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5. 서예
  • 3) 금석과 사경의 서풍

3) 금석과 사경의 서풍

 송설체가 확산되기 이전의 조선초에는 고려말의 서풍이 잔존하였는데 金石과 寫經에 잘 나타난다. 특히 坦然 이래로 유행하였던 顔眞卿류의 서풍이 고려말 韓脩·權鑄 등에 의해 謹嚴端正하게 변화되면서 조선초로 이어졌다. 偰慶壽가 썼다는<龍門寺正智國師碑>(1398)와 權弘의<獻陵神道碑陰>등에서 그러한 예를 찾을 수 있다. 또한 태조의 어필이나 成石璘의<太祖健元陵碑>(1409)에서는 蘇軾體의 여운도 나타나는데, 이는 고려시대 이래 소식의 문학이나 文人書畵論과 함께 그의 서풍이 수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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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용문사정지국사비명>(부분)
<사진 5><용문사정지국사비명>(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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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태조건원릉신도비>(부분)
<사진 6><태조건원릉신도비>(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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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의 지배층은 국가의 체제유지와 개인의 입신출세를 위해 유학을 지향하면서도 현세의 壽福과 내세의 安樂을 위해서는 불교에 귀의하곤 하였다. 특히 왕실에서는 궁중에 內佛堂을 짓고 興天寺·大慈菴·圓覺寺 등의 願刹에서 대규모의 造像·造塔·寫經·刊經의 佛事를 일으키곤 하였는데, 그 중 대자암의 重建 불사에 대한 대신들의 빗발쳤던 반대는 유명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실과 민간에 의해 적지않은 사경이 조성되었다. 그 중≪法華經≫의 필사가 가장 성행하였으며 이 밖에≪華嚴經≫을 비롯하여≪楞嚴經≫·≪梵網經≫·≪金剛經≫·≪阿彌陀經≫·≪金光明經≫·≪地藏經≫·≪父母恩重經≫·≪長壽滅罪經≫등의 필사도 이루어졌다. 형식은 두루말이식(卷子本)보다는 고려 후기 이래의 折帖式을 따랐으며 조선말에는 蝴蝶本 형식으로 변화하였다.836) 張忠植,<朝鮮時代 寫經考>(≪美術史學硏究≫204, 韓國美術史學會, 1994), 7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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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감지은니묘법연화경≫(권 2 부분)
<사진 7>≪감지은니묘법연화경≫(권 2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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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백지묵서묘법연화경≫(부분)
<사진 8>≪백지묵서묘법연화경≫(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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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字院·銀字院의 주관하에 寫經僧이 필사를 담당하였던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에는 전담기관이 없었으므로(세조 때 內經廳 일시 설치) 글씨에 뛰어난 문신이나 승려가 사경에 참가하였다. 조선 초기에 왕실발원의 사경 불사에 참가했던 사람으로는 韓尙敬·尹珪·成達生·成槪·申檣·柳季聞·安止·崔興孝·李永瑞·李瑢·姜希顔·成任·安惠·洪應·鄭蘭宗·趙瑾·任擇·趙安貞·安惠·李叔生·朴孝元·朴耕 등의 문신과 文冏·文炯·克仁 등의 승려가 기록에 보인다.837) 秦弘燮 編著,≪韓國美術史資料集成(3)≫(一志社, 1991), 322∼340쪽. 서풍은 顔眞卿류에 바탕한 고려말의 사경서풍을 이어가다가 점차 송설체를 수용하여 갔는데, 이는 선초의 石碑서풍과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한편 大字書는 元僧 雪庵(李傅光)의 서풍이 유행하였다. 설암체는 송설체의 유행과 함께 유입된 이후 국내에서 법첩이 간행되면서 궁궐이나 사찰 건축의 扁額書로 널리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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