딘가 익살스러우며 단순·간결한 데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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