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2. 과전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 3) 하층민의 동요

3) 하층민의 동요

사회경제적으로 보아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을 바탕으로 해야만 소유권 위주의 토지지배관계가 정착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하고서야 국가 수취제 또한 상대적으로 균평하게 법제화할 수 있었다. 과전법체제는 연작농법이라는 생산력의 바탕 위에서 양민 자영농층을 국가체제의 기본 사회계층으로 파악하고 설정한 것이었다. 전분 6등·연분 9등의 공법전세제가 마련되고, 이른바 소경전이라는 토지소유의 다과를 기준으로 공물을 부과·수납하는 공납제를 정립시키기에 이르렀으며, 다시 소경전의 다과에 따라 잡역을 부과하는 요역제를 정비하게 된 것도 모두 그러한 사실에 속한다. 보다 실제에 가까운 호적과 군적의 정비를 거쳐 保法이라는 군역제도를 실시한 것도 그같은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전 시기에 비하여 한 단계 더 제도화하고 좀더 개선되었음을 뜻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국가의 기틀이 잡힌 세종대부터 전국의 호구와 토지의 실세 파악에 더욱 힘쓰는 한편 제반 수취제의 기본을 마련하였다. 세조대에 가서는 기왕의 호적과 군적을 회수하고 실제 그대로의 國勢를 파악하는 새로운 노력을 집중한 결과 전국적으로 대략 70만 호, 400만 구에 85만 명의 군역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16세기에 가서도 80여만 호, 400여만 구 정도의 호구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아직도 개략적인 것일 뿐이었다. 먼저 호적과 군적에서도 실세 그대로를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전부터 호구를 조사하여 호적을 만든다는 것은 으레 형식만 갖추는 일이었을 뿐입니다. 遊丁은 전혀 검괄되지 않으며, (군적에) 올라 있어도 流亡한 자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매번 責立되는 군액은 탈루자가 절반을 넘고 군정은 점점 원액보다 감소하고 있으며, 모자라는 숫자를 대충 채워 넣더라도 모두 保率이 없습니다. 국가는 昇平이 백 년이나 되어 生齒가 날로 번성하는데도 군액의 減耗는 이같이 무섭습니다(≪中宗實錄≫권 80, 중종 30년 12월 기묘).

즉 호적이나 군적은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責立에 따라 형식만 갖추어 편성되는 것이며 그것도 실세와는 많이 괴리된 것이어서 임시방편의 고식책으로만 운용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호구는 증가하는데도 군역을 담당할 자는 점점 감소해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호적 못지않게 중요한 바탕이 되는 量案의 경우도 더 나을 것이 없었다. 量田이란 당시로서는 워낙 정확성을 기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령 공법전세제가 전국적으로 시행된 초기인 성종대의 전라도 양전에서 일개 군현 전지의 결수가 2, 3천 결, 혹은 3, 4천 결의 차이를 내기도 하였다는 사실093) 金泰永, 앞의 책, 324쪽 .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각 군현의 양안이 모두 다 冒濫하다는 논란이 일어나자, 성종 자신이 “비록 고쳐 바로잡더라도 폐단은 다시 여전할 것이다”094)≪成宗實錄≫권 57, 성종 6년 7월 계유.라고 자포자기할 정도로 양안은 지리멸렬한 상태로 운용되고 있었다. 중종 때에는 양전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의정부 대신들이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염려스러운 사정을 보고하였다.

듣건대 양전의 일은 비록 최선을 다하려 하나 그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새 양안이) 오히려 전 양안만 같지 않으며, 또한 正案도 없다고 합니다(≪中宗實錄≫권 62, 중종 23년 7월 임오).

양전·양안제도에 관한 한 조선시대에 와서 크게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상은 그러한 것이었다.

이상 호적과 양안의 운용 내용에서 짐작되듯이 국가는 결코 그 구성원인 개별 농민의 호구나 토지를 실세대로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아무리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라 할지라도 國勢의 기초 자료가 그같이 미비하고서야 수취제를 실상에 맞도록 정확하게 운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취제는 필연적으로 왕권의 대행자로서 현지에 나가 주재하면서 그래도 현지의 사정을 가까이 알고 있는 각 군현의 수령에게 위임하여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외방의 軍籍은 그 군현의 殘·盛에 따라 평균 定額하여 국역에 이바지하도록 하는 것이 곧 常法”095)≪世宗實錄≫권 20, 세종 5년 5월 정미.이며, 貢納의 경우도 “당초 貢案을 상정할 때 반드시 그 군현의 잔·성과 토지의 廣·狹, 物産의 여부를 헤아려 공물의 다소를 책정”096)≪中宗實錄≫권 27, 중종 11년 12월 경술.한 것으로 제도화하였다. 양자가 다 각 군현 단위 공동체적 책정과 부과의 방법으로 제도화하였던 것이다.

즉 군역과 공물 등 가장 중요한 수취 항목이 각 군현 단위로 책정되고 각 군현은 또한 당해 지역의 군적·田籍 등을 참작하여 각 민호에 배분하여 수취하는 구조로 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역도 토지 기준으로 부과되었지만, 이것이야말로 수령의 ‘用心’ 여하가 가장 크게 작용할 수 있는 수취부문이었다. 다만 전세는 당해 군현의 자의가 개입될 여지가 비교적 적은 편이었지만, 그 상대적 비중이 16세기 이후로는 아주 적었다.

국가의 기본 수취제도가 각 군현을 단위로 하는 공동체적 대응으로 운용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富實한 군현보다는 쇠잔한 군현에 더 과중한 부담으로 책정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주양반 등 세력가에게는 헐하게, 소농민과 같은 약자에게는 무겁게 분담되는 형태로 구조화하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계층제적 사회구성이 공동체적으로 대응할 때 나타나는 필연적 구조이며 체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 지배지반을 항구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과전법체제는 그 기본이 되는 자영 소농민계층을 보호해가는 정책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상 이 시기에는 전세·공물·요역은 물론 군역까지를 모두 부담하는 양민 자영농층의 사회적 분해가 가장 현저하게 진행되었다. 여기에서는 그들을 그렇게 몰락의 방향으로 분해시킨 최대의 요인으로서 防納 등으로 대표되는 공납제의 폐단과 疊徵 등으로 표현되는 군역에서의 가혹한 수탈의 예를 간단히 들어 보기로 한다.

공물은 워낙 그 물목이 번쇄하고 수납 절차가 까다로와서 勒徵·代納·點退·引納 등 갖가지 폐단을 동반한 채 가장 무거운 부담으로 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중앙의 勢家·豪商과 각지 수령의 결탁하에 자행되는 방납이 점차 공공연해지면서 공납제의 폐단은 극도에 이르렀다.

① 各司의 하인으로서 방납하는 자는 그가 수납하는 물건을 중간에서 꾀를 부려 백단으로 점퇴한다. 外吏는 부득이 高價를 납부하고 방납인으로부터 사야만 비로소 納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납관하는 물품은 모두 다 품질이 나쁘니, 특히 任土作貢의 의미가 없다. 더구나 방납인은 重價를 징색하니 羊 한 마리 값이 면포 7同(1동=50匹)에 이르고 貂皮 한 장 값이 官木 4동에 이른다.…다른 물건 값 또한 모두 이같이 高重하다(≪中宗實錄≫권 88, 중종 33년 8월 갑인).

② 지금은 여러 군현에서 바치는 많은 공물이 토산이 아니어서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거나 배를 타고 뭍짐승을 잡는 일과 같으니 다른 고을에서 轉買하거나 혹은 서울에 와서 사 바칠 수밖에 없으므로 백성의 비용은 백 배나 드는데도 公用은 넉넉지 못하다. 게다가 민호는 점차 줄어들고 전야는 점차 진황되니 왕년에 100인이 바치던 것을 전년에는 10인에게 責辦케 하고 전년에 10인이 바치던 것을 금년에는 1인에게 책판케 하니, 그 형세가 반드시 1인 또한 없어지고 난 후에라야 그치게 될 것이다(李珥,≪栗谷全書≫권 5, 萬言封事, 갑술;선조 7년).

군역은 실상 이 시기 국가체제 유지의 지반이 되는 양민층에게만 부과되고 담당자의 實數와는 관계없이 각 군현별로 군액이 고정된 채 운용되고 있었으므로, 사회분화가 심해질수록 현지에 남아 있는 자에게 2중, 3중의 부담으로 중압되어 갔다. 그리고 16세기에는 실제 立役보다도 代立이 보편화하고 다시 그 代立價 또한 폭등하여 군역은 이제 양민층을 상대로 자행되는 주구적 수탈로 변하고 말았다. 가령 水軍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당초에 대립가는 통상 1朔에 면포 15필이었는데 그 후 배수가 되어 30필이 되었다가 지금은 4배로 되어 60필에 이르렀으니…우마나 전답을 다 팔아 償納하고 그것도 없는 자는 도산하는데, 당사자가 도산하면 一族切隣에게서 징수하고 일족절린이 도산하고 나면 일족의 일족이나 절린의 절린에게서 징수”097)≪中宗實錄≫권 103, 중종 39년 5월 병진.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확대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正兵뿐 아니라 奉足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① 외방의 양인은 그 역이 심히 괴롭다. 정월에 某人의 봉족으로 이미 立役했는데도 7, 8월에 다시 타인의 봉족으로 입역해야 되니, 이는 1년에 두 번 입역하는 것이다. 그가 지탱할 수 없어 도망가버리면 수령은 그 遠族 遠隣에게 督徵한다. 부득이 전지를 모두 팔아 償納하여도 오히려 모자라 이 역시 도망가버리는데, 그 때문에 한 지경이 마침내 텅 비게 된다. 지금 전지를 가진 자는 사족뿐이니, 허다한 백성이야 누구인들 尺寸의 토지라도 가진 자가 있는가(≪中宗實錄≫권 64, 중종 23년 11월 신축).

② 민간의 疾苦가 다단하지만 백성으로서 가장 고된 것은 수령이 백성을 사역하기에 급하여 나이가 차지 않은 자를 혹 군졸로 정하거나 혹은 官所에 사역하는 일이다.…14살에 充軍하는 것도 너무 이른데 지금은 비록 10살이 차지 않았는데도 관에 陳告하는 자가 있으면 으레 장부를 갖추어 두고 이를 혹 官屬으로 정하여 사역하거나 혹은 군사의 봉족으로 지급한다. 백성으로서 아들을 많이 둔 자는 그 고역을 견디지 못하고 그 때문에 破産撤業하여 流離失所하며 혹 절로 도망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자 또한 매우 많다(李彦迪,≪晦齋全書≫별집 2, 筵說, 임인;중종 37년 윤5월 15일).

실로 16세기의 조선은 사족을 중심으로 한 지주화와 대다수 하층민의 무산화라는 사회분화가 매우 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서 恒産의 근거를 잃고 몰락하며 무산화한 인민대중의 동요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들 중 “壯實한 자는 사방으로 흩어져 僧徒라든가 群盜로 화하며 늙고 파리한 자는 自存치 못하여 유리도산”098)≪中宗實錄≫권 87, 중종 33년 2월 계유.하고 있었다. 또한 “승도가 된 자들을 추쇄하면 한갖 군도로 화하여 민간을 요란하게 할 뿐”099)≪明宗實錄≫권 33, 명종 21년 8월 정축.이라고도 하였다.

실제로 이미 15세기 후기의 세조대부터는 도적이 극성하여 한 군현이나 일개 도만의 일로 끝나지 않고 중앙정부의 대책이 여러 차례 강구되고 있었다. 가령 세조 10년(1464)에는 특히 전라도에 도적이 많이 들끓는 실정이므로 중앙에서 특별히 장수를 파견하여 무려 수백 명을 체포하고 엄히 다스리자 도적의 여당이 敬差官의 本家를 劫掠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100)≪世祖實錄≫권 34, 세조 10년 8월 무술. 동왕 11년에는 7월 2일을 기해서 함경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6도의 도적을 일시에 체포하는 거사가 벌어지고 그 도적들을 치죄하는 별도의 事目을 마련하여 다수의 경차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101)≪世祖實錄≫권 36, 세조 11년 7월 기미. 또 예종대의 張永己라는 도적 일당은 수십 명의 당여를 이끌고 전라도 일대를 횡행하다가 현지 관찰사·절도사의 연합 추격을 받자 지리산 남쪽을 거쳐 경상도로 이동하고, 여기에서 관군과 대치하여 저항하다가 다시 쫓기어 전라도로 이동하는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연산군대의 유명한 洪吉童은 玉관자에다 紅包를 띠고 당상관 행세를 하면서 대낮에 무리를 이끌고 병장기를 지닌 채 공공연히 관부에 출입하는 등 대담한 강도짓을 자행하였다. 또 중종연간에는 황해도에서 강도 60여 명이 떼지어 횡행하므로 중앙에서 장수를 파견하여서야 이를 잡을 수 있었는데, 그 무리가 많아 본도 본읍에서 이들을 다 수금할 수가 없는 형세여서 開城府獄이나 京獄 등 이른바 大處로 이송 처리하여야 한다는 논란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나아가 명종대의 임꺽정 사건은 조직적 강도집단이 황해도를 중심으로 경기와 수도 한성부에까지 출몰하면서 혹 관부를 엄습하는 등으로 여러 해를 노략질한 대규모 저항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 사건은 아직도 모두 우발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서민 호걸을 중심으로 군도들이 규합되어 民物이나 일부 官財까지를 약탈하는 등 한때의 소동을 부리다 끝나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같이 예외적 사건에 연루될 생각도 기회도 갖지 못한 일반 농민층은 대체로 빈번한 자연적·사회적 재난에 허덕이면서도 자기 고장에 붙박혀 연명해갈 수밖에 없었고, 그 재난이 견딜 수 없는 지경이면 아직도 개별적 유리도산의 길을 택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金泰永>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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