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4. 회화
  • 4) 회화의 제경향
  • (3) 이상좌의 화풍

(3) 이상좌의 화풍

 조선 초기의 화단에서 관심을 끄는 또 하나의 인물이 노예 출신으로 화원이 되었던 이상좌이다. 그는 16세기 전반기에 활약하면서 산수화와 인물화를 겸장하였는데, 산수화에서는 일반적으로 남송대 마하파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대표적인 화가로 간주되어 왔다.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는<송하보월도>(<그림 1>)와<漁暇閑眠圖>는 그 좋은 예들이다.808) 安輝濬, 앞의 책(1985), 圖 18 참조.

 자연의 일부만을 화면의 한쪽 구석에 담은 一角構圖, 근경에 역점을 두고 원경을 안개 속에 사라지는 모습으로 나타낸 구성, 인물의 비중이 비교적 큰 점, 꾸불꾸불하게 각진 나무의 모습 등은, 이<송하보월도>가 남송대 마하파의 영향을 받았음을 말해 준다. 또한 이 작품이 이상좌의 진필이라면 그가 남송대 마하파 화풍을 따랐음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이상좌의 진작임을 증명해 주는 증거가 전혀 없어서 그가 학계의 일반적인 추론처럼 남송대의 마하파 화풍을 수용했거나 그 화풍의 선두주자였다고 단정할 수 없는 처지이다. 또한 그의 家法을 이었을 듯한 그의 아들 이숭효와 이흥효 및 손자 이정의 작품들은 마하파 화풍보다는 안견파 화풍과 절파 화풍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어서, 그가 과연 마하파 화풍의 적극적인 추종자였을까 의문스럽다. 이러한 의문은 尹斗緖의≪記拙≫ 중의 畵評에서, 이상좌에 관하여 “안견의 정밀함은 얻었으나 안견의 밝고 상쾌함에는 약소하다”라는 평에 의해 더욱 증폭된다.809) 李英淑,<尹斗緖의 繪畵世界>(≪미술사연구≫ 창간호, 1984), 90∼93쪽. 이 평과 그의 후손들의 화풍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마하파 화풍보다는 오히려 안견의 화풍을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고 믿어진다. 그렇다면 이상좌를 마하파 화풍의 대표적인 추종자로 간주하기가 어렵다고 여겨지나 현재로서는 확단하기 곤란하다. 확실한 작품이 발견될 때까지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송하보월도>에서 간취되는 남송대의 마하파 화풍이 조선 초기 화단에 소개되어 있었고 또 수용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하겠다. 이 점은 고려시대의 일부 불교회화 중에 마하파 화풍의 영향이 엿보이고 있는 점, 안평대군의 소장품 속에 마원의 작품이 2점 포함되어 있던 사실,810)<長松茅舍圖> 1점과<溪居灌盆圖> 1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馬遠이 南宋의 화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元代의 화가로 잘못 분류된 것은 이 목록을 작성한 申叔舟의 남송회화 및 마원에 관한 인식부족이나 착오에 기인한 것으로 믿어진다. 1410년에 일본에 정사로 갔던 집현전 학사 梁需가 찬한<芭蕉夜雨圖>(<그림 8>)가 수지법과 토파의 묘사에서 마하파 화풍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 점, 안견파의 산수화들에서 한결같이 마하파적인 공간처리와 토파의 묘사를 드러내고 있는 점 등에서 확인된다. 또한 1550년경에 제작된 필자미상의 <戶曹郎官契會圖>를 보면 전체적인 구도는 마원의 것을 따르고 樹枝와 山 표면의 묘사 등 부분에서는 안견파 화풍의 잔흔을 남기고 있어서 안견파 화풍으로부터 마하파 화풍을 거쳐 앞으로 조선 중기에 유행할 절파계 화풍으로 연계되는 과도기적 현상이 엿보이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811) 安輝濬, 앞의 책(1980), 그림 46 및 144쪽.
―――,<16世紀中葉의 契會圖를 통해본 朝鮮王朝時代 繪畵樣式의 變遷>(≪美術資料≫ 18, 1975), 36∼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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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파초야우도
<그림 8>파초야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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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마하파 화풍은 비록 곽희파 화풍을 토대로 한 안견파 화풍처럼 절대적이지는 못했지만 조선 초기 산수화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또 적지않은 역할을 했음이 드러난다. 사실 마하파 화풍이 절파 화풍의 형성에 있어서 주된 요인이었던 관계로 절파 화풍을 수용했던 조선 초기나 그것이 크게 유행했던 조선 중기에 마하파 화풍이 알려지고 수용되었을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이상좌의 산수화로 전해지는 것으로는 이 밖에도<月下訪友圖>와<舟遊圖>가 있다.812) 安輝濬, 앞의 책(1985), 圖 21∼22 및 156∼157쪽의 해설 참조. 동일인의 작품임이 분명한 이 그림들은 조선 초기 산수화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두 작품 모두 근경의 인물들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공통점을 보이면서도 배경의 산수화풍은 상이한 전통을 보여 준다.<월하방우도>가 1550년경의<호조낭관계회도>처럼 안견파 화풍의 잔흔과 남송대 원체화의 혼합적인 양상을 나타내는 반면에<주유도>는 일종의 披麻皴과 胡椒點 등 원대 盛懋의 화풍과의 연관성과 함께 李秀文의<墨竹畵冊>의 언덕 묘사와 유사성을 나타내어 대조를 이룬다.813) 安輝濬, 위의 책, 圖 32 참조. 이처럼 이상좌의 산수화로 전칭되고 있는 것들은 서로 상이하고 또 확실하게 관서가 되어 있지 않아 그의 진정한 화풍에 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이상좌의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에<李上佐佛像帖>이라고 불려지는<羅漢像>5점이 있다.814) 安輝濬, 위의 책, 圖 23∼24 참조. 본래는 16나한을 그렸던 것으로 믿어지는 이 그림들은 일종의 스케치라 할 수 있다. 이상좌가 어렸을 때부터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회화를 그렸으며 인물화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지는 것을 감안하면 그가 나한상을 그렸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을 과연 이상좌의 진필로 믿어야 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좀더 신중한 검토를 요한다고 하겠다. 번잡하면서도 변화없는 필선, 불완전한 형태의 묘사 등이 이상좌의 명성에 걸맞는다고 생각되지를 않고 또한 비교를 해볼만한 진작이 없어 확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상좌의 화풍은 산수화이건 인물화이건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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