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5. 서예
  • 1) 송설체의 유행

1) 송설체의 유행

 고려말 원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충선왕이 燕京에 지은 萬卷堂을 중심으로 양국 학자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조맹부의 송설체가 국내에 유입되었다. 이에 李齊賢·李嵒 등의 명서가가 배출되었는데, 특히 杏村 이암은 송설체의 정수를 터득한 명서가로 이름이 높았다.832) 閔德植·李星培,<李嵒의 生涯와 書藝>(≪講座美術史≫6, 韓國美術史硏究所, 1994), 57∼83쪽. 典雅流麗한 귀족적 풍모를 지닌 송설체는 당시 사대부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였지만 아직 일반에까지 확산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가 되면 송설체는 점차 확산되는 경향을 보여 여말선초에 활약한 權近·崔興孝·河演·申檣 등의 글씨에서 그러한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후 세종연간에 이르면 송설체는 본격적으로 유행하여 문종·安平大君 李瑢 등의 왕실과 南秀文·朴彭年·李塏·成三問 등의 集賢殿 학사를 위시한 다수의 명서가가 출현하였다.≪夢遊桃源圖卷≫이나≪瀟湘八景圖詩卷≫에 실린 그들의 글씨에서 송설체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단연 으뜸이었다. 그는 세종의 아낌을 받으며 당시의 예술계를 이끌었던 인물로서 서화를 위시하여 시문과 음악에도 뛰어났다. 그는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궁중에 소장된 書畵眞蹟을 보았기에 대성할 수 있었는데, 특히 그의 중국서화 수장품 가운데 들어있던 26점의 조맹부 글씨는 글씨학습에 크게 참고되었을 것이다.833) 안평대군의 예술활동은 安輝濬·李炳漢,≪安堅과<夢遊桃源圖>≫(圖書出版 藝耕, 1993), 34∼51쪽 참조. 대표작으로≪몽유도원도권≫에 실려있는<夢遊桃源記>는 송설체의 姸媚함을 뛰어넘은 경쾌한 필법이며, 행서로 쓴<再送嚴上座歸南序>나 행초로 쓴<小苑花開帖>등의 소품과≪擣衣篇≫등의 法帖에서도 맑고 빼어난 서풍을 보였다. 당시 조선에 온 明의 사신들이 그의 글씨를 구해가곤 하였으며 중국에 전해져 당대 제일의 글씨로 절찬을 받았다. 이 밖에<世宗大王英陵神道碑>등을 썼으며 문종 즉위년(1450)에 주조된 庚午字도 그의 필적이다. 그의 형 문종도 송설체를 바탕으로 淸勁하고 생동감있는 서풍을 이루었는데 문종의 필적은≪列聖御筆≫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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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몽유도원기>(부분)
<사진 1><몽유도원기>(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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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재송엄상좌귀남서>
<사진 2><재송엄상좌귀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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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종 원년(1453)의 癸酉靖亂 등 首陽大君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송설체를 정착시킨 인물들이 다수 사망하였지만, 송설체는 姜希顔·徐居正·成任·姜希孟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 중 강희안은 안평대군에 버금가는 명서가로서 尹炯墓碑 등에서 그의 역량을 여실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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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윤형묘비>(부분)
<사진 3> <윤형묘비>(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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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종연간에 이르러 송설체는 더욱 확산되어 조선 제일의 서체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고려말 이래 조맹부의 眞蹟이 다수 유입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에서≪眞草千字文≫·≪證道歌≫·≪東西銘≫·≪赤壁賦≫등 조맹부의 法帖을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였던 점에도 연유할 것이다. 더욱이 성종은 학예진흥에 힘썼던 왕으로서 송설체를 추종하여 문종과 함께 조선초를 대표하는 御筆이 되었는데, 그의 글씨는 안평대군의 글씨와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다.

 이와 같이 왕들이 한 서체를 추종하자 많은 文士들도 따라 쓰게 되었다. 성종연간의 신진학자인 任熙載·金希壽·成世昌 등이 모두 송설체를 따랐으며, 이 밖에 鄭蘭宗·安琛·任士洪·朴耕·申公濟 등도 송설체를 바탕으로 자신의 서풍을 이루어 갔다.

 송설체의 풍미는 佛敎 寫經이나 王旨(敎旨)·功臣錄券 등의 古文書에서도 잘 나타난다. 진적이 드물게 전하는 조선 초기에 이들의 서예사적 가치는 적지 않은데, 대부분이 書寫전문인에 의해 쓰여졌으며 연대가 밝혀져 있어 송설체의 확산을 가늠하기에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또한 癸未字·庚子字·甲寅字·庚午字·乙亥字 등 조선 초기에 주조된 銅活字에서도 그러한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歐陽詢體에 바탕을 둔 계미자(1403)와 경자자(1420)를 지나 세종 16년(1434)에≪孝順事實≫·≪論語≫등의 명나라 초 版本을 字本으로 삼아 주조한 갑인자에 이르면 楷正한 짜임이나 부드러운 필치에서 송설체의 영향이 다분히 나타난다. 매끈하고 세련된 송설체는 명나라 초 문인 사이에서 유행하여 소위 ‘翰林院體’라 불리며 판본에 널리 쓰였는데 바로 갑인자 자본이 그런 것이었다. 일명 ‘衛夫人字’라고 일컫는 갑인자는 선조초부터 조선 후기까지 여섯 차례 改鑄되어 수많이 印出되었으며 서예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송설체 명서가가 쓴 활자도 출현하여 송설체의 유행에 일조하였는데, 문종 즉위년(1450)에 안평대군이 쓴 경오자와 세조 원년(1455)에 강희안이 쓴 을해자가 그것이다. 경오자는 을해자를 주조할 때 녹여져≪古今歷代十八史略≫·≪詳說古文眞寶大全≫등 소수의 印本만이 전하며, 을해자는 임진왜란 직전까지 사용되어 갑인자 다음으로 많이 인출되었다.834) 千惠鳳,≪韓國書誌學硏究≫(古山千惠鳳敎授定年紀念論集, 三星出版社, 1991) 참조. 이 밖에≪訓民正音≫(1446) 등의 목판본에 보이는 글자체 또한 송설체의 유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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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상설고문진보대전≫
<사진 4>≪상설고문진보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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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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