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4. 회화
  • 3) 도화서와 화원

3) 도화서와 화원

 조선 초기부터 왕공·사대부들과 함께 회화의 발달에 쌍벽을 이루며 기여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화원들이었다. 畵員·畵史·畵師·畵工 등으로 일컬어진 이들은 주로 圖畵署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이 대표적이고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 사실이나, 이들 이외에도 한양의 巨商들에게 소속되어 있던 私畵員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믿어진다.777)≪中宗實錄≫권 75, 중종 28년 7월 갑인.

 왕공·사대부 출신의 화가들이 주로 산수나 묵죽 등 순수한 감상을 위한 그림의 제작에 참여하고, 어진의 제작시에 감독을 맡으며, 이론적 측면에서 화원들을 선도했던 반면에 화원들은 회화의 실무를 맡아 어진을 그림은 물론 궁중과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행사를 담아 그리는 儀軌圖를 위시한 記錄畵와 地圖의 제작 등 일체의 실용적 목적의 그림들을 그리는 이외에 왕공·사대부들의 요청에 따라 기록적 성격을 띤 초상화와 契會圖를 제작하기도 하고 山水·人物·翎毛·花草 등 감상을 위한 다양한 그림들도 그렸다.778) 安輝濬, 앞의 책(1980), 121∼122쪽. 또한 중국이나 일본에 파견되는 사절단을 따라가서 그림을 통한 문화외교에 큰 몫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화원들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화원을 양성하고 그들이 몸담아 활동하면서 국가적 繪事에 임하도록 설치되었던 기구가 바로 도화서였다. 국초부터 국가적 회사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畵院의 본래 이름은 도화원이었으나 1463년부터≪經國大典≫이 편찬되었던 1469년 사이 어느 때인가 도화서로 개칭되었는데 이는 화원의 격을 낮추어 조정한 결과로 믿어진다.779) 安輝濬, 앞의 글(1988), 149∼152쪽.

 도화서의 조직과 구성은≪경국대전≫의 禮典·工典 등에 의하여 밝혀진다. 도화서는 예조에 소속된 종6품 아문으로 구성원은 正職인 京官職으로서 提調 1인과 종6품인 別提 2인이 있었다. 도화서의 최고 책임자인 제조는 예조판서가 겸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외에 雜職으로 20인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 時仕 화원인 종6품 善畵 1인, 종7품 善繪 1인, 종8품 畵史 1인, 종9품 繪史 2인과 仍仕 화원인 西班遞兒職 3인(종6품 1인, 종7품 1인, 종8품 1인)이 주를 이루었다.780) 安輝濬, 위의 글, 148∼153쪽. 이처럼 도화서는 경관직인 제조와 별제 밑에 선화·선회·화사·회사 등의 직함을 지닌 화원 5명, 서반체아직 화원 3명, 직책이 없는 화원 12명이 함께 소속되어 있었다. 이 밖에 도화서에는 畵學生徒 15명, 差備奴 5명, 跟隨奴 2명, 褙貼匠 2명도 소속되어 있었다.781) 安輝濬, 위의 글, 151∼152쪽. 생도들은 화업을 닦아 화원들이 될 사람들이며 차비노와 근수노는 도화서의 잡역에 종사하였을 것이다. 배접장 2명은 화원들의 작품들을 배접하거나 표구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도화서 조직은 초기부터 매우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에서 확인되는 도화서의 직제나 화원 및 생도의 숫자 등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약간씩 변하였다. 별제 이외에 敎授職이 신설되고 篆字官 2명이 배치된 점이나 생도의 수가 30명씩으로 증가된 것은 그 좋은 예들이다. 이 밖에 경관직인 종6품의 별제는 본래 도화서로 하향 변경되기 전인 도화원 시절에는 정5품 혹은 종5품의 別坐였던 점도 주목된다.782) 安輝濬, 위의 글, 152쪽. 즉 도화원이 도화서로 격하되면서 그 실무책임자인 5품의 별좌가 종6품인 별제로 하향 조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원의 선발은 試取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역관이나 의원처럼 잡과에는 속하지 못하였다. 이는 圖畵가 특수한 재능을 필요로 하는 특수분야일 뿐만 아니라 잡과에 속하는 다른 분야들에 비하여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낮게 인식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화원의 시취에 관해서는≪경국대전≫ 예전의 取才條를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 시취에 응하는 자는 竹·山水·人物·翎毛·花草의 5과목 중에서 두 가지를 택하여 시험을 치게 되어 있었다. 채점방식은 죽을 1등, 산수를 2등, 인물과 영모를 3등, 화초를 4등으로 하되, 화초를 기준으로 하여 잘 그린 것에 해당하는 通은 2分을 주고 합격권에 든 略은 1분을 주었다. 인물과 영모 이상의 주제에는 각각 1분씩 더하는 방식으로 채점하였다. 이러한 채점방법을 알기 쉽게 풀어서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竹(1등 과목)  通 : 5分(4+1)
 略 : 4分(3+1)
山水(2등 과목)  通 : 4分(3+1)
 略 : 3分(2+1)
人物·翎毛(3등 과목)  通 : 3分(2+1)
 略 : 2分(1+1)
花草(4등 과목)  通 : 2分
 略 : 1分

 이러한 채점방식에 의거해서 볼 때 어떤 응시자가 1등 과목인 대나무와 3등 과목인 인물을 택하여 대나무는 略을 받고(4분) 인물은 通을 받았다면(3분), 총점은 7분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응시자가 3등 과목인 영모를 택해여 약을 받고(2분) 4등 과목인 화초를 선택해서 통을 받았다면(2분) 총점은 4분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처럼 등차가 낮은 과목들을 선택하는 것은 등차가 높은 과목들을 택하는 것보다 훨씬 불리했음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등차가 높은 과목들을 택하여 시험을 치는 것이 등차가 낮은 과목들을 택할 경우보다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는지 조선시대에는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화원 중에서 화초를 전문으로 그린 화원이나 그 방면에 일가를 이룬 화원이 거의 없었음이 주목된다. 즉 화원의 시험제도가 회화 분야별 발전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믿어진다.

 대나무를 1등 과목으로 설정했던 것은 북송대 문동·소식 등 호주죽파 문인화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생각되고, 산수를 2등 과목으로 했던 것은 당시 왕공·사대부들의 자연관과 풍류사상을 반영했던 것 이외에, 그것이 감상화의 대종을 이룰 뿐만 아니라 화가의 창의력과 화풍의 변천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점을 지녔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또한 초상화를 포함한 인물을 비교적 낮은 3등 과목으로 정했던 것은 낮은 등차에도 불구하고 어진제작과 그것을 통한 가장 빠른 출세의 길이 보장되므로 화원 지망생이면 누구나 중요시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이미 초기부터 화원들의 시취에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었음이 간취된다.

 조선시대에는 도화원 혹은 도화서를 통하여 수많은 유능한 화원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세종과 성종 때를 중심으로 하여 安堅·崔涇·安貴生·裵連·石敬·李上佐 등 회화사상 뚜렷한 화원들이 배출되었다.

 안견은 잘 알려져 있듯이 세종 때에 안평대군의 후원을 얻어 대성한 조선시대 최고의 산수화가로 조선 초기는 물론, 조선 중기의 화단과 일본의 室町시대 대표적 수묵산수화가였던 周文〔슈우분〕일파의 화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불후의 명작인<夢遊桃源圖>(<그림 3>)를 남겼다.783) 安輝濬·李炳漢, 앞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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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몽유도원도
<그림 3>몽유도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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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 때에 등장하여 성종 때에 대성했던 최경은 인물화의 최대 거장으로 산수화의 안견과 병칭되었던 화원으로 어진제작의 공로로 성종에 의해 당상관에 제수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아 많은 논란을 빚은 바 있다.784) 安輝濬, 앞의 글(1988), 161∼165쪽. 이는 조선 초기의 최대의 화원이었던 안견이 종6품인 善畵를 거쳐 정4품 서반체아직인 護軍이 되었던 것보다도 훨씬 파격적인 것이어서 성종 때에 엄청난 논란을 야기시켰던 것이다. 경기도 安山의 소금쟁이 집의 아들이었던 최경은 이러한 논란과 높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어 아쉽기 그지없다.

 안귀생과 배련은 최경과 함께 성종 때에 활동했던 대표적 화원들로 산수와 인물에 모두 뛰어났었다. 안귀생은 최경과 함께 당상관에 제수되었을 정도로 인정받던 인물인데 수양대군의 인솔을 받아 鄭陟·姜希顔·梁誠之 등과 함께 三角山 普賢峰에 올라 山形과 水脈을 살펴보고 京城地圖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중국 사신에게 줄 金剛山圖를 제작하기도 하였다.785) 安貴生의 당상관 제수에 관한 전말은 安輝濬, 위의 글, 163∼166쪽 참조.
안귀생이 京城地圖와 金剛山圖를 제작했던 사실은≪端宗實錄≫ 권 11, 단종 2년 4월 무술 및 권 14, 단종 3년 윤 6월 정미 참조.
이러한 예들은 조선 초기에 배련도 최경·안귀생과 함께 昭憲王后와 세조·예종의 어진제작에 참여하였으며 그 공으로 加資陞職되기도 하였고 금강산에 파견되어 그 산형을 그려 오기도 하였다.786) 裵連에 관한≪世祖實錄≫ 및≪成宗實錄≫의 기록들은 安輝濬, 앞의 책(1983), 70·73·84·94·103쪽 참조. 한편 배련의 아들 裵孟乾은 생원진사시를 치기 위하여 증조 이하로는 높은 관직을 지낸 조상이 없음을 아쉽게 생각하여 고조를 증조로 칭하고 아버지의 이름 ‘連’을 ‘蓮’으로 고쳤다가 발각되기도 하였다.787)≪成宗實錄≫ 권 224, 성종 20년 정월 계해.
安輝濬, 앞의 글(1988), 166쪽.
이는 안견의 아들 安紹禧가 문과에 등제하여 典籍을 지냈던 것과 대조를 보이는 것으로 조선 초기 화원들의 신분 상승과 관련하여 주목을 끈다.788) 安輝濬, 위의 글, 159∼160쪽.
安輝濬·李炳漢, 앞의 책, 78∼79쪽.
안귀생과 배련도 당시의 높은 평가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최경과 마찬가지로 전하는 작품이 전무하다.

 石敬은 명종 4년(1549)에 이상좌와 함께 중종영정을 제작했던 石璟과 동일인물로 간주되는데 안견파 화풍을 따른<山水圖>와<雲龍圖>를 남기고 있다.789) 화원 石璟과 李上佐가 그리고 利城君 李慣이 감조했던 中宗影幀은 방불하지 않아 待罪하였던 내용의 기록이 전한다(≪明宗實錄≫ 권 9, 명종 4년 9월 갑술).
石敬의<산수도>에 관해서는 安輝濬,≪韓國繪畵의 傳統≫(文藝出版社, 1988), 188∼189쪽 참조.
석경의<雲龍圖>는 安輝濬,≪東洋의 名畵 1 : 韓國Ⅰ≫(三省出版社, 1985), 圖 39 및 159쪽의 해설 참조.
한편 이상좌는 본래 어느 사대부의 노복이었다가 그림 재주 덕택에 중종에 의해 면천되어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슬하에 역시 화원으로 조선 중기에 성공한 아들들 李崇孝와 李興孝, 손자 李楨을 두어 대표적 화원가문을 이루었다. 남송 때의 화원화풍인 마하파 화풍을 따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산수와 인물을 모두 잘 그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밖에도 많은 화원들의 이름이 기록에 보이나 대부분 전해지는 작품이 없어 구체적인 양상의 파악이 어렵다. 이상 대강 소개한 화원들만 보아도 조선 초기에 화원들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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