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3.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 1) 장시의 발달
  • (1) 장시성립의 기반

(1) 장시성립의 기반

場市는 농촌사회의 구성원인 농민·수공업자 등 직접 생산자층에 의한 상품생산과 이들 서로간의 직접 교역에 바탕을 둔 교환시장 곧 농촌시장(鄕市)이었다. 농민들의 유통기구로서 장시는 15세기 후반에 출현하였고, 16세기에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정기 장시로 자리잡아 갔다. 정치적 중심지인 행정도시와 같은 곳에서의 상거래는 고대부터 있어온 것이지만, 농촌사회에 근거를 가지는 시장은 대체로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농촌상업의 발달은 자연재해나 국가의 부세제도 운영이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고려시대 이래 농민들의 유통경제 참여를 제약해오던 여러 가지 요인이 극복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장시가 출현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을 농업생산력, 생산관계의 변동, 사회적 분업의 확대, 유통경제의 발달 등의 순으로 살펴보도록 하자.102) 이와 관련된 연구로는 李景植,<16世紀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韓國史硏究≫57, 1987)이 대표적이다. 이 부분의 정리에 참고한 연구로는 이외에도 다음의 글들이 있다.
李泰鎭,<16세기 東아시아 경제 변동과 정치·사회적 동향>(≪朝鮮儒敎社會史論≫, 지식산업사, 1989).
남원우,<15세기 유통경제와 농민>(≪역사와 현실≫5, 한국역사연구회, 1991).
홍희유,<리조전반기 상업의 발전>(≪조선상업사≫고대·중세편,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9).
朴平植,<朝鮮前期의 行商과 地方交易>(≪東方學志≫77·78·79, 延世大, 1996).
먼저 농업생산력의 측면부터 알아보자. 14세기 이래 농업기술상의 일대 혁신으로 농업경제력은 크게 신장하였다. 재와 인분 등으로 거름을 만들어 논밭에 폭넓게 주는 施肥術이 강구되었고 제초기술도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농업기술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단계의 하나인 連作常耕農法의 실현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경지의 연작 이용뿐만 아니라, 단위면적의 생산력도 증대시켰다. 연해지역의 저습지나 삼남지방의 바닷가가 크게 개간되는 등 수전농업을 중심으로 농경지도 확대되었다. 신품종의 보급과 확대 또한 이 시기 농업생산력 발전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였다.103) 李泰鎭,≪韓國社會史硏究≫(지식산업사, 1986) 제4·7·8장 참조. 특히 목면은 고려말에 도입된 이래, 조선 초기에는 下三道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보급되었으며, 세종대에는 북부지역에로의 보급이 정책적으로 추진되었다.104) 澤村東平,≪朝鮮綿作綿業の生成と發展≫(朝鮮棉花協會, 1941), 1∼154쪽. 목면재배의 성행은 농민들 의생활의 변화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면포가 민간 사이의 거래나 부세납부에서 麻布를 밀어내고 正布 혹은 常布로서 교환의 기준으로 자리잡아 감에 따라 농가소득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농업발전에 따라 농민층은 어느 정도의 잉여생산물을 축적하여 재생산기반을 확대해 나감으로써 시장을 위한 상품도 마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농촌에 뿌리를 두는 시장이 광범하게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15∼16세기에는 생산력 발전에 따른 농가소득의 증대뿐 아니라, 생산관계에서도 농가경제에 유리한 조건들이 마련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해체·소멸이었다. 과전법체제로 남아 있던 수조권적 토지지배는 16세기를 경계로 과전법과 함께 그 운명을 다해 갔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토지의 사적 소유권이 점차 자리잡아 갔다.105) 李景植,<16世紀 地主層의 動向>(≪歷史敎育≫19, 1976).
金容燮,<前近代의 土地制度>(≪韓國學入門≫, 大韓民國 學術院, 1983).
농민들이 자기 토지를 가지고 경작한다는 것은 농업생산력 발전의 성과가 농민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제 농민들은 자기 노동생산물에 대해 종전과는 달리 좀더 직접적으로 사유의 권리를 강화하고 행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농민·수공업자 등 직접생산자가 자기 생산물의 일부를 임의로 자유롭게 서로간에 처분할 수 있는 조건하에서, 생산물의 생산 및 교환·배분이 사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것이 농촌시장의 출현·성장을 가능케 한 또하나의 배경이었다.

그리고 15∼16세기에는 생산력이 발전하고 토지의 사적 소유권이 성장함과 동시에 사회적 분업도 진전하였다. 匠工人들에 대한 부역제적 운영원리에 입각하여 경영되고 있던 관청수공업체계가 점차 해체됨에 따라 고려시대에 수공업소에 예속되어 있던 수공업자들은 독립적인 전업적 수공업자들로 전환하였다. 이들은 봉건국가의 수요에 따른 공물생산을 담당하는 부담을 벗어날 수는 없었으나, 점차 일반주민들의 소비를 전제로 한 상품생산도 하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지배층의 사치성 수요를 위한 금속세공, 철물가공, 문방구생산을 비롯하여 민간의 일용품들을 생산하였고,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가내부업으로 해결할 수 없는 도자기·농기구 등을 생산하였다. 이에 따라 각종 기구 생산을 위한 도자기업과 冶匠業, 그 밖의 일용품의 생산을 위한 수공업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와 더불어 중세수공업의 주요 부문을 이루는 농민들의 가내수공업도 한층 발전하였다. 이 시기 농민들의 가내수공업은 마포·면포·모시·명주 등을 짜는 직조업과 제지업, 그리고 돗자리·방석 등을 제작하는 자리수공업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직조업이었다. 이는 특히 목면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106) 홍희유,≪조선중세수공업사연구≫(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78;지양출판사, 1989), 170∼217쪽 참조.

지역간에 불균형하게 발전하고 있던 이들 수공업은 상업과 교통이 발달함에 따라 상호 분업관계에 서서 상품에 따라 생산지가 정해져 갔다. 이러한 경향은 기타 산업분야에서도 진행되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농업을 버리고 특정산업으로 轉業하는 일이 많아졌다. “농민들이 工商의 이익에 몰리고 있어, 농민이 날로 감소한다”107)≪世宗實錄≫권 69, 세종 19년 9월 경오.는 것은 그런 사정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농업 이외의 다른 산업부문에 종사하는 인구도 늘어났다. 이와 같은 농촌사회에서의 사회적 분업의 전개는 잉여생산물의 교역을 확대시키고 모든 산업부문에서 시장을 목표로 하는 상품생산을 증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적 분업의 확대로 생산물을 교환하려는 사회적 요구는 더욱 높아졌고, 이에 따라 상업은 새로운 발전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처럼 15∼16세기에는 농가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마련되었고 농민들이 처분할 수 있는 잉여생산물도 더욱 늘어났다. 아울러 사회적 분업도 확대되었다. 15세기 후반 이후 농촌시장으로서의 장시는 이러한 객관적 기반 위에서 성립하고 확산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유통경제의 발달이란 측면에서 장시성립의 기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농민의 사사로운 교역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미 고려초에 그 형세는 일반화되어 농민들의 교역은 市를 이룰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시는 행정중심지인 州縣에만 섰던 州縣市였다. 開市장소는 관아근처였고, 시는 한낮에 열렸으며, 관리와 농민 등 상하층 모두가 참여하였다. 교역에 錢幣는 사용하지 않았고 다만 米·布로 무역하고 있었다. 낮에 시가 열렸다는 사실은 교역자들이 개시처 근처에 거주하는 민인들이었음을 전하여 준다. 15세기 후반의 장시처럼 농민·수공업자 등 직접 생산자들이 중심이 되거나 수개 촌락의 민인들이 하루에 왕복하면서 교역하기 편리한 교통상의 요지에 열리고 있지는 못하였다. 다만 농민·수공업자 등 직접 생산자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던 점, 그리고 교역매개물인 미·포가 이미 화폐로서의 일반적 등가기준으로 정착하고 있던 점 등을 감안해 볼 때 주현시는 조선 전기의 장시와 같은 성격의 시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장시 바로 그것은 아직 아니었다. 이러한 시는 조선 전기의 장시에 선행하는 농민교역처였다.108) 李景植, 앞의 글(1987), 75∼79쪽.

이처럼 고려시대 농민의 교역은 조선 전기의 장시처럼 시를 이루고는 있었으나 개시지역, 교역참여자, 출시일 등에서 완전한 농촌시장으로 성립하지는 못하였다. 그나마 주현시는 내적인 사회변동과 외침이 잦았던 13∼14세기간에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 점이 이 시기 농민의 교역이 갖고 있던 한계와 특징이었다.

시장은 이러한 교역수준에 있던 15세기까지는 아직 항상 혹은 규칙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15세기 중반까지도 “지금 우리 나라는 京都에는 시가 있으나 각 도의 州郡에는 모두 시가 없다”109)≪世宗實錄≫권 59, 세종 15년 정월 임신.고 하듯이 지방장시는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장시가 형성되기 이전에도 물론 농민들은 여러 가지 형태의 교역을 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이나 가내제품을 내다팔아 그들이 필요로 하는 생활용품이나, 부세로 내는 물품 또는 화폐를 마련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역은 농민상호간에 ‘有無相遷’의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하였고, 지역간을 이동하면서 상업을 하는 행상과 교역을 하기도 하였다. ‘抑賣·抑買’라고 표현되는 강제교역에 의한 것도 있었다.

농민들이 유통경제와 맺는 이러한 교역형태들이 지방장시의 성립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유무상천’식의 교역은 “있는 것으로써 없는 것을 바꾸며 적은 것으로써 많은 것을 바꾼다”110)≪世宗實錄≫권 89, 세종 22년 5월 경술.고 하는 것으로, 민들 사이에서 가장 연원이 오래되고 익숙한 교역형태였다. 즉 농민 자신이 직접 생산한 물품을 가지고 가서 그들에게 필요한 생활용품과 서로 바꾸는 교역을 말한다. 농민간의 이러한 교역은 개인 사이에서 필요에 따라 이루어지기도 하였으나, 교역이 증대됨에 따라 특정한 장소에 모여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미 12세기≪高麗圖經≫의 기록에 나타나듯이 주현의 관청주변에 市가 열리고 있었다. 이런 주현시는 비록 유무상천의 교역수준을 보이고 있지만, 그 규모는 단순한 물자교환의 단계를 넘어선, 중국 宋代의 江南지방 촌의 정기장시인 墟와 비견될 정도로 활발하였다.111) 徐兢,≪高麗圖經≫권 3, 貿易 및 권 19, 民庶.
李景植, 앞의 글(1987), 76∼78쪽 참조.
이러한 주현시는 15세기 후반 장시가 성립되기 이전까지 주요한 교역장소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그러한 교역은 불규칙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통량이 아직 규칙적인 장시를 출현시킬 정도에 이르지는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역권을 넘어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상업을 하는 행상과의 교역도 농민교역에서 주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또 하나의 교역형태였다. 행상들은 주로 농촌사회에서 공급이 부족한 물품을 보충하거나, 기타 구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수공업제품과 소금·생선 등의 수산물을 농민들에게 제공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이들을 통하여 그 지역에서 구하기 힘든 생활필수품이나 일용품을 구입하고, 또한 공물 등의 부세납부를 위한 필요한 물품들을 마련하고 있었다.

지방행상들은 배를 이용하여 보다 널리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水商 혹은 船商으로 불렸다. 그 가운데는 생선을 잡아서 판매하는 자들로부터 소금·미곡 등의 물화를 운송하여 운임을 받거나, 이를 직접 판매하는 자들까지 여러 부류가 있었다. 이러한 선상들의 활동의 하나는 漕運이었다. 조운은 가장 조직적이고 규모가 큰 운송체계였다. 따라서 이러한 조운망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통기구도 형성되고 있었다.

지방행상은 조선 초기에 들어서면 아직까지도 양반지주층이나 관청을 주요고객으로 하고 있었지만 농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활동도 점차 확대하여 갔다. 그에 따라 상업에 종사하는 농민의 수도 늘어났다. 농민들의 유통경제로의 참여는 더욱 촉진되었다.

한편 강제적인 교역도 널리 행해져오던 주요한 교역형태의 하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농민 잉여생산물의 대다수가 사원·궁원·양반·토호 등 여러 지배세력들에 의해 反同·互市의 이름으로 강제 교역되었었다.112)≪高麗史≫권 85, 志 39, 刑法 2, 禁令 우왕 14년 8월. 반동과 같은 강제교역이 가능했던 까닭은 이들 지배층이 수조권을 매개로 농민 및 그 생산물에 대하여 그만큼 강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佃客의 유통경제, 농민의 교환경제가 한 단계 더 발달하자면, 이같은 제약이 해소되어야만 하였다. 고려말 과전제도의 시행은 농민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지배층 전주가 가하던 여러 가지 징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전객들은 끊임없는 對田主抗爭을 통하여 소유권을 강화해 나갔고, 이에 병행하여 자기 잉여 생산물을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자유 곧 스스로에게 유리한 교환시장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여건도 확보하였던 셈이었다. 이에 抑賣·抑買의 강제적 교역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강제교역은 15세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관행으로 남아 있었지만 고려시대처럼 농민의 교역을 주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을 수행하는 주체도 관권으로 범위가 축소되었고, 농민의 전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줄어들었다. 농민 사이의 교역이 확대되고, 행상들과의 교역이 활성화되었던 것은 그러한 추세를 보여준다. 관권에 의한 강제교역도 주로 상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113) 남원우, 앞의 글, 89쪽.

이상 유통경제의 측면에서 볼 때, 직접 생산자 상호간의 교역이 보다 활성화되었고, 농민을 대상으로 한 지방행상의 활동도 확대되고, 상업에 종사하는 농촌소상인도 늘어났다. 그리고 농민들은 抑賣·抑買의 강제교역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여러 조건들의 성숙은 농민들의 독자적인 시장기구가 성립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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