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1. 사림의 훈구정치 비판과 새로운 모색
  • 2) 권력구조의 모순

2) 권력구조의 모순

성종초의 정치문제는 공신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공신의 대량 창출은 권력구조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구조로 인해서 공신이 창출되었다. 이러한 권력구조는 조선 건국기의 권력구조의 정비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추구된 권력구조는 중앙집권적 권력구조였다. 이는 고려말의 폐단을 개혁할 목적에서 정비된 권력구조였다. 고려말의 폐단은 중앙의 통제력이 약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조선의 건국 주체들은 중앙통제력을 강화하여 私權을 규제하고 齊一的 지배를 강화하였다.

고려말의 국가권력은 都評議使司에 의해서 장악되었다. 도평의사사는 고위관리들이 합좌하여 정무를 의결하는 기구였다. 그러므로 그 구성원은 수십 명에 이르러 효율적인 운영이 불가능하였다. 그 결과 국가의 제반 문제에 즉각적으로 대처하기 어려웠고, 국가의 통치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구성원이 방만하게 되어 정당한 자격을 가지지 못한 인원의 참여도 많아지면서, 이들의 권력형 비리도 빈번하게 나타났고, 이는 당시 모순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도평의사사체제의 한계를 깊이 인식한 조선 건국의 주체들은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체제가 필요하였다. 이는 議政府를 정점으로 하는 정치체계의 정비로 나타났다. 태조 2년(1393) 義興三軍府를 만들어 군정에 해당하는 부분을 분리시켰고, 정종 2년(1400)에는 中樞府를 제외시키면서 이름도 의정부로 개칭하였다. 태종 원년(1401)에는 의정부에서 三司를 司平府로 독립시키고, 門下府의 郎舍를 司諫院으로 독립시키면서 의정부체제가 정비되었다.021) 韓永愚,≪朝鮮前期社會經濟硏究≫(乙酉文化社, 1983). 이렇게 형성된 의정부체제는 관료제적인 성향을 높여서 일사불란하고 합리적인 운영을 가능케 하였다. 이러한 의정부를 정점으로 하는 행정체제는 권력을 소수의 손에 집중시키는 체제였다. 특히 提調制까지 정비되어 하위부서까지 재상층이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권력의 집중은 강화되었다.022) 李光麟,<提調制度硏究>(≪東方學志≫8, 延世大, 1967).
金松嬉,<朝鮮初期의「提調制」에 관한 硏究>(≪韓國學論集≫12, 漢陽大, 1987).

그러나 이러한 독점적인 권력구조는 국초부터 쟁점으로 등장하였다. 의정부체제에서 왕의 위상은 취약하였으므로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왕실에서부터 나왔다. 사대부들은 재상 중심의 권력구조를 지향하고 있었으므로 왕 위상의 축소는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사대부들은, 왕은 법전에 입각해서 백성을 기르고 보호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강조하였고, 왕이 이러한 원칙을 지키지 않을 때는 왕까지도 바꾸는 ‘易姓革命’도 인정하고 있었다. 또한 왕은 실권을 재상에게 위임하고 재상과 같이 정책을 議定하는 역할을 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고 보았다. 행정의 책임자인 재상은 六曹 이하의 百司를 통솔하면서 국사를 결정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023) 韓永愚,≪鄭道傳思想의 硏究≫(서울大 出版部, 1983).

그러므로 이러한 왕의 위상을 상정하고 있는 의정부체제에 대한 왕실의 저항은 당연하였다. 이는 이미 태조 7년 李芳遠이 鄭道傳을 제거하고 집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도전은 재상이 중심이 되는 권력구조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선 의흥삼군부를 만들어 왕실과 공신들에게 나누어져 있는 병권을 집중함으로써 의정부를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한 정지작업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재상중심의 권력구조를 경계하고 있던 이방원이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과 세자 芳碩 등을 죽이고 집권하였다.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에 서서히 의정부의 운영방식을 바꾸어 갔다.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인정하면서도 태종 5년에는 6조의 기능을 강화하여 의정부를 견제하게 하였다. 즉 6조 장관의 직급을 2품으로 올리고, 의정부의 서무를 기능별로 6조에 이관시켰으며, 전례가 있는 서무는 6조에서 처리하게 하였다. 또한 6조는 대부분의 관서를 속아문으로 거느리게 하였다. 이는 의정부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그후 태종 14년에는 6조의 업무를 왕에게 直啓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이로써 의정부는 事大文書와 重罪人의 再審을 관장하는 것 외에 다른 소임이 없이 기능이 축소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권력이 집중되는 정치체계를 인정하면서 의정부의 역할을 왕이 담당하여 권력의 정점에 왕이 위치하는 체계를 만든 것이었다. 이는 결국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구조의 문제점을 그대로 유지하는 형태였다.

물론 의정부의 기능이 축소되었지만 폐지되지 않고 유지된 것은 나름대로 의정부와 6조의 권력을 나누어 보려는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의정부는 6조를 통솔하는 입장은 가지지 못하였으나, 6조에서 다루는 문제에 대하여 상소 등을 통해서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고, 또한 왕명에 의해서 6조의 사안을 의논할 수도 있었다. 또한 의정들은 6조의 判事를 겸직하여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정부의 유지는 우선적으로는 사대부의 이해관계를 상징하는 부서를 폐지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인정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정부가 없는 경우 6조가 오히려 비대화되는 것을 막고, 권한을 의정부와 6조로 나누어 상호견제하게 함으로써 왕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태종의 의도는 실패하였다. 이는 태종이 정변을 통해서 집권하면서 공신을 다수 창출하였기 때문이다. 태종은 무리한 집권과정에서 많은 공신을 창출할 수밖에 없었고, 집권기간 동안 이들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들을 의정부는 물론 6조의 장관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의정부와 6조의 구성원은 그 이해관계가 서로 같았고, 이를 나누어 견제하도록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실제로 의정이 判書를 겸하여 6조를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형태가 태종의 치세에 빈번히 나타나고 활성화된 것은024) 韓忠熙,≪朝鮮初期 六曹硏究≫(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2). 내부적으로 양자를 분리하는 것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그러므로 태종이 정변을 통해서 의정부의 권한을 축소하고 주도권을 장악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공신에게 모든 실권을 부여하여 새로운 부담을 형성하는 악순환을 야기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을 깊이 인식한 태종은 왕위 계승을 앞두고 공신과 척족을 제거하였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세종 4년(1422)까지 軍權을 장악하고 국사에 관여하면서 세종의 바람막이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바탕에서 출발한 세종은 동왕 2년부터 集賢殿을 만들어 친위관료를 길러 주도권 강화를 추진하면서025) 崔承熙,<集賢殿硏究>(≪歷史學報≫32·33, 1987). 자연스럽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권력의 독점으로 인한 기본적인 긴장관계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세종 18년 이후에는 제한적이나마 議政府署事制를 실시하면서026) 인사 및 군사문제와 형조의 일부는 직계를 계속하고, 나머지 정무는 의정부의 서사를 시행하였다. 권력의 균형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균형의 국면은 구조적으로 보장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문종∼단종대에 걸쳐 쉽게 무산되어 버렸고 의정부에서 전권을 행사하게 되자, 세조의 등장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세조는 6조직계제를 시행하면서 정치주도권을 장악하여, 마치 태종대의 재판인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상황은 태종대와는 많은 면에서 달라져 관료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다. 그는 태종과는 달리 이미 왕이 된 단종을 별 명분없이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재위기간을 통해서 계속 정통성의 문제에 시달렸다. 또한 태종은 의정부체제가 완성되기 전에 집권하여 의정부서사제를 제대로 시행해 본 경험이 없어, 관료들의 큰 반발 없이 6조직계제를 시행할 수 있었던 반면, 세조는 이미 세종대를 거쳐서 제한적이나마 의정부서사제를 경험하였고, 관료들이 이를 유교정치의 이상으로 인식하는 분위기에서 6조직계제를 실시하여 관료들의 저항이 컸다.

그 결과 세조는 보다 많은 공신을 창출하였고, 나아가 공신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세조의 치세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그의 치세 동안 공신들의 이해관계를 우선적으로 반영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공신들의 개인적인 비리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공신에 대한 깊은 의존성 때문에 태종과는 달리 왕위계승을 위한 일정한 정지작업도 하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 어린 나이의 성종에게 왕위를 계승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성종 초반 공신세력은 의정부체제를 장악하였고, 나아가 院相制를 운영하면서 정치권력을 독점하였다.027) 金甲周,<院相制의 成立과 機能>(≪東國史學≫12, 1973). 이들은 견제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권력을 남용하여 많은 문제를 유발하였다.

성종 초기의 훈구세력의 형성은 결국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구조에 기인하였다. 태종이나 세조가 집권 후 취한 6조 강화의 방안도 중앙집권체제의 한계를 보완하여 어느 정도 권력을 분산하기 위해 취해진 것이 아니라 집중된 권력을 왕이 장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재상들과 왕 사이의 갈등을 구조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방안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주도권을 둘러싼 왕과 재상들의 갈등은 왕의 개인적인 주도력 여하에 따라서 재연될 수밖에 없었다.

과도한 권력은 왕이나 공신 어느 쪽이 장악해도 문제의 소지가 컸다. 소수의 재상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경우는「훈구」의 존재 형태에서 보듯이 재상들의 권력형 비리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물론 왕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경우에도 문제는 많았다. 이미 조선의 정치구조가 의정부체제로 정립된 이상 왕의 권력독점은 무리한 과정을 통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지원해준 이들을 공신으로 책봉하여 이들의 계속적인 지지에 자신의 권력기반을 둘 수밖에 없었으므로, 공신중심의 무리한 정국운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악순환은 왕조가 안정되어 집권자들이 보수화되면서 더욱 심해져 갔는데, 이미 성종초에 이르면 그 한계에 이른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정치체계를 요구하였고, 이는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을 적절히 나누어 균형을 취하는 방안으로 나타났다. 이미 조선 초기부터 나타난 6조직계제도 기본 발상은 권력을 나누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실패로 돌아가 사회경제적인 처지가 비슷한 재상집단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교훈만을 남겼다. 세종도 집현전을 설치하여 친위세력을 기르면서, 권력을 나누어 보려고 시도하였다. 이는 구체적인 결과까지는 보여주지 못했지만, 부분적인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할 수 있도록 정치상황을 안정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면서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결국 성종 초기에 제기된 기존 권력구조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 모색은 과도한 권력 집중에 기인한 왕과 재상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조화로운 운영을 꾀하여 권력의 남용에 따른 피해를 민에게 주지 않는 정치형태를 찾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구체적인 모색은 성종대에 사림이 중앙정치에 등장하면서 구체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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