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4. 회화
  • 1) 고려전통의 계승과 중국화풍의 수용
  • (2) 중국화풍의 수용

(2) 중국화풍의 수용

 고려 후기로부터 이어받은 이러한 다양한 전통들 이외에 조선 초기에는 明으로부터 畵院體 화풍과 浙派 화풍이 전해져 수용되었다.759) 安輝濬, 위의 글, 316∼318쪽. 浙江省 출신인 戴進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형성된 절파 화풍은 이 지역 출신들이 대거 北京에 진출하여 화원이 됨에 따라 院體 화풍과의 구분이 어렵게 되었던 것인데 이 두 가지 화풍이 외교관계를 통하여 조선 초기에 우리 나라 화단에 전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화풍들은 소극적으로 수용되는 데 그치고 크게 유행하는 단계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이 시기에 수용된 절파 화풍은 유예기간을 거쳐 조선 중기에 주도적인 화풍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760) 明代의 浙派 화풍에 관해서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
鈴木敬,≪明代繪畵史硏究·浙派≫(東京 ; 木耳社, 1968).
故宮博物院編,≪明代宮廷與浙派繪畵選集≫(北京 ; 文物出版社, 1983).
Richard M. Barnhart et al, Painters of Great Ming : The Imperial Court and Zhe School(Dallas Museum of Art 1993).
우리 나라의 浙派系 화풍에 관하여는 安輝濬,<韓國浙派畵風의 硏究>(≪美術資料≫20, 1977), 24∼62쪽 참조.

 이처럼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에 전해져 자리를 잡았던 화풍들이 계승되는 이외에 새로운 화풍들이 명으로부터 수용되어 다양하고 풍부한 참고 자원이 되었다. 이 화풍들을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李·郭派(李成·郭熙派) 화풍 또는 郭熙派 화풍 ② 馬·夏派(馬遠·夏珪派) 화풍 또는 南宋 院體 화풍 ③ 高克恭系의 米法山水 화풍 ④ 明代의 院體派 및 浙派 화풍 ⑤ 李公麟系의 白描 畵法 ⑥ 文同·蘇軾 등의 湖州竹派의 墨竹 화풍

 主山을 웅장하게 나타내고 인간이나 동물을 개미처럼 작게 표현하는 巨碑派的 경향, 침식된 黃土地帶의 특징을 살린 雲頭皴法, 붓을 잇대어 써서 필흔이 보이지 않게 표현하는 독특한 필묵법, 산허리나 언덕의 밑 부분에 묘사된 照光效果, 게의 발톱처럼 나무가지를 표현하는 蟹爪描法, 針葉이 송충이 털처럼 보이는 소나무의 묘사법 등을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는 ①의 郭熙派 화풍은 북송의 화원이었던 곽희에 의해 확고하게 자리잡힌 화풍으로 북송대는 물론 금·원·명·청대까지도 그 전통이 계승되었는데, 우리 나라에는 이미 11세기에 전해져 고려 불화의 배경 산수에까지 파급되었다.761) 郭熙의 화풍이 이미 11세기에 고려에 전해졌음은 그의 작품<秋景烟嵐圖>2폭이 고려에 선물로 증정되었던 사실에 의해 확인된다. 이 사실을 곽희의 아들 郭思가 쓴<畵記>에 기록되어 있다(鈴木敬,『林泉高致集』の<畵記>と郭熙について>,≪美術史≫109, 1980 참조).
곽희 화풍이 13∼14세기의 고려 불화의 산수표현에서 중요한 몫을 했음은<五百羅漢圖>와 日本 鏡神寺 소장의<水月觀音圖>등을 통해서 밝혀진다(安輝濬,≪韓國繪畵史≫, 一志社, 1980, 그림 29 및 80쪽).
安輝濬,<高麗佛畵의 繪畵史的 意義>(≪高麗, 영원한 美 : 高麗佛畵特別展≫, 三星美術文化財團, 1993), 186쪽 및 圖 26·27 참조.
―――,≪大高麗國寶展≫(三星美術文化財團, 1995), 圖 1·2 참조.
이러한 전통이 조선 초기에 계승되어 당시 주도적 화풍이었던 安堅派 화풍의 형성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화면의 한쪽 구석에 무게가 주어지는 一角構圖, 나지막한 산과 넘치는 물을 특징으로 하는 殘山剩水式 표현, 근경을 강조하고 원경을 대담하게 안개 속에 감추거나 생략하는 근경 중심의 구성, 확대지향적인 공간처리, 북송대에 비하여 현저하게 커진 인물의 비중, 산이나 언덕의 표면에 가해진 도끼자국 모양의 斧劈皴法 등을 특색으로 하는 ②의 馬夏派 화풍도 조선 초기의 산수화풍 형성에 중요한 몫을 하였다. 李上佐의 작품으로 전칭되는<松下步月圖>(<그림 1>), 正使로 일본에 갔던 集賢殿學士 梁需가 찬한<芭蕉夜雨圖> 등의 작품들 이외에도 안견파 산수화에 보이는 넓은 공간구성 또한 이 마하파 화풍의 영향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믿어진다. 마하파 화풍 이외에도 劉松年 등의 南宋院體畵도 알려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③의 원대 高克恭系 米法山水 畵風도 李長孫·崔叔昌·徐文寶 등에 의해 수용되는 등 괄목할만한 비중을 지녔었다. 북송대의 米芾과 米友仁 부자가 창출한 미법산수 화풍은 南宋畵의 한 지류로서 米點을 위주로 한 표현이 특징이나 원대에 이르러서는 고극공이 米法, 董源과 巨然의 礬頭, 靑綠山水의 전통 등을 혼합하여 미법산수 화풍을 크게 변화시켰던 것이다. 이 고극공계의 새로운 미법산수는 고려시대에 전해져 조선 초기로 계승되었으며 이장손 등의 화풍 형성에 참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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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송하보월도
<그림 1>송하보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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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송대 마하파 화풍이나 院體 화풍을 위주로 하고 북송대의 곽희파 화풍과 그 밖의 화풍을 절충한 ④의 명대의 浙派 화풍이나 원체 화풍은 그것들이 토대로 삼은 화풍들의 보편적인 특징들 이외에 거칠고 강한 필법, 짙고 강렬한 묵법, 현저한 흑백의 대조 등이 두드러져 보이는데, 이러한 명대의 화풍은 북경 화단을 통하여 조선 초기에 전해져 일부 화가들에 의하여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姜希顔의<高士觀水圖>(<그림 2>)와 안견의 작품으로 잘못 전칭되고 있는 필자미상의<赤壁圖>등은 절파 화풍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예로 간주된다.762) 安輝濬·李炳漢,≪安堅과 夢遊桃源圖≫(圖書出版 藝耕, 1993), 141∼142쪽.
安輝濬,<俗傳 安堅筆 <赤壁圖>考究>(≪弘益美術≫3, 1974), 77∼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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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고사관수도
<그림 2>고사관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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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의 ①∼④는 조선 초기의 산수화풍의 형성에 있어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중에서 ②와 ④는 山水人物畵와 관련해서도 중요시된다.

 ⑤의 李公麟系의 白描 화법과 ⑥의 湖州竹派의 墨竹 화풍은 모두 북송대에 형성된 화풍으로 이미 고려시대에 전해져 조선 초기로 계승된 것들이다. 이 화풍들이 조선 초기의 인물화와 묵죽화에 많은 참고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화풍들 이외에도 더욱 다양한 화풍과 화가들이 조선 초기 화단에 알려졌었음을 申叔舟의≪保閑齋集≫ 畵記에 적혀 있는 安平大君의 소장품 목록만 보아도 쉽게 확인된다.763) 稻葉岩吉,<申叔舟の畵記>(≪美術硏究≫19, 1933), 267∼274쪽.
安輝濬, 앞의 책(1980), 93∼96쪽 및 121쪽.
―――,<高麗 및 朝鮮王朝初期의 對中 繪畵交涉>(≪亞細亞學報≫13, 1979), 157∼170쪽.
이처럼 다양한 화풍들을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참고하여 조선 초기 화가들은 자신들의 독자적인 화풍을 창출하였던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면 조선 초기의 화가들은 대체로 연대가 올라가는 송대의 화풍들을, 당시로서는 현대회화라고 볼 수 있는 명대의 화풍들보다 훨씬 선호하고 참고하는 경향을 띠었다. 이는 아마도 이미 고려시대에 수용되어 계승되었다는 역사적 필연성과 조선 초기에 팽배하였던 古典主義的 경향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764) 이 시대의 古典主義的 경향에 관하여는 安輝濬·李炳漢, 앞의 책, 27∼30쪽 참조. 이 밖에도 당시의 미의식에 이 화풍들이 부합하였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점들과 관련하여 조선 초기의 산수화단에서는 북송대의 곽희파 화풍을 참조하여 형성된 안견파 화풍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였던 반면에 이웃하는 일본에서는 동시대인 室町시대부터 안견파 화풍을 수용하면서도 남송대 마하파 화풍을 줄곧 선호하였던 사실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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