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4. 회화
  • 2) 왕공·사대부와 회화

2) 왕공·사대부와 회화

 조선시대에는 회화가 왕공·사대부와 화원들에 의하여 발전하였다. 그러나 억불숭유정책에 따라 고려시대까지 회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던 승려화가들의 활동은 극히 미미하게 되었다. 승려화가들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일반회화보다는 불교회화에 대체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일반회화는 왕공·사대부와 화원들이 양 축을 이루며 발전시켰다고 하겠다.

 왕공·사대부들은 새로운 화풍을 수용하거나 창출하고 화원들의 試取, 승진심사, 지도를 담당함으로써 사실상 화단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畵論에 밝고 畵格이나 畵品을 아는 이른바 ‘知畵格者’ 또는 ‘知畵品者’로서의 이들의 역할은 지극히 크고 중요하였다. 화원들은 이들의 지도와 감독, 보호와 후원을 받으며 국가적 繪事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초기부터 형성되어 말기까지 이어져 내려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왕공·사대부들이 화단을 이끌어 갔던 것은 유교적 또는 성리학적 文治主義의 결과라 하겠다.765) 安輝濬·李炳漢, 위의 책, 27∼29쪽.

 조선 초기에 왕공 출신으로 회화와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되는 인물로는 세종을 비롯하여 문종·성종·연산군 등의 군왕들, 세종의 셋째 왕자인 安平大君과 여덟째 왕자인 永膺大君, 孝寧大君의 아들인 永川君 李定, 성종의 열한번째 아들인 利城君 李慣, 臨瀛大君의 증손인 杜城令 李巖 등의 왕자들과 왕손들을 꼽을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조선의 국기를 튼튼히 다지고 문화의 기반을 굳건히 형성한 세종은 학문과 문장은 물론, 음악과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세종은 潛邸時에 난초와 대나무 8폭을 손수 그려서 注書 辛引孫에게 하사하기까지 하였다.766)≪世宗實錄≫권 109, 세종 27년 7월 정유.
≪文宗實錄≫권 8, 문종 원년 6월 무진.
문인화의 주요 화제이며 후대에 四君子를 이룬 난초와 대나무를 세종이 그렸다는 사실은 당시 왕실에서 문인화를 즐겨 그렸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점은 세종의 첫째 왕자인 문종 역시 눈 속의 매화 한 가지를 그리고 七言律詩를 한 수 제하여 동생인 안평대군에게 주었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767) 尹根壽,≪月汀漫錄≫.
吳世昌,≪槿域書畵徵≫(普文書店, 1975), 46쪽.

 세종의 예술적 재능과 애호사상은 문종 이외에도 안평대군과 영응대군에게도 강하게 전해졌다. 안평대군 李瑢이 세종연간의 문화계를 주도하였고 詩·書·畵·樂에 모두 뛰어났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趙孟頫의 松雪體를 토대로 했던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고 최대의 中國書畵 수장가였으며, 안견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세종연간의 회화의 발전은 안평대군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막중하였다.768) 安輝濬·李炳漢, 앞의 책, 34∼51쪽.

 영응대군 李琰도 역시 書畵에 뛰어났으며 음악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세종 때부터 궁실에 전해지고 소장되었던 모든 珍寶를 문종으로부터 하사받아 엄청난 서화수장가가 되었다.769) 安輝濬·李炳漢, 위의 책, 51∼54쪽.

 이처럼 세종과 그의 아들들인 문종, 안평대군, 영응대군의 사례들에 의거하여 볼 때, 조선 초기의 회화는 세종 때부터 왕실의 애호와 후원 하에서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왕실의 회화 애호 분위기와 풍류는 당시 集賢殿 학사들을 비롯한 사대부들과 화원들에게까지 널리 미치게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세종 때와 문종 때에 걸쳐 팽배하였던 왕실의 회화에 대한 애호와 후원은 세조 때 이후 잠시 주춤하는 듯하다가 성종 때 이르러 다시 생기를 띠게 되었다. 성종은 난초와 대나무 등을 직접 그렸을 뿐만 아니라 궁궐 내에 화원들을 모이게 하여 草木과 禽獸 등을 모사하게 하기도 하였다.770) 吳世昌, 앞의 책, 63쪽.
≪成宗實錄≫권 95, 성종 9년 8월 계사.
또한 당시의 대표적 화원이었던 崔涇과 安貴生에게 德宗의 御眞을 성공적으로 그렸음을 치하하고 파격적으로 堂上官에 제수하여 많은 논란을 야기시키기도 하였다.771) 安輝濬,<朝鮮王朝時代의 畵員>(≪韓國文化≫9, 1988), 161∼166쪽. 이러한 사례들은 성종이 회화를 진실로 사랑하고 애호하였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연산군도 성종 못지 않게 회화를 비롯하여 百工技藝를 장려하고자 힘써서 玩物喪志의 위험을 신하들로부터 경고받기도 하였고 궁궐 내에 성종 때에 일시 설치되었던 內畵廳을 상례화하기도 하였다.772)≪燕山君日記≫권 47, 연산군 8년 12월 신해.
安輝濬,≪朝鮮王朝實錄의 書畵史料≫(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3), 107∼111쪽.
이처럼 연산군도 세종이나 성종처럼 회화를 매우 아꼈음이 분명하다.

 이 밖에 효령대군의 아들인 永川君 李定은 뛰어난 산수화가였던 인물로 전해지며, 성종의 아들인 利城君 李慣은 恭靖大王 및 定安王后의 영정을 봉심하는 일을 成世昌과 함께 하였다.773) 永川君 李定에 관해서는 安輝濬·李炳漢, 앞의 책, 53∼54쪽 참조.
李慣의 어진 봉심에 관하여는≪中宗實錄≫권 94, 중종 35년 10월 무진 참조.
이로 보면 이성군 이관은 ‘지화격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세종의 넷째 왕자 임영대군의 증손인 두성령 이암은 私奴 이상좌와 더불어 중종 어용을 담당하기도 하였다.774)≪仁宗實錄≫권 1, 인종 원년 정월 임자. 이로써 보면 그는 초상화에도 뛰어났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는 오히려 강아지 그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이 밖에 寧海君 李瑭의 아들인 吉安都正 李義도 墨梅를 잘 그렸다.775) 吳世昌, 앞의 책, 64쪽.

 이처럼 조선 초기에는 여러 군왕과 왕자나 왕손들이 직접 회화를 즐겨 그리고 그것을 애호하며 후원함으로써 회화가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왕이나 왕족들 이상으로 회화의 창작에 직접 기여하고 화원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대부들이었다고 하겠다. 그들은 학문적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화론에 밝았고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화풍을 폭넓게 이해하고 수용하였으며 화원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조선 초기에 활동한 사대부 출신 화가들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자들은 姜碩德·姜希顔·姜希孟 부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시·서·화에 뛰어났던 인물들로 조선 초기의 회화에 끼친 영향이 대단히 컸다. 강석덕의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나 그의 영향은 두 아들 강희안과 강희맹에게 직접 미쳤을 것으로 믿어진다. 강희안은<고사관수도>등을 남겼고 그의 동생 강희맹은 도화서의 최고 책임자인 提調를 지내며 당시의 화단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776) 安輝濬·李炳漢, 앞의 책, 55∼62쪽.

 이들 이외에도 尹三山·鄭穰·金紐·金瓘·孫舜孝·柳自湄·金時習·尹晳·南伋·金宏弼·李宗準·柳藕·洪彦弼·李荇·宋世琳·成世昌·金淨·崔壽城·梁彭孫·申潛·安珽·李文楗·安瓚·高雲·蔡無逸·柳辰仝·趙昱·王希傑·蔡無敵·鄭世光 등등 많은 사대부들이 그림을 잘 그렸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으나 실제로 작품을 남기고 있는 사대부 화가들은 극히 드물다. 어쨌든 이처럼 많은 사대부들이 그림에 뛰어났다고 기록에나마 전해지고 있는 것은 조선 초기 회화의 발달에 사대부들의 공이 적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밝혀 준다고 하겠다.

 묵죽을 잘 그렸다고 전해지는 세종 때의 朴彭年을 포함한 집현전 학사들을 위시하여 조선 초기의 수많은 사대부들은 회화를 좋아하고 진흥시키는 데에 직접·간접으로 기여하였던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의 왕공·사대부들은 회화의 창작과 후원, 화원들에 대한 지도, 새로운 화풍의 수용 등 여러 면에서 회화의 진흥과 발달에 적극 기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조선 초기에 한정되지 않고 그 후 중기를 거쳐 후기와 말기까지 이어져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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