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산수화에서 이미 살펴본 것들과는 또 다른 계보의 화풍이 주목을 끄는데 그것이 바로 15세기말에 활약하였던 화원들로 확인되는 李長孫·崔叔昌·徐文寶의 화풍이다.815) 圖畵署 提調 姜希孟이 서열을 무시하고 徐文寶를 九品遞兒職에 추천하였다는 논란이≪成宗實錄≫의 기록에 보여 이들의 활동연대와 신분을 알 수 있다(≪成宗實錄≫ 권 150, 성종 14년 정월 갑인). 이들은 상호 긴밀한 연관을 지니고 활동하였던 듯, 작품들도 대단히 비슷한 화풍을 보여준다(<그림 9>).816) 安輝濬, 앞의 책(1985), 圖 25∼30 및 157쪽의 해설 참조. 일본 奈良의 大和文華館이 소장하고 있는 이들의 작품들은 서로 너무나 비슷하여 얼핏 보면 마치 한 사람의 것들처럼 잘못 보기 쉽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솜씨가 다른 것이 확인된다.
이들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연운이 자욱한 모습이어서 자연의 분위기 묘사에 강한 특성을 드러낸다. 이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원대 고극공의 미법산수 화풍과 친연성을 보여주는데 그 화풍은 필자미상(傳高然暉筆)의<夏景山水圖>와<冬景山水圖>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미 고려시대에 전해져 조선 초기로 계승된 것이다.817) 安輝濬, 앞의 책(1988), 260∼263쪽.
―――, 앞의 책(1995), 圖 54∼55 참조. 또한 이 화풍은 비교적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조선 중기에도 전해졌다. 이처럼 이들의 산수화풍은 조선 초기의 또 다른 계보를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작품들에서는, 북송대 미불과 미우인 부자의 미법산수 화풍을 위주로 하면서 董源 및 巨然의 화풍과 청록산수 화풍을 조화시킨 고극공의 작품들과는 달리 董·巨의 화풍이 배제되어 있어 조선 초기에 있어서 중국회화의 한국적 수용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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