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6. 공예
  • 1) 금속공예
  • (2) 사리장엄구

(2) 사리장엄구

 842) 金禧庚,<舍利莊嚴具의 意味와 意匠>(≪韓國의 美 23:金屬工藝≫, 中央日報 季刊美術社, 1985).조선시대에는 배불숭유정책으로 불교미술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으나 초기에는 태조나 세조와 같이 불교를 崇信하는 국왕이 있어서 얼마간의 造塔사업이 있었고, 또 이에 따라 舍利莊嚴具도 고려시대의 기술을 이어받아, 전대와는 비교될 수 없으나 그 나름대로 섬세정교하게 제작되었다. 조선 초기의 사리장엄구는 그 예가 흔하지는 않으나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예를 들어 당시의 기술을 가늠할 수 있다.

① 李成桂發願 金剛山月出峰 銀製鍍金舍利莊嚴具 ② 報恩 法住寺捌相殿 舍利莊嚴具 ③ 楊州 水鍾寺八角五層塔出土 舍利莊嚴具 ④ 奉印寺 舍利莊嚴具

 이성계 발원의 금강산월출봉 은제도금사리탑은 라마탑 모양의 사리기로 밑에 銀板의 3중 仰蓮文이 있고 정상에 4중의 相輪이 있다. 이 外函은 8각형의 원통을 하였고 뚜껑도 8각형인데 2중의 기왓골로 하였다. 공양왕 3년(1391) 이성계의 발원으로 봉안된 것인데 고려시대 사리장엄구에서 보이는 양식수법이 그대로 이어져 사리병이 水晶製로 되어있고 외함으로는 八角圓堂浮屠形 사리기가 돋보인다.

 법주사팔상전 사리구는 탑을 해체·수리할 때 心礎石 윗면에서 발견된 것으로 銀製 舍利壺·유리제 사리병·舍利盒 등이 발견되었다. 사리공 안에 있는 동판 5매는 사리외함같은 구실을 하고 있으나 記銘이 있어 외함보다 塔誌로서의 의의를 갖고 있다. 동판에 點刻된 명문을 통해 선조 30년(1597)에 왜인이 모두 불태워 선조 38년 옛자리에 惟政比丘(四溟大師) 등이 재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상륜부에도 명문과 유물이 있었으므로 신라 황룡사목탑 이래의 방식이 계승되어 조선시대까지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양주 수종사8각5층탑 사리구는 1차 해체수리 때 初層屋蓋石에서 金銅如來坐像과 菩薩坐像이, 2차 해체수리 공사 때 觀音보살좌상·地藏보살좌상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어 조선시대의 사리장치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조선시대의 조각미술 중 불상연구에 있어서도 수종사탑에서 발견된 여래상과 보살상·관음상·지장보살상 등은 중요 기준이 되고 있다.

 이상으로 볼 때 조선시대 사리장엄구 설치는 전대와는 달리 탑 속에 佛龕 등을 만들어 금동여래상·목불좌상 등과 장수를 기원하는 명주실과 명주포를 넣었으며 사리병은 유리제에서 수정제로 변화되고 간략·단순화되는 경향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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