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개요

15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사회경제적 변화에 조응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건국을 주도하여 정권을 독점해 왔던 勳舊勢力이 양반관료제의 모순을 야기하고 있었고, 이에 수반하여 科田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상품의 유통과 貢納制의 모순 심화, 軍役制度의 붕괴, 국제교역의 발달 및 마찰 등 새로운 사회경제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타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이 士林派였다. 사림파는 재지중소지주에서 성장을 거듭하여 점차 훈구파를 대신할 정치세력으로 자리잡아 갔으며, 그들은 훈구파 지배하에서 야기된 각종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고 유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道學政治의 이념을 바탕으로 향촌질서를 재편하는 한편 書院의 건립, 性理學의 보급, 경제개혁 등 다양하고 구체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로써 볼 때, 15·16세기에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사회적 갈등구도 속에서 후자가 전자의 대체세력으로 등장하여 마침내 사림정치를 실현하게 되었던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15세기는 훈구세력의 권력남용과 경제력 확대가 두드러진 시기였다. 훈구세력은 고리대적 私債의 이용, 役의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良民의 投託, 伴人과 丘史의 과다한 점유, 양민을 강제로 賤人으로 삼고 자기 소유가 아닌 공사노비를 사역하는 등의 방식으로 경제력의 확대를 꾀하였다. 또 그들은 정치권력을 독점·남용함으로써 점차 權貴化의 길을 걸었다.

세조 즉위과정에서부터 형성되어 온 훈구세력은 靖難·佐翼功臣의 예에서 보듯이, 조선 건국기의 공신들과는 달리 개혁의지가 불분명하였고, 무리한 경제기반의 확대과정에서 民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에 세조는 保法이나 職田法의 시행, 六曹直啓制 등의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훈구세력의 반발을 받았다. 결국 세조는 무리한 집권과정의 부담으로 인하여 훈구세력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들의 비리를 비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성종이 즉위하자, 다시 翊戴·佐理功臣을 창출한 훈구세력은 院相制를 통해 정치 주도권을 장악하고 치부활동을 계속하여 구조적인 모순을 드러냈다.

이러한 훈구세력의 모순과 비리는 과도한 공신의 창출과 권력집중을 가능하게 한 권력구조에 기인한 바 컸다. 조선의 건국 주체들은 의정부체제를 마련함으로써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켰다. 태종·세종 등에 의해 권력분립이 시도되었지만, 성종이 즉위하면서 공신세력은 의정부체제를 장악하고 원상제를 운영하여 정권을 독점하고 권력을 남용하였던 것이다.

훈구세력에 의한 양반관료제의 모순이 누적되어 가는 가운데 과전법이 붕괴되고 지주제가 발달하였다. 과전법은 국가기관이나 官人을 비롯한 職役人에게 별도의 收租地를 分給함으로써 국가체제 운용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분급한 收租權은 개인이 행사하는 田地의 소유권 위에 加設된 부차적 권한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이 시기 토지지배관계는 수조권보다 소유권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국가기관 절수지나 私處 절수지 모두에서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모습이 점차 쇠퇴하여 갔고, 16세기로 접어들어 소유권적 토지지배 형태가 확립되었다.

과전법의 붕괴와 함께 士族 관인층을 중심으로 하는 지주들은 상속·혼인이나 개간·買得 등을 통하여 農莊을 확대하였다. 농장의 경영은 지주 자신 혹은 그 대리인이 노비·婢夫·雇工 등을 동원하여 직영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며, 영세소농이나 無田民에 의한 竝作營農은 아직 농장의 외곽에서 부수적으로 관행되고 있을 뿐이었다. 또 농장의 확대가 일반적인 추세였지만 田稅·徭役·공물·군역을 바침으로써 국가를 지탱하였던 양민 自營農層의 개별 경영이 이 시기의 기준적인 영농형태였다. 그러나 16세기로 내려오면서 생산력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양민 자영농층의 몰락으로 소농민경영의 분화가 가속화하여 병작영농이 점차 보편적인 영농관행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처럼 16세기의 조선에서는 사족의 地主化와 대다수 하층민의 無産化라는 사회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국가의 기본 수취제도가 각 군현을 단위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수령에 의한 防納의 관행이 성립되어 양인 소농민층의 분해를 촉진했으며, 공납의 폐단과 군역에서의 가혹한 수탈은 그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그 결과 자기 고장에서 연명할 수 없게 된 농민들은 개별적으로 流離 逃散의 길을 택하거나, 그 중 일부는 群盜가 되어 사족지배에 대항하는 등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한편 상업에서는 점차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場市의 발달로 이어졌다. 15세기 후반의 장시는 농업생산력의 증대, 생산관계의 변동, 사회적 분업의 확대와 점진적으로 발달해 온 유통경제의 확대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 시기 장시는 자연재해로 인한 흉황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출현하기도 하였으나, 장시 성립·확산의 근본 원인은 교역을 통해 얻어지는 이득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에 16세기가 되면 장시는 전라도를 비롯하여 충청·경상·경기도 등지로 확산되어 갔으며, 특히 임진왜란을 겪은 후부터는 장시의 수적 증가와 더불어 出市 횟수도 잦아지는 등 더욱 성행하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 중에서 상인으로 전환하는 인구도 늘어났다. 장시의 성립으로 인한 유통경제의 발달로 화폐경제도 크게 변화하였는데, 이 시기의 주된 화폐는 면포였다.

조선정부는 세조에서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貢額을 경감하는 한편 국가 경비지출의 규모를 세우고자 橫看을 撰定함으로써 공납제를 일단 정비하였다. 그러나 공납제는 제도 자체 및 운영상에 있어서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공액이 장기적으로 고정되어 있었다는 점, 공안에 不産貢物이 分定되고 있었다는 점, 공물 상납과정에서 點退·방납과 같은 비리가 나타난 점, 民戶에 대한 부과 규정의 미비 등이 그것이었다.

이에 따라 연산군대를 거치면서 횡간이 무시되고 加定·引納 등이 일어났으며, 불산공물의 분정은 구조적으로 방납을 조장하고 공물부담 규정의 모호성은 부담의 극심한 不均현상을 초래하였다. 특히 방납은 당시 권세가들의 비호하에 행해져 농민들에게 엄청난 해독을 끼쳤으므로 세조대부터 그 폐단에 대한 시정이 논의되었다. 그런데 방납은 유통경제의 발달을 전제로 하였으므로, 방납에 대한 근본적 개혁은 유통경제의 발달을 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했다. 즉 공물의 대가로 미곡이나 포를 거두어들이는 형태의 운영이 그것이었는데, 결국 이는 大同法으로 귀결되었다.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신분제와 兵農一致制에 입각한 군역제도 역시 붕괴되고 점차 收布化로 나아갔다. 신분제 외에 병농일치제 그리고 奉足制를 기반으로 한 조선 초기의 군역제는, 균등한 군역 부과와 군액의 증가를 목적으로 했던 保法이 人丁만을 고려하는 군역제도로 전환되면서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正軍과 保人 중 토지가 없는 빈한한 농민들은 피역을 위해 유리·도망하였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一族과 切隣에게 대신 부담을 지우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16세기에 들어와 군역제의 문란 속에서 甲士·正兵·水軍 등의 군역 수행에도 심각한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초기의 중추적인 군사력이었던 갑사는 보법 실시 이후 사족·한량층 대신에 농민들이 입속하고, 근무조건이 점차 열악해짐으로써 쇠퇴해 갔다. 한편 말과 軍裝을 갖추어 궁궐을 시위하던 騎兵은 16세기 이후 농지개간 등으로 목장이 줄어들면서 말의 수가 감소해 馬價가 폭등하자 말을 소유하거나 빌려 탈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騎馬·卜馬가 모두 폐지되었고 기병은 말이 없는 보군이 되었다. 그리고 보병은 토목공사 등에 동원되는 役卒로 변하였고, 수군도 築城·營繕 등의 역에 差定되었다.

이와 같은 군역의 苦役化는 代立을 불러왔다. 자신의 정상적인 영농을 위해서 혹은 가혹한 役使를 피하기 위해서, 나아가 원거리 番上 근무의 고통과 경비를 덜기 위해서 농민들의 대립이 성행하였고, 거기에 대립을 통해 이익을 꾀하려는 諸司官屬들의 侵虐까지 작용하였다. 이러한 대립에 동원된 인적 자원은 지주 전호제가 정착되면서 토지를 상실하거나 각종 국역을 피해 도시로 집중된 농민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代立價가 폭등하면서 정부의 개입을 불러오게 되었다. 정부는 대립가를 公定하는 조치와 함께 차츰 軍籍收布法으로 방향을 바꾸어갔다. 이러한 納布制는 신분제와 병농일치제에 입각한 군역제와는 다른, 상비군으로서의 급료병제 성립의 전제가 되었다. 한편 지방에 留防하는 군인들에게도 兵使·水使 등의 지휘관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放軍收布를 강요하고 있었다. 방군수포의 보편화는 지방군을 지극히 허술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조선 초기 국방체제의 근간인 鎭管體制의 허설화를 가져왔다.

국내에서의 경제변동은 국제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규정한 책봉체제는 무역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 초기의 對明貿易은 朝貢과 回賜라는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公貿易 중심으로 진행됨으로써 통상은 부진하였다. 반면에 16세기에 이르면 使臣 또는 使行員들에 의하여 私貿易이 이루어지고 직물류나 보석류 등의 사치품이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사무역의 주도세력은 왕실·戚臣·權貴 등의 특권세력과 富商大賈들이었으며, 사무역은 척신정치의 물적 기반을 제공하고 국내상업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무역은 進上과 回賜라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구리·금은 등이 수입되고 쌀·직물류·약재 등이 수출되었다. 물품의 교환비율에 따라 제한이 많았던 공무역에 비하여 점차 三浦를 중심으로 한 사무역이 활발해졌다. 상인들은 동남아시아 상품이나 중국 비단을 일본에 중계무역하여 이득을 취하기도 하였다. 여진과의 무역도 조공과 회사형식이었으며 모피 등이 수입되고 쌀·면포 등의 생필품이 회사·賞賜되었다. 그리고 貿易所 또는 北平館을 두어 공무역을 허락하였으나, 16세기 이후에는 사무역이 크게 발달하면서 국내상업 발달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재정궁핍으로 일본인에 대한 통제책이 강화되고 양국간의 통교가 어려워지면서 三浦倭亂·乙卯倭變과 같은 왜변이 초래되기도 하였다.

신흥사족 혹은 재지사족이라고도 하는 士林은 대개 여말의 혼란기에 郡縣 吏族에서 品官으로 신분상승한 재지중소지주들로서 독특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14세기경에 과거를 통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기도 했고, 麗·元 관계를 통한 출세나 軍功을 통해 添設職을 얻어 품관화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들은 여말선초에 閑良으로 존재하면서 과전법하에서 外方軍田을 수급할 수 있었으며, 祖先傳來의 田地 및 노비의 매득·개간·겸병 등의 수단을 통해 중소지주로서 안정된 생활을 누렸고, 祖業繼承과 子女均分相續制를 이용하여 사족 공동의 이익을 지켜 나갈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여말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일어난 사족과 이족의 확연한 구분 및 재지사족의 광범위한 존재로 특징지워지는 향촌사회의 변화 양상은 조선 초기에도 지속되었다. 사족과 이족의 분화에 따라 지금까지 邑治(邑內)에 거주하던 재지사족들은 읍치의 외곽 촌락 또는 부근 任內지역이나 인근 타읍의 외곽지대로 卜居하거나 이주함으로써 주거지역의 차별화를 꾀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鄕案을 작성하고 鄕會 또는 留鄕所를 조직하여, 재경관인으로 이루어진 京在所와의 연결을 꾀함으로써 향촌사회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재지사족들은 그들 상호간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하층민을 통제하기 위해 鄕規·鄕約·洞契 등을 조직하여 향촌사회를 운영해 나갔다. 이러한 재지사족들이 사림파 형성의 인적 배경이 되었다.

사림파의 형성은 주자학의 보급과도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가졌다. 신흥사대부에 의해 수용된 주자학은 成均館과 鄕校교육을 통해 널리 보급되었고, 이에 따라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많은 사류들이 배출되었다. 선초 재지사족으로 上京從仕한 신진사류들은 부모봉양을 위해 본관지나 부모 소재지의 수령으로 부임하면서 성리학의 보급과 지방교육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성리학적 실천윤리로서≪小學≫과≪朱子家禮≫의 보급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사림은 여말선초 이래 비조직체로서의 士類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었다. 그러나 金宗直과 그의 문인인 金宏弼·鄭汝昌의 교육활동에 의해 영남·기호지역 사림들의 인간적·학문적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성종 16년(1485) 이후 훈구세력에 대응되는 정치세력, 즉 사림파로서 모습을 갖추어 갔다.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은 훈구세력과의 갈등과 충돌을 예고하였다. 성종대 중반 이후 훈구세력 기용의 부당성과 昭陵復位 주장 등 과감한 언론을 행사한 이들은 연산군의 즉위 이후 그 세력의 한계가 노출되면서 훈구파로부터 탄압을 받는 사건, 즉 戊午士禍가 발생하였다. 무오사화는 세조의 집권을 부정하고, 이에 반대한 인물들을 推獎한 金馹孫의 史草가 빌미가 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세조대 이래 정치·사회·경제적 여러 특권을 향유하고 비리를 저질러오던 훈구파를 사림파가 견제하려 한 데서 발생하였다. 이로써 성종대 이래 중앙정계에 진출했던 사림파는 일대 타격을 받게 되었다. 연산군의 생모인 尹妃가 폐위·賜死된 사실로 발단이 된 甲子士禍는 궁중과 결탁한 朝臣과 府中의 조신간의 대립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무오사화에서 잔존한 사림파도 화를 입었다. 그러나 이는 ‘전향 사림파’의 출현, 동조세력의 확장을 통해 중종대 이후 사림파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후 전개된 연산군의 亂政은 中宗反正으로 종식되었다. 반정을 통해 집권한 공신집단은 이후 政曹의 고위직을 장악하여 정국을 그들 중심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9년(1514) 趙光祖가 정계에 진출한 이후 사림파는 중앙정계에 재진출하여 급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훈구대신 집권하에서 빚어진 각종 정치적·사회적 비리를 척결하고 ‘至治’를 실현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이는 곧 훈구파는 물론 온건파 대신·국왕의 완강한 저항을 야기하였고, 그 결과 僞勳削除 사건을 계기로 사림파가 크게 희생되는 己卯士禍가 발생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南袞·沈貞·金安老 등으로 이어지는 훈구대신들이 다시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중종 말기 이후 인종초까지 사림파가 차츰 등장하여 그들의 영향력이 점증하는 가운데 인종의 외척과 명종의 외척간의 갈등이 생겨나고 있었다. 명종의 즉위와 함께 외척 尹元衡과 권신 李芑는 자신들의 세력을 보강하기 위하여 乙巳士禍를 일으켰으며, 사림파는 다시 한 번 중앙정계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척신정치가 지속되는 동안 사림파는 서원설립을 통하여 자파세력의 저변확대를 위해 노력하였고, 이는 결국 선조대 사림정치가 성립되는 주요한 토대로 기능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 이래 사림은 교육활동을 통하여 학파를 형성함과 아울러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재지적 기반을 계승하고 家學의 전통을 바탕으로 삼아, 성종 때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재지적 기반으로 인하여 영남학파 또는 기호학파로 인지되기도 하였다. 또 그들은 성리학적 정통성과 정치적 명분의 필요에서 鄭夢周→吉再→金叔滋→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학통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재지적 생활기반에서 상호관계를 맺으면서 학문세계나 현실정치 개혁에서도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림파는 학문이나 활동면에서 鄕黨的 색채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들이 鄕飮酒禮·鄕射禮의 勵行, 鄕約·鄕規의 시행, 서원건립 등을 통해 보여준 행동유형에서나, 조광조 등 ‘己卯士林’들의 개혁정치에 투영된 현실인식 및 대응자세에서 이는 쉽사리 감지된다. 이러한 향당적 요소에 기초한 향촌질서의 확립은 성리학적 윤리질서와 통치질서의 기축이 되었다.

또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는 사림파의 성향은 성리학적 가치를 실천궁행하는 대표적 교본으로서의≪小學≫의 실천 및 보급과 종족공동체의 생활규범을 밝힌≪주자가례≫의 실천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자파의 학통과 논리의 발전·보호를 위한 그들의 활약은 文廟從祀運動으로 표출되었고, 내면적으로는 節義運動으로 전개되었다.

사림파는 道學政治를,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립을 통해 군주나 백성이 天命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상사회의 실현 즉 ‘至治’로 규정하였다. 이를 위해 사림파는 爲民·愛民에 정치의 목표를 두고 그 실천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들은 聖君으로서의 자질, 군주와 신하 상호간의 믿음, 言路의 개방과 군주의 納諫이 필수적임을 강조하였으며, 나아가 言官의 활동을 탄핵에 국한시키지 않고 국가정책의 수립과 같은 보다 차원 높은 수준으로까지 확대하고자 하였다.

조광조가 등용된 중종 9년(1514)부터 사림파는 三司를 장악하였다. 그들은 특히 弘文館을 개혁정치의 이념과 방향을 정립하고 그 실천방안을 확정하는 産室로 활용하면서 본격적인 언론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사림파의 언론활동은 전통적 명분의 회복과 인습·舊制의 革去 및 성리학적 윤리질서의 확립과 새 향촌질서의 수립이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추진되었다. 그리고 개혁정치를 추진할 인적 기반의 확충을 위해 훈구파에 대한 대규모의 削勳과 賢良科 실시에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들은 經筵에서 개혁정치의 실현 방안을 논의하였으며 성군을 만들기 위해 군주의 교육에 치중하였다.

가족관계나 행동 규범의 실천적인 면을 강조한≪小學≫은 성리학의 보급을 위해 매우 중요시되었다. 그러나≪소학≫의 중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사림파가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부터였으며, 특히 기묘사림파는 향약보급을 통해≪소학≫실천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소학≫의 내용이 성리학이 지향하는 새로운 질서의 실현과 깊은 연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묘사화를 계기로 향약이 폐지됨과 동시에≪소학≫은 ‘凶書’로 낙인 찍혀, 한동안 그 교육이 금지되기까지 하였다.

道敎的 祀典을 집전하는 昭格署는 유교적 사회를 지향한 조선초부터 이미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본격적인 혁파 논의는 조광조 등 기묘사림파가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부터 진행되었다. 보수세력과 궁중세력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사림파는 극한적인 언론투쟁을 거쳐 그 혁파를 성사시켰는데, 그 까닭은 도교적 사전이≪주자가례≫에 의거한 사전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인식과 더불어 그것이 인습 및 구제의 청산을 통한 훈구세력의 견제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초 유향소를 통해 향촌에서의 지배력을 유지하려 한 留鄕品官의 존재는 중앙집권관료체제를 지향하는 조선왕조의 정책과 배치되는 면이 없지 않았다. 때문에 정부는 수령권의 강화와 京在所제도를 이용하여 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같은 官權 절대 우위의 향촌정책 아래 유향품관은 수령과 경재소 임원인 중앙의 현직관리에 굴종하여 수탈을 일삼았다. 그래서 그 수탈기구가 된 유향소는 혁파되었으나 이들 3자의 分益的 수탈은 계속되었다.

유향소의 부활을 통한 향사례·향음주례 및 향약보급운동은 이러한 향촌의 수탈적 장치를 제거하여 향촌사회를 안정시킴으로써 정치적 기반으로 삼으려는 사림파의 의도에 의해 전개되었다. 사림파의 향촌질서 재편운동은 그들의 정치적 성장과 훈구대신의 양보로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결국은 勳臣과 戚臣의 반발로 사화가 일어나 사림파의 다수가 처형되고 그들이 이룩한 성과도 혁파의 대상이 됨에 따라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사림파가 중앙정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서원건립을 통하여 鄕論을 점차 주도하게 됨에 따라 경재소마저 혁파되면서 사림파의 향촌질서 재편운동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여기에는 향사례·향음주례 및 향약의 보급을 통해 그들의 결속을 다짐과 아울러 신분보다는 연령적 질서를 존중함으로써 소농민의 지지를 받았다는 점이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사림파 주도의 지배체제 구축 이후, 연령보다는 신분이 보다 더 강조되는 변화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이는 과거 경재소를 통해 드러난 중앙 권세가의 인식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개선된 것이었다.

서원은 훈구파의 탄압을 받은 사림파가 을사사화 이후 향촌 지배체제 확립을 목적으로 건립하였는데, 여기에는 과거를 위주로 하는 官學이 쇠퇴한 데다 사림파의 내적 성장을 위한 그들의 私學 건립 의지도 아울러 작용하였다. 그리고 성리학이 점차 관념론적 理氣論을 지향하던 이 무렵의 사상적 분위기 역시 서원의 확대에 일조하였다.

조선사회 최초의 서원은 중종대 周世鵬이 건립한 白雲洞書院이었고, 退溪 李滉에 의해 보급·정착되었다. 초기의 서원은 관학의 보조적 기능을 수행하는 정도의 기구로 인식되었지만, 이황에 의해 사림의 講學·藏修處로 그 성격이 분명하게 되면서 사림파의 향촌활동에서의 중요한 기반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선조대 이후 그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피봉사자도 사화기에 피화된 인물, 사림 각 학파의 영수,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확대되었다. 초기 서원은 예안의 易東書院처럼 지방관이 적극 협조하고 一道 사림의 公論에 의해서 건립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선조대 이후 서원은 朋黨政治와 관련되면서 그 역할이 증대되어갔고, 건립의 사정도 달라지게 되었다. 집권세력의 도학적 정통성 부여를 위한 자파계 인물의 제향처나 사림간의 상호결속을 위한 취회소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중반 이후 붕당정치가 전개되면서 향촌사림의 여론이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고, 향촌사림 역시 중앙 정치세력과 연계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 함에 따라 서원은 그 중심적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사림의 성장과정은 性理書의 수입과 간행 등을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선초에 赴京使行의 책 교역활동을 통해 새로운 성리서가 도입되고 간행·배포됨으로써 조선사회에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사림들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다. 특히 15세기에 와서 실천윤리와 의례적 측면에 관심이 많이 두어졌던 유학 연구는 16세기 사림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성리학적 세계관과 理氣心性論에 대한 이론적 연구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기묘사림파의 등장은 주자 중심의 성리학적 세계관이 확립되고, 명분과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이 이후 조선 성리학의 중요한 특성으로 자리잡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로써 주자 성리학이 조선왕조의 체제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훈척세력의 탄압에 부딪힌 사림파는 서원건립운동을 펴면서도 성리학적 세계관과 이기심성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徐敬德과 李彦迪에 의하여 氣一元論과 理氣二元論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기심성론에 대한 연구와 논쟁이 심화되는 추이 속에서 이황과 李珥의 단계에 이르러 조선 성리학의 수준은 한 차원 높아지고 독자적 사상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심성에 대한 해석 차이과 지역적 차별성으로 인하여 사림파는 서경덕·이황·曹植·이이·成渾 중심의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들 학파는 각각 중앙정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정파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신흥사대부들은 성리학의 名分論과 分殊論에 바탕을 둔 차별적 사회윤리를 실천하고자≪소학≫과≪주자가례≫의 보급에 노력하였다. 특히 16세기 이후 사림파는≪소학≫과≪주자가례≫를, 중앙과 향촌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양대 기반으로 삼아 그 실천을 강화하였다. 그 결과 성리학적 사회윤리가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고, 그에 따라 禮學이 발전하게 되었다.

16세기 사림파의 정계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그들은 소농민경영의 안정을 통한 자신들의 계급적 안정과 성장을 위한 권농정책을 다각도로 모색하였다. 成世昌·金塘·金安國 등은 당시 훈척계열의 지주지 확대와 그 경영양태를 비판하고, 왕정을 실현하고자 하는 교화정책의 일환으로 권농정책을 추진코자 하였다. 이같은 사림파의 농업정책은 국왕의 勸農敎書라는 형식을 통하여 8도에 신칙되었다. 또한 사림파는 소농민의 농업경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農書의 편찬과 보급에도 힘썼다.

이 시기에는 훈척세력이 소농민을 동원하여 추진한 低平·低濕地 개발이 활발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사림파에 의해 川防 즉 洑의 설치와 활용이 본격화되기도 하였다. 천방은 堤堰에 비하여 가용처를 더 많이 개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규모의 관개가 가능하였으므로, 16세기 이후 우리 나라 수리관개의 대종을 차지하였다. 이 시기에는 각 군현단위로 사림파 인사들이 향권을 주도하면서 새로운 경지의 개발과 더불어 천방을 많이 축조해 나갔다.

한편 세종 26년(1444) 貢法田稅制가 확정되면서 토지의 사유화가 인정되고, 그에 따라 지주층의 토지집적이 확대되었다. 특히 훈척세력이 다수의 노비와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토지를 잃게 된 소농민층의 파산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자, 사림파 관료들에 의해 豪勢家의 대토지소유를 제한하자는 均田·限田論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도 사림파의 정치적 한계로 인해 실현되기는 어려웠다.

賦稅의 대종을 이루는 공납은 연산군때 加定된 이래 방납현상으로 인하여 큰 폐단이 되었다. 그러나 공납제의 기본적 폐단인 貢案의 개정, 방납의 근절은 중종 때 사림파가 중앙정치 요로에 진출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공납의 폐단을 자행하는 장본인으로 宮禁과 훈척을 지목하고 소농민층의 파산 방지와 국가체제 유지라는 측면에서 공납제 개혁론을 제기하였다. 공납제 개혁론은 사림파의 정치적 한계로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16세기말 사림정치시대가 열리면서 다시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공납제 개혁론을 가장 심도 있게 제시한 것은 이이와 金誠一이었다. 이들에 의해 제기된 각 군현단위로 공납제를 詳定해야 한다는 개혁론은 대동법의 이론적 기초로서 기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李秉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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