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2. 과전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 1) 과전법체제의 붕괴
  • (1) 국가기관 절수지

(1) 국가기관 절수지

과전법의 규정에 따라 조선 초기의 국가기관은 한동안 각자가 절급받은 전지의 田租를 수취하여 용도에 따라 지출하는 분립된 재정체계로 운용되고 있었다.036) 가령 왕실의 庫宮田 가운데는 收布·收蜜·收蠟·收油·收棉·收苧布田 등의 地目이 보인다(≪太宗實錄≫권 1, 태종 원년 5월 신묘). 또 충청도 報恩縣吏가 禮賓寺의 貢米를 漕運하여 한강에 이르렀다(≪世宗實錄≫권 3, 세종 원년 4월 계미)는 기사에 보이듯이, 각 기관별 별도의 재정 수납체제를 운용하고 있었다.

그같은 국가기관의 절수지로는 우선 庫宮田이라는 왕실수조지가 설정되었고, 이와는 별도로 왕실의 理財기구로 內需司가 왕실 소유의 전지와 노비를 관리하였다. 또한 국고 직접수조지로는 국왕의 용도와 밀접한 관련하에 설정된 이른바「國用」을 위한 豊儲倉 位田, 백관의 녹봉을 위해 설정된 廣興倉 위전, 그리고 유사시에 사용할 군량의 확보를 위해 설정된 軍資位田 등이 있었다. 또한 다른 중앙기관 가운데서도 가령 內資寺·內贍寺·禮賓寺·敬承府·尙衣院 등 왕실에 대한 공궤를 맡은 이른바 供上各司에는 전국 각지에 따로 수조지가 설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타 각 기관은 그 坐起日의 점심과 공무에서의 紙·筆·墨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公廨田을 각기 절수하고 있었다.

그 밖에 중앙의 성균관과 四學 및 각 군현의 향교에는 學田이 절급되었고, 왕릉의 수호군에 절급한 守陵軍田이 있었으며, 氷庫의 운영을 위한 氷夫田, 왕실의 불교행사를 위한 國行水陸田, 祭享과 供上을 맡은 여러 기관의 菜田과 惠民署의 種藥田도 절급되었다. 그리고 역대 왕조의 시조 및 고려의 공덕 있는 네 왕에 대한 祭位田이 따로 설정되었고, 先農·雩祀·先牧 등 국가 지정의 여러 농업 및 자연신을 받드는 祭壇의 看守 奴子에 대한 口分田도 절급되었다.

한편 조선왕조의 지방행정기구는 전국이 350곳 정도의 郡縣으로 구분되었는데, 각기에는 군현의 등급과 使客 왕래의 중요도에 따라 차등을 두어 각 군현 공용경비의 재원으로 公須田, 守令의 祿俸에 상응하는 衙祿田, 그리고 각 군현 소속 鄕吏들의 직역전으로 人吏位田 등이 절급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전국적으로 교통의 要路에 驛을 설치하고 驛吏·驛奴와 驛馬를 비치하였는데037)≪經國大典≫에 등재된 전국 각 驛의 합계가 540이다. 驛路의 중요성에 따라 大·中·小路로 나누어 역의 운영경비를 위해 공수전을, 역마의 사육 재원으로 馬位田을 차등있게 절급하였다. 또 역리와 역노에게는 長田·副長田·急走田을 절급하여 역로를 운용케 하였다. 그 밖에 일반 여행자의 숙박시설인 院에는 院主田을, 한강·임진강·예성강 등 수도에 가까운 강의 중요 渡津에는 渡丞과 津尺을 두고 각기 渡丞位田과 津夫田을 절급하였다. 또한 경기·충청·경상 북부·강원·황해 동부의 租稅穀을 운반하기 위하여 한강과 예성강 연변 요로에 水站을 여럿 설치하고 거기에 水夫를 배속시켜 江運에 종사케 하는 한편 그 지휘관으로 水運判官을 두었는데 이들에게도 각기 水夫田과 아록전을 절급하였다.

이같이 중앙과 지방의 각 국가기관과 거기에 소속된 잡다한 직역자에게 수조지를 분급하여 국가를 운용하는 방식은 농업생산력과 유통경제의 발전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아서 국가재정을 일원적으로 운영하기가 어려운 현실에서 기인한 현상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시대와 같이 休閑農法이 보편적인 상태에서는 국가재정의 원천으로서의 조세 수입이 안정적일 수 없었고 따라서 국가재정을 일원적으로 편성 운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국가기관마다 필요 경비에 대한 재정원으로서 수조지를 각기 분급받아 수입과 지출을 개별적으로 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038) 安秉佑,<高麗末·朝鮮初의 公廨田>(≪國史館論叢≫5, 國史編纂委員會, 1989).

그런데 그같은 재정 운용방식은 세종 27년(1445) 國用田制의 시행으로 일대 변화를 겪게 되었다. 국용전제는 같은 해부터 시행하기 시작한 貢法田稅制와 밀접한 관련하에서 시행되었다. 공법전세제는 휴한농법의 극복이라고 하는 농업생산력의 일정한 발전을 토대로 하여 종래의 踏驗損實 방식에 의한 收租制에서의 收租權者의 자의적 수탈의 길을 막는 한편 收稅의 전국 일률적 균평을 기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일종의 定額稅法의 원리를 가미하여 고안해낸 田分 6등·年分 9등의 새로운 田稅制였다. 국용전제는 농업생산력의 상대적 발전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종래 각 기관마다 별도 수납함으로써 과도한 수탈이 일어났던 폐해와 국가의 일원적 통제가 어렵고 계산조차 번거로운 폐단을 지양하고자 고안해낸 것이었다.

국용전제의 시행은 국가재정 운용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중앙 각 기관의 분속수조지는 모두 국용전이라는 이름으로 통괄하여 그 수납을 일원화하게 되었다. 둘째 각 군현의 공수전·아록전과 驛田·학교전·院田·渡田·站田 등 지방행정 및 교통·운수 기능의 수행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각 기관의 수조지를 조정하여 각자 수납의 방식으로 운용토록 정비하였다.039) 이들 地目은 성질상 각 지역 혹은 기관별로 고유하게 분속시켜 운용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에, 다소 축소 조정하여 종래의 제도대로 각자 수납하는 형식을 취하게 하였다. 셋째 각 군현의 인리위전을 전면 혁파하게 되었다. 넷째 중앙과 지방에 널리 설정된 각종의 祭位田·雜位田 따위를 혁파하는 대신 이후로는 國庫米를 지급하여 供辦토록 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다섯째 駙馬府·耆老所 이외의 공해전을 모두 혁파하였다.040) 부마부·기로소 공해전 또한 세조대에 혁파되어 공해전 명목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것은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종래 국가기능 수행의 대가로 잡다하게 수조지를 분급하여 운행해오던 관행을 대폭 지양하여 필수불가결한 경우 이외의 것은 대폭 일원화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국용전제의 시행은 과전법에 구현된 고려시대 이래의 잡다한 수조권적 토지지배 관행을 크게 변형시키게 되었다. 즉 농업생산력의 상대적 발전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 재정수납을 상대적으로 일원화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이제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관행은 한층 더 쇠퇴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