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1. 사림의 훈구정치 비판과 새로운 모색
  • 1) 훈구세력의 비판
  • (1) 훈구의 비리

(1) 훈구의 비리

士林은 중앙정치에 진출하면서 당시 서민의 어려움과 몰락을 근거로 하여 勳舊政治를 비판하였다. 사림의 훈구정치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방면으로 이루어졌다. 권력을 남용하고 있는 정치 주도세력에 대한 비판과 정치 주도세력의 권력남용을 구조적으로 보장하는 권력구조에 대한 비판이었다. 먼저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자.001) 당시 사림은 당시의 정치 주도세력을 ‘勳舊’나 ‘權門’으로 지적하였다. 이하 이 글은 崔異敦,<成宗代 士林의 勳舊政治 비판과 새정치 모색>(≪韓國文化≫17, 서울大, 1996)을 정리한 것이다.

훈구의 폐단을 본격적으로 문제삼기 시작한 이는 李深源이었다. 그는 성종 9년(1478) 상소를 통해서 이 문제를 거론하였다. 그는 당시의 사회문제의 근원을 향촌문제로부터 파악하면서 당시 향촌의 문제를 총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良民과 公賤이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쳐서 私賤으로 고용되니 世傳의 田宅이 있어도 보전하지 못하고 權門에 귀속된다(≪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을해).

이는 양민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권문에 投託해서 몰락해 가는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투탁의 결과 “80∼90%가 사천이고 양민은 10∼20%에 불과하다”고 사천이 확대되는 상황을 말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이해되나, 자기의 토지를 갖지 못한 층은 물론 토지를 보유하고 있는 자작농까지도 권문에 투탁하고 있는 당시 향촌의 위기상황을 잘 대변하고 있다.

이심원은 민이 권문에 투탁하는 원인을 권문의 침탈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그 구체적 원인으로 먼저 권문의 私債를 지적하였다. 그는 “권문의 僕隷가 사채를 때에 따라서 나누고 거두는데, 取息에 無度하고 주인의 위세를 빌어 침학한다”라고 하여 권문에서 사채를 통해 가난한 양민들을 고리대 방식으로 수탈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세조말∼성종 초반에 극성을 이루었는데, 이는 성종 5년(1474)에 “지금 고관으로서 후한 祿을 받는 자들이 모두 장리를 놓아 더욱 부유해져, 그들의 농장이 산야에 두루 널리고 쌓아둔 곡식이 주현의 창고에 버금갈 지경이다”002)≪成宗實錄≫권 44, 성종 5년 윤6월 갑진.라는 지적에서 잘 알 수 있다. 양민들은 이러한 수탈에 의해서 전토를 잃고 권문에 투탁하거나 流離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지적한 원인은 권문의 사천들이 권력에 의지하여 役에서 벗어나는 현상이었다. 즉 權臣의 청탁을 받은 수령이 권문의 사천들을 역에서 면제해 주었고, 그 부담은 양민과 공천에게 돌아갔으므로 양민과 공천이 권문에 투속하였다.003)≪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을해. 당시 수령의 인사는 재상들의 천거에 의존하였고, 인사고과도 재상이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수령은 관계를 가지는 재상에게 뇌물을 보내는 것은 물론이었고, 자기 관할구역에 있는 재상의 노비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도 당연하였다. 수령은 단순히 권문의 노비들의 역을 면해주는 것뿐 아니라 권문의 도망한 노비를 잡아주는 등004)≪成宗實錄≫권 74, 성종 7년 12월 을유. 훈구의 노비를 관리해주었고, 나아가 사채의 관리까지 지원하였다.

이러한 민의 권문 투탁은 伴人이나 丘史의 형태를 통해서 더욱 확대되었다. 국가는 양민을 반인으로, 공천을 구사로 관료들에게 부여하였고, 이들은 관료들의 사환 역할을 하였는데, 훈구들이 이를 빌미로 과다하게 반인과 구사를 점유하였다. 반인의 경우 “사방의 거민 중 衣食이 있는 자는 재상의 반인”005)≪成宗實錄≫권 44, 성종 5년 6월 갑진.
≪成宗實錄≫권 55, 성종 6년 5월 경신조에도 宰相功臣이 ‘家富丁壯者’를 반인으로 冒占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과다한 점유가 많았고, 구사의 과다한 점유도 계속 문제로 제기될 정도로 빈번하였다. 재상들은 이들을 통해서 농장의 관리는 물론 防納이나 개간사업도 추진하였다.006) 李景植,<16世紀 地主層의 動向>(≪歷史敎育≫19, 1976).
李泰鎭,≪韓國社會史硏究≫(지식산업사, 1986).

권문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권문에 투탁한 이들은 권문에 투탁한 이후에는 오히려 권문을 의지하여 비행을 저질러 모순을 격화시켰다. 성종 7년 구사가 韓明澮의 위세를 이용해 官屬을 동원하여 士族을 감금하고 민의 물건을 강탈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007)≪成宗實錄≫권 74, 성종 7년 12월 갑신·을유.

그러므로 양민의 권문 투탁은 적지 않았고, 수십·수백 구를 헤아릴 정도였다. 宋益孫의 전라도 古阜농장에 소속된 노복이 500여 호에 이른 것이나,008)≪成宗實錄≫권 40, 성종 5년 3월 을사. 洪允成이 그의 고향 鴻山에 농장을 설치하자 군민이 태반이나 거기에 부속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이다.009) ≪世祖實錄≫권 45, 세조 14년 2월 계축. 물론 ‘투탁’이라는 명목과는 달리 권력에 의해서 강제로 노비화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성종 6년 공신 송익손이 ‘壓良爲賤’ ‘容隱私役’의 죄로 고소당하여 告身을 박탈당하였는데, 이는 송익손이 많은 양민을 강제로 천인으로 삼았고, 자기의 소유가 아닌 공사노비를 다수 사역하였기 때문이다.010)≪成宗實錄≫권 51, 성종 6년 정월 신유·갑자. 이러한 결과 훈구들은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세조 10년(1464) 당시의 대표적인 부자로 尹師路·尹士均·鄭麟趾·朴從愚 등 4명을 거론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훈구였다.011)≪世祖實錄≫권 33, 세조 10년 7월 기미.

이러한 향촌의 상황은 심각한 문제로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향촌의 주도층인 사림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향촌의 안정을 위해서 뿐 아니라 자신의 노비들도 권문에 투탁하여 실제적인 피해를 입고 있었으므로 심각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사림은 중앙정치에 진출하면서 훈구의 비리를 맹공격하였다. 그러나 훈구의 비리는 단순히 개별적인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었고 정치 주도세력의 성격에 관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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