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1. 사림의 훈구정치 비판과 새로운 모색
  • 3) 새로운 정치체제의 모색

3) 새로운 정치체제의 모색

성종 초기의 정치문제는 정치세력과 권력구조에서 기인하였다.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구조로 인해 공신이 과다하게 창출되고, 공신이 집중된 권력을 장악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 근본문제였다. 그러므로 당시에 제기된 정치과제는 훈구의 비리를 막고, 나아가 훈구를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또한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구조를 바꾸어 적절히 균형잡힌 권력구조를 만들어 훈구의 발생을 근원적으로 막는 일이었다. 따라서 15세기의 정치과제는 권력을 집중하여 정치력을 확대함으로써 고려말의 혼란을 해소하고 개혁을 추진하는 양적인 과제였다면,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권력을 분화시키고 정치의 참여층을 넓힘으로써 조화로운 정치의 운영을 모색하는 질적인 정치과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이러한 변동은 사림이 중앙정치에 등장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사림이 중앙에 진출하는 중요 원인이 훈구 주도의 정치체제에서 오는 권력의 오용과 이로 인한 향촌의 불안정의 극복에 있었으므로, 새로운 정치체제의 모색과 사림의 등장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과 구체적인 대안은 일시에 정리될 수 없는 것이었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서서히 정비되어 중종대에 이르러서야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먼저 사림은 훈구의 비리를 지적하면서 훈구정치체제의 문제점을 풀어갔다. 훈구들이 권력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고, 양민을 사천으로 삼는 등의 행위가 빈번해지면서 이미 세조대부터 이것이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으나, 그 처리는 공신으로서의 공로를 인정하는 바탕에서 미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림이 등장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하였다. 성종 중반 이후 弘文館이 언론기관이 되어 언론 삼사체계가 갖추어지면서 사림은 매년 수백 건의 인사와 탄핵에 관한 언론을 행사하였는데028) 南智大,<朝鮮成宗代의 臺諫言論>(≪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이는 사림이 견제의 체계를 잡아가면서 본격적으로 비리에 대해 지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훈구의 비리를 지적하면서 사림은 훈구라는 정치세력 자체에 대한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고, 점차 훈구집단에 대한 공격도 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지적한 이는 李深源이었다. 성종 9년(1478) 그는 훈구의 비리로 서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지금 執政한 자들이 모두 賢者인가 아니면 현자와 不肖者가 섞여 있는가”029)≪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기해.라고 이 문제를 제기하고, 다음과 같이 훈신의 선별 서용을 요구하였다.

이미 祖宗에서 채용하였다고, 賢愚를 묻지 않고 채용하는 것은 조종의 뜻이 아닙니다.…비록 조종의 勳臣이어도 중국의 伊呂·子房과 같은 무리가 아니면 權勢를 가탁하여 은혜를 傷하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기해).

이러한 지적은 훈구가 집권하고 있는 상황에서 매우 충격적인 발언이었다.030) 이심원은 세조도 예종에게 이러한 점을 지적하면서 ‘變通’할 것을 명했다고 주장하고 있어 흥미롭다. 성종도 이 문제를 중시하여 며칠 뒤에 이심원을 별도로 불러 “세조의 훈신을 서용하지 말라는 것을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데, 너는 어떤 뜻으로 한 말이냐”고 물었다. 이심원은 이에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발언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무릇 創業之主는 성공에 뜻을 두고 비록 一才一藝가 있는 자도 모두 수용하나, 守成의 君은 이와 달라 才德을 겸비한 연후에 사용합니다. 세조대에는 일재일예가 있는 자라도 長短을 헤아려 임용한 인연으로 功을 얻어 勳臣이 되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훈구라고 모두 채용하니, 채용된 자가 모두 현명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현명하지 못한 자가 죄를 범한 즉 벌을 주면 은혜를 상하게 되고, 죄를 주지 않으면 법이 廢하게 됩니다.…훈신을 서용하지 않으면 공신을 보전하게 되고 은혜를 상하지 않고, 법도 폐하지 않을 것입니다(≪成宗實錄≫권 91, 성종 9년 4월 경자).

여기서 이심원은 자신이 문제를 제기한 배경과, 개선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그는 이 문제를 제기한 배경으로 ‘傷恩’과 ‘廢法’의 기로에 서있는 정치적 상황을 제시하였다. 즉 당시는 공신의 비리가 빈발하면서 그 처리방안을 놓고, 처벌할 수도 없고 처벌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심원은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훈신에게 선별해서 관직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심원은 이 문제에 대한 개선방안으로 인사방식 자체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즉 그는 재능보다 덕에 의한 인사로 그 방식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이러한 인사방식 전환의 필요성을 세조대까지는 창업기, 성종 이후는 수성기로 파악하면서 그 타당성을 제시하였다. 즉 객관적인 시간으로 본다면 세조대를 창업기로 파악할 수 없으나, 공신이 대거 창출되고 이에 대한 처리문제가 논의되는 상황은 창업기와 다를 것이 없다고 인식한 것이다. 특히 당시 재상의 비리는 능력보다는 덕이 부족한 까닭에 기인한 것이었으므로, 창업기의 공을 이루기 위해서 재능을 강조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덕을 강조하면서 성종대를 수성기로 파악하였다.

이어서 이심원은 이러한 인사원칙에 입각해서 새로운 인사방식까지 제시하였다. 즉 성종이 “지금의 대신은 모두 세조대의 훈구인데 이를 버리면 누구를 쓸 것인가”라고 반문하자, 이심원은 舊臣 중에서도 ‘才德을 아울러 갖춘’자는 임용하자고 말하면서 “영웅호걸로 엎드려 있는 자가 무진장하니 비록 구신이 아니어도 어찌 쓸 만한 인재가 없겠는가”라고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遺逸之士’의 천거를 암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구체적으로 새로운 인재로서 鄭汝昌 등을 천거하였다.

이러한 이심원의 훈구세력에 대한 공격과 새로운 정치세력 육성방안의 제시는 당시 상황에서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이후 사림은 이를 기본 입장으로 하여 정치세력의 문제를 추진해갔다. 즉 사림은 덕에 의한 인사방식을 강조하면서, 그에 입각한 入仕방식으로 薦擧制를 추진하였고,031) 이하 崔異敦,≪朝鮮中期 士林政治構造硏究≫(一潮閣, 1994) 참조. 그에 입각한 인사방식으로 自薦制를 추진하였다. 이를 통하여 사림은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의 진출을 확대 강화하였다. 나아가 사림은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재야의 사림을 公論정치를 통해서 간접적인 정치세력으로 수용하면서 소수의 정치집단이 권력을 독점하는 문제를 해결해갔다.

사림은 정치세력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그 이면에서 정치구조의 개편도 추진하였다. 이 문제는 권력구조의 개편을 논하는 문제이니 만큼 처음부터 그 방향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사림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점진적인 개혁을 도모하였다. 이는 먼저 언론기구의 기능강화를 통해서 나타났다. 사헌부와 사간원 兩司는 조선 초기부터 형식상으로는 재상들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기관이었으나, 그에 상응하는 권력을 가지지 못하여 제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조선 초기부터「公論」에 의한 정치를 이상시하였고, 양사가 그 이념을 수행하는 ‘公論所在’라는 관념은 형성되어 있었다. 사림은 이러한 원칙을 강조하면서 양사의 본래 기능을 확보하는 데서 권력구조의 전환을 모색하였다. 그러한 결과 ‘圓議制’의 관행을 확보하여 대간이 문제에 공동 대처하게 되었고, ‘不問言根’의 관행도 확보하여 언론의 취재원을 보호하면서 언론의 활성화를 추진하였다.032) 南智大, 앞의 글.

양사 언론이 강화되었으나 여전히 기본적인 한계는 남아 있었다. 즉 양사의 인사권이 재상에게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훈구를 견제하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였는데, 홍문관의 인사체계가 재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는 점이 주목되었다. 홍문관은 왕의 교육을 전담하였으므로 적절한 인원을 선발하기 위해서 ‘弘文錄’이라는 특별 인사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즉 홍문관원들이 홍문관원 후보자를 홍문록에 올리고 이를 바탕으로 재상들이 인사를 하였으므로, 홍문관원의 인사에 미치는 재상들의 영향은 제한되었다. 이러한 인사체계를 갖는 홍문관에 언론기능을 부여하여 양사 언론을 지원하게 하자 三司는 명실상부한 언론기관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사림은 구체적으로 권력구조의 개편을 논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성종 중반부터 나타나는 提調制의 개선논의가 그것이다. 제조제는 재상이 하위부서에 제조가 되어 부서를 직접 장악할 수 있도록 한 제도로 재상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단적인 예였다. 사림은 먼저 제조제의 부당한 운영을 지적하면서 개선을 요구하였다. 즉 제조가 소관부서의 관리 인사를 독점하여 운영하는 인사비리 문제와 소관부서의 인력을 私用하는 데서 오는 경제비리를 지적하여 문제를 제기하였다. 사림의 노력으로 성종 후반에 이르면 경제적인 면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나, 정치적인 면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연산군 원년(1495)에 이르면 사림은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제조제의 폐지론까지 제기하였다. 이 문제를 제기한 金馹孫은 百司에 提調가 있어 스스로 一法을 세우니 ‘政出多門’하여 명령이 여러 곳에서 나와 통일되게 다스려짐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제조제의 혁파를 요구하였다.033)≪燕山君日記≫권 5, 연산군 원년 5월 경술. 이 제의는 수용되지 않았지만 사림이 공개적으로 권력구조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사림은 언론기구를 통해서 훈구를 견제하면서 언론에 의한 통제의 한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즉 언론은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한 규제여서 근본적인 통제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안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규제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었다. 연산군 초반에 김일손에 의해 제시된 언관확대론이 그 대표적인 방안이었다. 그는 대간의 한계를 “명령이 이미 내려진 후에 논박을 시작하니 이미 늦은 것이다”라고 하여 결정과정에서 규제를 할 수 있는 체계의 필요성을 제시하면서, 그 대안으로 대간을 확대하여 承政院의 承旨에게 司諫을 겸하게 하자고 제의하였다.034) 위와 같음. 승정원은 사안이 처리되는 과정에 참여하니 이들이 대간의 직을 가진다면 사안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문제의 소지를 미리 규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제시된 방안이었다. 이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으나, 사림이 정책의 결정과정에서 사림의 의사를 반영할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 시행 방안은 적절한 것이 못되었다. 이미 승지는 堂上官으로 재상의 반열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재상인 훈구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堂下官인 郎官層에서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타당하였다. 그러한 언론의 한계는 士禍를 당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고, 결국 중종대에 낭관권의 형성으로 실무자인 낭관들이 재상을 규제하는 모습으로 정리되었다.035) 崔異敦,<16世紀 郎官權의 形成過程>(≪韓國史論≫14, 서울大, 1986).

결국 사림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사화의 피해를 입으면서 중종 중반에 이르러서야 성종 초반에 제기하였던 훈구정치체제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정비하였다. 즉 정치세력의 새로운 조성을 위해서 덕을 중시하는 인사원칙을 천거제와 자천제를 통해서 추진하였고, 권력구조의 분화를 위해서 언론권의 강화와 낭관권의 형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의 마련과 대안에 입각한 정치운영의 획득의 사이에는 또한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였고, 사림은 결국 선조대에 이르러 자신들이 마련한 정치방식에 입각한 ‘사림정치’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崔異敦>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