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4. 회화
  • 4) 회화의 제경향
  • (1) 안견의 화풍

(1) 안견의 화풍

 이미 앞에서 소개하였듯이 조선 초기에는 여러 가지 화풍들이 수용되고 자리를 잡았다. 그 중에서도 제일 두드러지고 가장 영향력이 컸던 화풍은 안견이 이룬 화풍이다. 안견은 그 이전의 전통을 광범하게 섭렵하고 여러 대가들의 장점을 참조하여 자신의 화풍을 형성하는데 토대로 삼았는데 그 중에서도 북송의 곽희에 의해 주도된 곽희파 화풍과 남송의 화원들인 마원과 하규가 형성한 마하파 화풍이 특히 중요하게 참고되었다. 이 두 가지 화풍은 비록 송대에 형성되었지만 중국에서도 후대에 수백년에 걸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한국이나 일본에도 다소간을 막론하고 수용되었던 것이다. 안견이 이 두 가지 화풍을 현명하게 참고하였음은 뒤에 살펴볼 그의 유일한 진작인<몽유도원도>와 여러 傳稱作品들을 통하여 확인된다. 그러나 안견 화풍의 기조가 되었던 것은 곽희파 화풍인데 이 화풍은 고려시대에 이미 소개되어 일본의 鏡神寺 소장의 대형<水月觀音圖> 전경의 바위 묘사에서 볼 수 있듯이 정착되었음이 확인된다.790) 郭熙의 화풍이 이미 11세기에 고려에 전해졌음은 그의 작품<秋景烟嵐圖>2폭이 고려에 선물로 증정되었던 사실에 의해 확인된다. 이 사실을 곽희의 아들 郭思가 쓴<畵記>에 기록되어 있다(鈴木敬,<『林泉高致集』の<畵記>と郭熙について>,≪美術史≫109, 1980 참조).
곽희 화풍이 13∼14세기의 고려 불화의 산수표현에서 중요한 몫을 했음은<五百羅漢圖>와 日本 鏡神寺 소장의<水月觀音圖>등을 통해서 밝혀진다(安輝濬,≪韓國繪畵史≫, 一志社, 1980, 그림 29 및 80쪽).
安輝濬,<高麗佛畵의 繪畵史的 意義>(≪高麗, 영원한 美 : 高麗佛畵特別展≫, 三星美術文化財團, 1993), 186쪽 및 圖 26·27 참조.
―――,≪大高麗國寶展≫(三星美術文化財團, 1995), 圖 1·2 참조.
이러한 고려화된 화풍이 조선 초기로 이어져 안견 화풍의 토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밖에 안견이 오랫동안 따르며 모셨던 안평대군의 중국화 소장품 속에 곽희파 계통의 작품들이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 사실도 안견 화풍의 형성과 관련하여 크게 주목된다.791) 安輝濬, 앞의 책(1980), 91쪽.

 안견은 산수화에서 조선시대를 통틀어 후기의 정선과 함께 최대의 거장이었던 인물이지만 산수화 이외에 초상화는 물론 花卉·梅竹·蘆雁·樓閣·駿馬·儀仗圖 등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을 그렸음이 기록들에 의하여 밝혀진다.792) 安輝濬·李炳漢, 앞의 책, 94∼95쪽의<安堅作品目錄> 참조. 그러나 “산수에 안견, 인물에 최경”으로 지칭되었던 사실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안견의 특장 분야는 역시 산수화였음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793) 吳世昌, 앞의 책, 52쪽.

 기록에 의하면 안견의 대표작이<靑山白雲圖>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794)<靑山白雲圖>에 관해서는 安輝濬·李炳漢, 앞의 책, 88∼91쪽 참조. 현재 세상에 남아 있는 것 중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작품은<몽유도원도> 한 점뿐이어서 이것이 그의 대표작이 될 수밖에 없다(<그림 3>).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세종 29년(1447) 4월 20일에 도원을 여행하는 꿈을 꾼 후 그 내용을 안견에게 명하여 그리게 한 것으로 3일만에 완성되었다. 이 작품의 제작경위는 안평대군이 쓴 발문에 의하여 밝혀져 있다. 이 발문의 내용은 陶潛(淵明)의<桃花源記>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서 도가사상의 영향을 엿보게 한다.795) 安輝濬·李炳漢, 위의 책, 112∼124쪽. 이 점은 이 그림의 도원 부분 아래쪽 물가에 어부가 타고간 배가 보이고 도원의 상단에 바위산들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어서 方壺를 연상시키고 있는 점에서는 물론, 이 밖에도 이 작품에 찬문을 쓴 申叔舟·李塏·河演·宋處寬·金淡·高得宗·姜碩德·鄭麟趾·朴堧·金宗瑞·李迹·崔恒·朴彭年·尹子雲·李苪·李賢老·徐居正·成三問·金守溫·千峰(卍雨)·崔脩 등 당대의 대표적 인물들이 자필로 쓴 글들의 이곳저곳에서도 드러난다. 어쨌든 이처럼<몽유도원도>는 안견의 그림, 안평대군과 이들 혜성과도 같은 21명의 인물들이 직접 짓고 쓴 시와 글씨가 어우러져 ‘시·서·화’ 三絶의 경지를 이루고 있어서 일종의 종합적인 예술품이라 할 수 있다.

 <몽유도원도>는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먼저 이야기의 전개가 전통적인 우측에서 좌측으로 진행시키는 방법과는 반대로 왼쪽 하단부에서 시작하여 오른쪽 상단부에서 마무리되도록 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즉 화면의 좌 하단부로부터 우 상단부로 대각선을 이루듯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 점차 상승감과 고조감을 증가시키고 끝맺음하도록 배려한 구성의 묘가 두드러진 특징을 드러낸다. 또한 좌측으로부터 우측으로 옮겨가면서 현실세계, 도원의 바깥쪽 입구, 도원의 안쪽 입구, 도원의 네 부분이 무리를 이루며 보태지듯 전개되고 있다. 네 부분은 따로따로 떨어진 듯 하면서도 서로 이어져 하나의 통일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도원의 바깥 입구와 안쪽 입구의 산허리를 끼고 이어지는 산길은 이러한 연계성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왼편의 현실세계는 나지막한 토산인데 반하여 나머지 도원과 그 곳으로 이어지는 입구 부분들은 환상적인 바위산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매우 대조적이다. 그리고 도원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져 있으면서도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광활한 시각적 효과를 효율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안견은 도원을 부감법을 써서 비탈지게 표현하고 제일 가까운 하단에 위치한 산들의 높이를 대폭 낮추어 표현하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이 밖에도 高遠·平遠·深遠이 대조를 이루는 구성, 산들의 밑둥에 보이는 照光효과의 표현, 나무, 산과 물, 집들의 묘사에서 간취되는 섬세한 필묵법과 유려한 설채법도 안견의 대가다운 면모를 잘 드러낸다. 이러한 점들은 안견이 곽희파의 영향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만의 독특하고 수준높은 경지를 개척했음을 입증하여 준다. 전체적인 구도와 구성은 말할 것도 없고 세부의 묘사에 이르기까지 안견의 탁월한 창의성과 지혜, 고도로 숙달되고 세련된 표현력과 묘사력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안견 화풍의 면모는 그의 여러 전칭 작품들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 중에서도 이른 봄, 늦은 봄, 이른 여름, 늦은 여름 등 사계절의 모습을 8폭에 그린<四時八景圖>는 화풍으로나 연대로나 안견 화풍을 이해하는데<몽유도원도>와 함께 가장 참고할만 하다796) 安輝濬·安炳漢, 위의 책, 138∼140쪽.
安輝濬,<傳 安堅筆 ‘四時八景圖’>(≪考古美術≫ 136·137, 1978), 72∼78쪽.
(<그림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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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사시팔경도
<그림 4> 사시팔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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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사시팔경도
<그림 5> 사시팔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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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화첩의 8폭은 다소간을 막론하고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구도 면에서 각폭은 한쪽 縱半部에 무게가 치우쳐 있는 이른바 偏頗構圖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한폭씩 떼어서 보면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러나 ‘初春’과 ‘晩春’, ‘初夏’와 ‘晩夏’, ‘初秋’와 ‘晩秋’, ‘初冬’과 ‘晩冬’ 등 두 폭씩 마주놓고 보면 좌우가 균형을 이루게 된다. 이른 경치는 오른쪽에 무게가 주어져 있고 반대로 늦은 경치는 왼쪽에 무게가 쏠려 있어 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각 폭은 몇 개의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景群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경군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시각적으로는 마치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는 것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들 경군들 사이에는 넓은 수면과 안개가 펼쳐져 있어서 확대된 공간을 형성한다. 이러한 확대 지향적인 공간개념은 남송대의 원체화, 특히 마하파 화풍과도 연관이 된다고 믿어지지만, 편파구도, 경군들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시각적 조화를 이루는 구성과 함께 안견 화풍의 큰 특징을 형성한다. 또한 이러한 특징들은 안견과 그의 추종자들의 작품들에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이처럼<사시팔경도>에는 북송대 이후의 곽희파 화풍과 남송대의 마하파 화풍을 함께 참조한 것이 엿보인다. 전자는 필묵법, 해조묘의 수지법, 계절의 변화에 따른 표현상의 두드러진 차이, 자연의 웅장함과 인간의 미미함을 대조적으로 드러내는 巨碑派적인 경향 등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며, 후자는 확대지향적인 공간개념과 안개에 싸인 먼곳의 土坡 등에서 엿보인다. 상이한 회화의 전통들이 이처럼 융합되어 나타나 있음을 보면 안견이 전대의 대가들의 좋은 점들을 따서 절충하여 자신의 화풍을 형성하였음이 분명하게 확인된다.<사시팔경도>에 보이는 이러한 제반 특징들은 조선 초기 안견과 그의 추종자들, 소위 안견파 화가들의 작품들에서 보편적으로 간취된다.

 이 밖에 안견의 작품으로 잘못 전칭되고 있는 작품들 중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赤壁圖>나<瀟湘八景圖>처럼 명대의 절파계 화풍의 영향을 수용하였거나 16세기에 형성된 짧은 선이나 점으로 이루어진 소위 短線點皴을 지닌 것들이 섞여 있어 안견 화풍의 이해에 혼란을 일으키고 있기도 하다.797) 安輝濬·李炳漢, 위의 책, 140∼142쪽.
安輝濬, 앞의 글(1974), 77∼86쪽.
―――,<國立中央博物館所藏 瀟湘八景圖>(≪考古美術≫138·139, 1978), 136∼142쪽.

 안견 화풍은 15세기는 물론 16세기에 이어져 변화를 겪게 되었다. 구도도 전형적인 편파구도만이 아니라 대칭구도도 유행하였는데, 편파구도도 앞에서 살펴본<사시팔경도>처럼 주어진 쪽에 2단을 이루는 偏頗二段構圖와 梁彭孫의<山水圖>(<그림 6>)와 16세기의 일련의<소상팔경도>들에서 보듯이 한쪽에 근경·중경·원경(후경)이 3단을 형성하는 편파3단구도로 나뉘어진다.798) 安輝濬, 앞의 책(1988), 162∼202쪽.
―――,<朝鮮初期 安堅派 山水畵 構圖의 系譜>(≪蕉雨 黃壽永博士 古稀紀念 美術史學論叢≫, 通文館, 1988), 823∼844쪽.
또한 일본에서 개인 소장의<讀書堂契會圖>의 경우처럼 대칭구도를 이루거나 단선점준과 현저한 흑백의 대조를 보여 주는 경향도 대두하였다(<그림 7>).799) 安輝濬, 앞의 책(1980), 110·142∼143쪽.
―――,<16世紀 朝鮮王朝의 繪畵와 短線點皴>(≪震檀學報≫46·47, 1979), 217∼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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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산수도
<그림 6>산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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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독서당계회도
<그림 7>독서당계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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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안견파 화풍은 15세기를 거쳐 16세기로 이어지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이 시대 모든 국가적인 기록화의 기본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초기는 물론 조선 중기로까지 계승되었다. 안견 화풍의 영향을 받았던 조선 초기와 중기의 화가로는 石敬·梁彭孫·鄭世光·申師任堂·金禔·李不害·姜孝同·李正根·李興孝·李楨·李澄·金明國·李成吉·趙溭 등이 알려져 있다. 이 밖에도 현재 전해지고 있는 조선 초기 대부분의 필자미상의 산수화들이 안견파의 화풍을 반영하고 있어서 그 절대적인 영향의 심도를 엿보게 한다.

 이 밖에 안견의 화풍은 李自實이 1550년에 그린 <觀音三十二應身圖>와 필자미상의<五百羅漢圖>등 일부 조선 초기 불교회화의 산수배경에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그 영향이 일반회화에 그치지 않고 불교회화에까지 파급되었음이 확인된다.800)≪高麗, 영원한 美 : 高麗佛畵特別展≫, 圖 19∼19-3·31∼31-2 참조.

 안견 화풍의 영향은 이처럼 조선 초기와 중기의 화단에 폭넓게 미쳤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전해져 室町시대 수묵산수화의 최고봉이었던 周文과 그의 일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文淸도 안견의 화풍을 따라 그렸던 화가로 일본에 건너가 활약하며 그 곳의 화단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안견의 화풍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큰 공헌을 한 우리 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화풍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우리 나라 역사를 통틀어서 대내외적으로 이처럼 폭넓게, 그리고 그토록 장기간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한 특정 화가나 화파는 그 예를 다시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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