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1. 사림의 훈구정치 비판과 새로운 모색
  • 1) 훈구세력의 비판
  • (2) 훈구의 형성과 그 성격

(2) 훈구의 형성과 그 성격

훈구는 주로 공신책봉으로 형성된 집단이었다. 성종초에 나타나는 공신 층은 성종초에 책봉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세조의 즉위를 둘러싼 갈등과정에서 형성된 공신 집단이었다. 이미 조선 건국기에 開國·定社·佐命 등의 공신이 책봉되었으나 개국이라는 사회의 격변기에 공신의 책봉은 당연한 것이었고, 새로운 정치 참여세력의 교체를 뜻하는 점에서 의미있는 현상이었다. 특히 개국공신의 경우는 개혁의식이 분명하였고, 이러한 의식은 그들의 출신성분이나 경제적인 조건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개혁을 주도한 주동세력의 경우 모계나 부계가 불분명하여 평민으로 생각되는 경우가 많고 서출인 경우도 상당수에 달하였다.012) 韓永愚,≪朝鮮前期 社會思想硏究≫(知識産業社, 1983).
공신세력은 주동세력과 영입된 세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영입된 인물들에는 세족 가문의 인물들도 있었으나 이들이 개혁을 주도하지는 않았다.
이들의 경제적 기반은 중소지주층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보다 열악한 처지의 경우도 많았다.013) 韓永愚, 위의 책.
대표적인 정도전의 경우에도 유랑하면서 살았던 처지를 생각한다면, 중소지주적인 기반마저 가지지 못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기존의 지배층과 기반이 다른 인물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운영할 때 정책의 변화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종대의 안정기를 거친 후 형성된 세조와 성종초의 공신은 그 성격이 달랐다. 이들은 세조의 권력장악에 기여한 공로로 창출된 공신들로, 세조의 집권 자체가 역사적 정당성이 적었으므로 이들 역시 개혁적인 성향은 적었다. 이들의 출신성분이나 경제적 지위도 건국공신들과는 달리 결코 낮지 않았다. 세조의 쿠데타를 비호한 세력을 논상하여 책봉한 靖難功臣을 분석하면, 좋은 가문의 출신이 많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세조가 즉위한 뒤에 책봉된 佐翼功臣 역시 거의 같은 성향을 보이고 있다. 또한 공신에 책봉된 인물 중에는 별다른 공이 없이 핵심인물의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공신에 책정된 경우도 다수 볼 수 있다.014) 鄭杜熙,≪朝鮮初期 支配勢力硏究≫(一潮閣, 1983).

이러한 기반을 가진 이들이었으므로 세조집권 초기의 정책에서는 개혁적인 면모를 찾기 힘들다. 오히려 세조대 대표적인 개혁으로 거론되는 保法(세조 10년;1464)이나 職田法(세조 12년)이 세조 말기에 시행된 것은 매우 시사적인 현상이었다. 이러한 개혁은 공신세력의 이해관계에 반하는 정책으로 공신들의 지지를 얻기 힘든 사안이었고, 세조의 주도로 추진되었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먼저 세조 10년 보법의 시행을 보면, 전혀 조정의 논의도 없이 갑자기 軍籍使가 지방에 파송되면서 가지고 간<軍籍事目>을 통해서 보법이 시행됨을 알 수 있다.015)≪世祖實錄≫권 34, 세조 10년 10월 을미. 또한 직전제의 시행을 보아도 앞뒤 논의도 없이≪世祖實錄≫에 “革科田 置職田”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016)≪世祖實錄≫권 39, 세조 12년 8월 갑자. 매우 중요한 정책이 조정에서 논의되지 않았을 리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훈구들에게 불리한 조치였으므로 상당한 반대 논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세조실록≫에 전말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세조 사후 실록의 편찬을 맡은 훈구대신들에 의해서 전후의 내용이 삭제된 것으로 짐작된다. 단지 보법의 시행을 알리는<군적사목>의 서두에 세조가 시행의 이유를 간단히 “강약을 고르게” 하기 위해서 보법을 실시한다고 명시하고 있어,017)≪世祖實錄≫권 34, 세조 10년 10월 을미. 보법의 논란에서 세조가 취했던 입장의 일단을 보여준다. 세조는 서민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실시의 명분을 제시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이 제도들은 실시 직후부터 梁誠之 등에 의한 반대에 부딪혔고,018)≪世祖實錄≫권 37, 세조 11년 11월 기미.
양성지는 軍國便宜 10條를 올리면서 보법을 반대하였다. 양성지는 세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고, 공신들에 의해서도 지원을 받아 당시 정책의 상당수가 그 에 의해서 제기되었으므로 세조대 정책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세조대의 가장 핵심개혁이라고 생각되는 보법은 물론 직전제도 반대하고 있어, 세조의 개혁이 전혀 다른 입장에서 시행된 것임을 알 수 있다(韓永愚,<梁誠之의 社會·政治思想>, 앞의 책).
보법은 세조 사후 훈구가 집권하는 성종초에 번복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례는 훈구들이 대토지 소유자였고, 권력을 보유한 계층으로 개혁을 제시하고 추진할 수 있는 층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므로 직전제나 보법의 시행을 명분으로 하여 세조 13년(1467)에 李施愛亂이 일어나자, 세조는 申叔舟·한명회 등 핵심 훈구의 연루설을 어느 정도 신뢰하여, 宗室의 인물들을 중용하여 난을 진압하였다. 난을 진압한 후에도 한명회 등이 핵심권력에서 소외된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훈구의 성향이 이러하였지만, 세조는 이들과 의논하여야 했다. 세조는 무리한 집권과정에서 오는 정통성의 상실과 집권 이후 정치 주도권을 강화해 가는 과정에서 세종대를 통해서 다듬어진 관료체제의 관행을 무시하여 관료들의 반발을 적지않이 받았다. 李季甸 등의 六曹直啓制 실시에 대한 저항, 세조 2년의 死六臣의 저항, 세조 3년의 李甫欽의 저항 등과 많은 유신들의 지방으로의 낙향은 그 구체적 표현이었다. 그러므로 세조는 더욱 공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공신들에게 사회 경제적인 특권을 부여할 뿐 아니라 이들의 비리까지도 비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세조 후반에 이르면 공신의 비리는 앞에서 살핀 것처럼 심각한 것이었다. 이에 따른 향촌의 저항도 활발하였다. 향촌에서 훈구의 부정은 수령의 비호하에 이루어졌으므로, 세조 후반에 이르면 민이 무력으로 수령에게 저항하는 양상도 빈번해졌다. 집권과정의 부담으로 그 입지가 좁았던 세조는 이러한 민의 저항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결국 공신들에 대한 규제로 연결되는 것이어서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저항이 심화되면서 세조는 공신들의 한계를 깊이 인식할 수밖에 없었고, 일정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즉 세조는 보법과 직전법의 시행을 강행하여 부담을 고르게 하였고, 나아가 민에게 수령의 부정행위를 왕에게 직접 고소하도록 하는 直告까지 허용하였다.019) 崔異敦,<조선초기 守令告訴관행의 형성과정>(≪韓國史硏究≫82, 1993). 이러한 동향은 민의 저항을 수습하지 못하면 정권의 유지까지 어렵다는 세조의 위기의식의 소산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세조 13년 이시애란이 일어나자 세조는 그 수습과정에서 또 한 차례 공신을 책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들은 세조 초기에 책봉된 공신들과는 다소 다른 부류였으나, 공신책봉은 세조가 결국 공신 의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은 왕위계승자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이는 세조와 비슷한 집권과정을 거친 태종이 왕위를 넘기는 과정에서 세종에게 부담이 될 부분들을 정리하여 주었던 것과는 크게 대비된다. 세조 사후 예종을 거쳐 성종이 등장하는데, 성종은 세조가 남긴 부담을 지지 않을 수 없었고, 성종 초기 정치문제는 여기에서 연유하였다.

세조 사후 한명회 등 공신 핵심세력은 예종 즉위년(1468) 南怡의 獄事를 빌미삼아 다시 정치주도권을 장악하고 정치 일선에 복귀하였다. 이 때 翊戴功臣의 책봉이 이루어졌는데, 이 사건은 전말이 석연치 않은 면이 많고 공신을 책봉할 만한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으나, 강력한 훈구의 영향력하에 공신 책봉이 이루어졌다. 또한 성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공신세력은 정치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중요 관직을 차지하였고, 특히 院相制를 통해서 권력을 독점적으로 운영하였다. 이들은 또한 佐理功臣의 책봉을 통해서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였다. 좌리공신의 창출 역시 전혀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져, 그 구성원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려웠고, 40%에 가까운 인원이 부자나 형제관계로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공신 책봉 후 천 명이 넘는 原從功臣까지 책봉되는 등 과다한 책정이 이루어졌다.020) 鄭杜熙, 앞의 책. 이미 세조대의 공신들이 과다하게 배출된 상황에서 다시금 명분도 없는 공신들이 많이 배출되면서 이들이 지위를 이용하여 치부에 몰두한 것은 오히려 당연하였다.

명분도 없는 과다한 공신의 배출이 반복되는 이러한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현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보다 본질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현상을 조선 초기의 권력구조와 연결시켜서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다음 절에서는 조선 초기의 권력구조를 살피면서 그러한 원인을 구조적으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