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6. 공예
  • 1) 금속공예
  • (1) 범종

(1) 범종

 조선 초기에 속하는 범종들은 현존하고 있는 것이 몇 구 되지 않으나 그 중 대표적인 것들로는 興天寺鐘(1462)·洛山寺鐘(1469)·奉先寺鐘(1469)·公州 甲寺鐘(1584)·海印寺 弘治四年銘鐘(1491)·普信閣鐘(1584) 등이 있다. 대부분 선조 25년(1592) 이전에 주조된 巨鐘들이며 그 나름대로 특징을 갖고 있다.

 유교의 숭상으로 불교미술의 쇠퇴를 가져오기는 하였으나 고려의 여세와 태조·세조 등 군왕의 귀의 혹은 보호에 의하여 이와 같은 작품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그 양식과 크기가 달라졌다.

 조선 전기에는 고려말부터 유입되어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중국종의 양식과 장식 및 수법이 주종을 이루고 고려말까지 계승된 한국범종의 양식과 형태가 점차 사라졌다. 이것 역시 그 例가 흔하지 않고 유존하는 것이 10여 구에 불과하다. 조선 전기의 범종들은 규모가 거대한데 이것은 당시 불교를 보호한 왕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이 시기 대표적인 범종으로는 흥천사 동종(세조 7년;1462)·봉선사종(예종 원년;1469)·낙산사종(예종 원년)·해인사 홍치4년명종(성종 22년;1491)이 있다.

 이 중 해인사 홍치4년명 동종을 제외한 흥천사종·봉선사종·낙산사종들은 범종의 주성배경이 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한 이들은 높이가 1.5m에서 2.8m에 이르는 거대한 범종들이다. 이와 같은 거종을 주종할 수 있었던 재력도 왕실이 아니면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범종은 고려 후기 범종들과 비교하여 볼 때 다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鐘身의 형태는 신라 범종이나 고려 전기 범종과는 달리 肩部의 곡선을 제외하면 거의 원통형에 가까우며 종정인 天板은 예외없이 半球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 一體雙頭의 龍鈕를 구비하여 이 용뉴의 동체로 동종을 매어 달게 하였다. 원통형의 甬筒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는데 용통을 갖추고 있는 것은 대부분 후기에 나타나며 이 또한 거의 형식적일 뿐이다. 해인사 대적광전내 홍치4년명종은 용통 대신에 종정의 중앙에 한개의 圓孔을 시공하였다.

 동종의 어깨부분에는 伏蓮帶가 돌려져 있으며 上帶는 복련장식의 어깨띠가 있을 때는 그 밑으로 梵字文帶를 돌리고 있다. 특히 범자의 장식방법은 고려 말기보다 더욱 성행하였는데 이에 대한 명확한 규명과 범자나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없다. 4군데에 배치된 乳廓은 상대에서 떨어져 완전한 사다리꼴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속에 배치한 9유두의 형식도 도식화된 화좌유로 표시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유곽과 유곽 사이에 배치한 1구식의 보살상 역시 線彫장식이고 그 조식수법이 치졸하고 의문·보관·지물 등이 번잡하게 처리되어 신라와 고려 전기 범종에서 보이는 청초·단아·정제된 천인, 보살상 등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종신의 중앙에는 대개 3조의 太彫線으로 中帶의 띠를 돌려 장식하여 종신을 상하로 양분한 듯이 보인다. 또한 양주된 명문은 종신전면에 새겨져 있는데 대부분 楷書로 되어 있다.

 종신의 하단에 배치한 하대는 하단에서 약간 떨어진 위에 마련되었고, 그 밑으로 無文帶를 설정하든가 아니면 靑海波濤文과 같은 文樣帶를 장식하고 있다. 특히 신라·고려 종에서 보이는 撞座는 마련되지 않고 종신 하대의 무문대나 최하단부를 타종하도록 하기 때문에 흔적이 완연히 남아 있는 것도 주목된다. 종신에 있어서 종의 口緣部는 주물의 두께가 두툼하고 위로 올라가면서 얇아지는데 이 현상은 신라 범종으로부터 내려오는 한국 범종의 고유한 특성을 간직하고 있는 점이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거종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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