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Ⅳ. 예술
  • 7. 조각

7. 조각

 불교를 탄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이른바 抑佛崇儒의 기본정책에 따른 조선사회의 획기적 변화로 인해 조선의 조각은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경향을 보였다. 불교조각의 조성이 크게 위축되고 왕과 공신들의 초상조각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조선초에 약간 제작되던 유교상들도 성리학의 專橫으로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불교조각은, 전반기에는 왕실 내지 비빈들의 비호와 잔존하게 된 사원들의 佛事로, 후반기에는 전란 후에 새로이 복구하게 된 사원들의 불상봉안이 활발해지면서 그래도 수많은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그래서 현재 전국의 많은 사원에는 조선시대 조각들이 몇 구에서부터 수십 구씩 남아 있게 되었고 우리 나라 조각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 조각에 대해서는 아직 밀도있는 연구가 진행되지 못해서 시기구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조각을 일단 5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1636)을 경계(1630년경)로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고, 전반기는 다시 1500년경을 기준으로 1기와 2기로, 후반기는 1725년경을 경계로 1기와 2기로 나누고, 1800년 이후를 제3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기는 인조∼숙종대, 2기는 영조∼정조대, 3기는 순조∼고종대로 설정할 수 있으므로 왕조별로 나누는 것이 보다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847) 文明大,<세종시대의 미술, 조각>(≪세종시대의 미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6), 86∼124쪽.

 조선 전기는 유불교체기를 지나 성리학의 지배체제가 굳어진 시기이다. 유불교체기인 과도기에는 유례없는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왕실의 지원과 세조, 명종의 적극적인 우대 등으로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왕실이나 국가에서 불상을 조성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작가들은 國家匠人들이었으므로 당대 최고 수준을 가진 우수한 작품들이 많았다. 가령 內院堂의 金玉佛像(세종 20년;1438), 內需司 장인이 만들어 壯義寺에 시납한 43구의 불상, 圓覺寺 백옥불상, 安平大君이 조성한 황금불 3구, 仁粹大妃가 시납한 불상(성종 20년;1489), 금강산에 봉헌된 순금불상 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원각사탑 부조상이나 水鍾寺 금동불상의 예 등에서 그 수준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848) 文明大,<朝鮮前期彫刻樣式의 硏究>(≪梨花史學硏究≫ 13·14, 1983).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조선시대 불상은 1394년에 만들어진 莊陸寺 건칠보살상이다. 14세기 후반기의 고려불상과 동일한 양식을 보여주는 이 보살상은 비록 왕조는 변했지만 작가는 동일했을 것이므로 고려양식이 그대로 조성되고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고려말 불상계통을 이어받은 불상은 大乘寺 불좌상인데 아미타불이며, 文殊寺 불상보다 다소 진전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단아한 모습인데 옷이 더 두터워졌고 어깨 옷주름의 탄력이 줄어들었으며 체구도 단정한 편이다. 이와 유사한 보살상은 把溪寺 木觀音菩薩像인데 1447년을 하한(腹藏記)으로 한 조선 초기 보살상이다. 보다 근엄하고 한결 건장해진 형태는 초기 불상의 특징으로 생각되지만 승각기의 규칙적인 평행 옷접힘이나 팔의 옷주름 등은 원각사탑 부조상과 친연성이 많은 것 같으므로 이것은 명나라의 영향이 다소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조각양식을 대표할 만한 작품은 세조 4년(1458)에 제작된 黑石寺 木阿彌陀佛像으로 날씬하고 단아한 특징을 보여주는 뛰어난 불상이다. 원래는 鳴鳳山 法泉寺에서 조성된 상이지만 현재 경북 영주 석포리의 흑석사에 봉안되어 있는 이 아미타불상은 조선 초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높은 肉髻 위에 頂上髻珠가 표현되었으며 머리칼은 촘촘한 螺髮이어서 조선 초기 양식의 변모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얼굴은 계란형, 이른바 수형의 형태로 고귀한 품격을 나타내고 있으며 체구 역시 날씬하고 단정하여 수형의 고아한 인상을 보여준다. 통견의 법의도 일정한 두께로 나타냈지만 간략한 옷주름, 왼쪽 팔굽 위에 표현된 Ω형 옷주름, 배 위의 평행 衣褶線 등 조선 초기의 특징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확실한 기년명 불상으로 당대를 대표할 만한 수작의 조각이어서 크게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圓覺寺塔 부조상은 세조 10년에 완성된 절대연대를 가졌으므로 조선조각의 기준작품이 되고 있다. 모든 점이 고려 후반기 端雅樣式 불상계열을 따르고 있지만 굴곡없는 사각형적인 형태미나 보다 간략화되고 정형화된 옷주름, 승각기의 평행 띠주름의 등장과 매듭장신구(金具) 장식이 사라진 점, 키모양 光背의 등장 등 새로운 특징이 첨가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런 양식은 성종 7년(1476)에 조성된 無爲寺 木阿彌陀三尊佛像에까지 나타난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작품은 사찰 소장 불상들이다. 이 가운데 무위사 목아미타삼존불상은 15세기 후반기 조각양식을 대표할 만한 뛰어난 불상인데, 본존 아미타불과 좌우의 관음·지장보살 협시의 이 삼존상은 유명한 후불벽화와 함께 성종 7년에 조성된 것이 분명하다. 본존불의 童顔에 가까운 둥근 얼굴, 어깨의 양감이 자연스러운 방형의 상체, 무릎이 유난히 넓은 결가부좌의 모습, 두께있는 통견의 불의 등은 조선 초기의 양식을 대표할 만하며, 원각사탑 부조상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관음과 지장보살도 본존불과 비슷한 특징을 보여주는데 半跏자세에 생동감있는 단아한 얼굴, 방형적인 체구, 단정한 형태 등은 본존불의 의젓한 모습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이런 특징은 開心寺 극락전 아미타삼존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서 흥미롭다. 개심사 극락전은 1484년에 완전히 중창되었기 때문에 불상도 이 당시 작품이 분명하다. 이 점은 1476년작 무위사 목아미타삼존불상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생각되는 아미타삼존상에서도 분명히 찾을 수 있다. 본존은 석조 팔각대좌 위에 단정히 앉아있고 좌우는 입상이어서 구도상 특이하지만 협시들이 좌 관음, 우 지장상의 구도도 같아서 당시 아미타신앙의 경향을 잘 알려주고 있다. 얕은 육계, 방형에 가까운 중후한 얼굴, 가슴과 어깨가 자연스럽지만 건장한 체구, 넓고 높은 하체, 통견한 불의의 휘늘어진 주름과 배위 띠매듭, 왼팔의 형식화된 Ω형 주름 등은 무위사 목아미타삼존불상과 거의 흡사한 것이다. 그러나 얼굴 표정이 좀더 딱딱해졌고, 눈·코·입이 조밀하고 경직된 점은 佛格에서 떨어진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이런 점은 좌우 보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다소 딱딱해지고 번잡해진 점이 눈에 띠며, 지장보살이 두건을 쓰지 않고 삭발하고 있는 점도 달라진 점이다.

 그러나 세조 5년(1459)에서 성종 24년(1493) 사이에 조성되었다고 생각되는 수종사 금동불상은 명상하는 듯한 침잠한 얼굴이나 팽이모양의 육계와 정상계주의 등장, 3단의 머리형태 등 元·明불상의 특징이 다소 수용되고 있는 것은 새로운 변모이다. 이런 점은 무위사 목아미타삼존불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조선조각이 이제 명과 교류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849) 柳麻里,<조선시대 조각>(≪韓國美術史≫, 藝術院, 1984).

 그런데 명 양식이 분명하게 보이는 상들이 15세기 중엽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가령 1482년(腹藏記)에 조성된 天柱寺 木佛坐像(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3단 머리형태, 침잠한 긴 얼굴, 눈에 띄게 細長한 신체 등은 수종사상보다 명양식을 더 수용한 불상이다. 수종사 불감부조상도 비슷한 특징을 보여주지만 이 시기에는 이런 불상들이 꽤 많이 조성되었다고 생각된다.

 또 하나 주목되어야 할 불상양식은 금강산에서 출토되었다고 알려진 일련의 소금동불상이다. 왕실발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런 불상들은 원의 영향을 받은 고려불상으로 흔히 보고 있지만 실은 명의 영향이 농후한 조선 초기불상이 상당수 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두 금동보살상은 침잠한 얼굴, 세장한 체구, 번잡한 장신구, 정교한 기법 등으로 보아 원이나 고려작으로 보고 있지만 천주사 목불상이나 大乘寺 금동보살상, 甲長寺 금동보살상 등과 대비되는 상이며, 1400년 전후의 작으로 보면 무난하지 않을까 한다. 이보다 진전되면 다소 경직된 양식이 나타나는데 최근 기년명을 가진 소금동불상, 가령 1451년명 금동삼존불, 차일봉 금동아미타불들이 북한에서 속속 출현하고 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通度寺 金銅阿彌陀三尊像도 이런 계열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금강산에서 전세되어온 삼존불로 알려진 이 작은 금동불(높이 11㎝)은 흔히 통일신라 불상으로 논의되었지만 신라불적인 특징은 어디에도 볼 수 없다. 팽이형의 특이한 육계, 침잠한 얼굴, 두꺼운 佛衣, 왼쪽팔의 Ω형 주름, 하체의 간략한 衣紋, 어색한 팔, 방형적인 신체, 번잡한 구슬무늬 장식의 8능형대좌 등 명 양식이 농후한 조선 초기 불상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만 보살의 굴곡자세나 대좌 연화문 등으로 신라불과 혼동되게 하는 요소도 있지만 이 역시 자세히 관찰해 보면 신라불의 특징과 뚜렷한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더구나 腹藏記에 “造士 海了가 세조 32년(1450)에 조각을 완성하니 함께 왕생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1450년에 조성된 불상이 분명하다. 改金한 것도 복장을 쓴 것도 결코 아닌 불상조성의 畢役임이 분명한 것이다.850) 文明大,<高麗·朝鮮時代의 彫刻>(≪韓國美術史의 現況≫, 圖書出版 藝耕, 1992), 224쪽.

 石佛像 계통도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雲住寺 石千佛像들은 논란이 많지만 평판적이고 무표정한 얼굴, 석주형 불신, 도식적인 옷주름 등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이며 도식적 양식은 조선 초기 무덤의 石像과 일치하는 것이며, 옷소매 속에 감추어진 두 손과 옷주름의 특징은 서울 시흥동 안경공무덤 석상(1421∼1435)들과 일치하고 있어서 조선 초기로 편년되어야 마땅하다. 공항 부근의 藥師寺 석불입상이나 기타 수많은 조선 초기 작품들도 이 시기의 조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文明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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