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3.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 1) 장시의 발달
  • (3) 화폐경제의 발달

(3) 화폐경제의 발달

장시의 성립과 함께 유통경제의 발달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이에 따라 화폐경제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원거리 교역의 비중이 컸던 종래 유통체계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화폐는 고대에 이미 출현한 것으로서, 그 역사 자체는 매우 오래이다. 그러나 화폐가 출현하였다는 것과 화폐를 통용함으로써 통합적인 경제체계가 확립하였다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르다.

15세기 후반 이후 농민들은 장시와 연관하여 스스로 독자적인 화폐경제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교역의 가치척도인 화폐가 농민 중심으로 성립하여 갔다. 이른바 布貨經濟가 그것이다.132) 李泰鎭, 앞의 책(1989), 95∼104쪽. 銅錢制는 15세기 초반 이미 포기되었으며 國幣로는 布(正布·苧布·細布)와 楮貨가 사용되고 있었다.133)≪經國大典≫권 2, 戶典 國幣. 그런데 저화는 당초부터 그 사용범위가 제한되었을 뿐 아니라, 관에서 만들어 내기 때문에 유한하고 실제로는 쓸모없는 명목화폐였으며 게다가 공신력도 약하였다. 이에 비하여 면포는 민간에서 직조되기 때문에 무궁하고 수용도 절실한 물품화폐였다. 그리하여 저화는 마침내 통행되지 못하고 오로지 면포만이 국폐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아직까지 법적 규정은 보이지 않고 그 규모도 제한적이었으나 미곡도 교환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134) 高錫珪,<16·17세기 貢納制 개혁의 방향>(≪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204∼205쪽.

이처럼 면포가 일반적인 유통수단으로 사용되자 그 수요가 급증하였다. 그에 따라 麤惡綿布가 유행하였다.135) 이 시기 면포의 화폐적 기능에 대하여는 宋在璇,<16세기 綿布의 貨幣機能>(≪邊太燮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6) 참고. 15, 6세기 포화는 五升布를 기준으로 삼았다. 1승은 80올이므로 5승포란 곧 400올로 짠 면포를 가리킨다. 16세기에는 3승포·4승포 등이 常布란 이름으로 널리 통용되기도 하였다. 이것들은 5승포보다 훨씬 거칠게 짜여졌다. 추포 또는 악포라고까지 불렸던 2승포는 너무 성글어 옷감으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올 수가 성글었을 뿐만 아니라 길이도 짧아서 1필당 30척 이하로 35척의 기준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 많았다. 이렇게 기준에 미달하여 실생활에 사용할 수 없는 면포가 만들어졌던 까닭은 바로 경제적인 목적 곧 화폐로서의 용도 때문이었다. 5승포보다 훨씬 적은 규모의 거래에 활용하기 위해 그러한 낮은 질의 포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농촌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지방장시 발달을 비롯한 당시 사회의 여러 발전적인 변화들로 미루어 볼 때 2승포·3승포 등은 농민들의 일상생활과 관련하여 성립한 소액환이라 할 수 있다. 소액환으로서의 常布, 고액환으로서의 正布, 그 위에 銀이 통용되는 것이 당시의 화폐체계였던 것이다. 당시의 경제는 이러한 체계를 갖춘 나름대로 발달한 화폐경제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136) 李泰鎭, 앞의 글, 102∼103쪽 참조.

한편 추악면포가 유행함에 따라 포가 지닌 본연의 물품가치를 상실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정부는 이에 대한 조치로 악포의 사용을 금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 방편으로 “織造者 및 짧게 잘라 쓰는 자, 2승포·3승포를 造作하는 자는 초범에 杖一百 徒三年하고, 재범에 全家를 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尺短布를 行用하는 자는 杖八十 등에 처한다”137)≪中宗實錄≫권 40, 중종 15년 9월 경오.는 처벌규정을 마련하여 악포의 통행을 금하고자 하였다. 이후 이 규정은 “직조한 사람은 초범이라도 全家를 변방에 入居하도록 하여야 한다”138)≪中宗實錄≫권 49, 중종 18년 10월 무오.는 등으로 보다 강화되었다.

이처럼 악포의 사용금지에 대한 논의가 집중되는 가운데도 여전히 포가 가장 일상적인 교환수단이었다. 그러나 점차 포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제가 적은 米가 교환수단으로서 선호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미의 선호경향과 함께 미곡의 생산증대는 미가 교환수단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미곡이 교환수단으로 자리잡는 과정은 곡물이 상품화하는 과정과 궤를 같이 하였다. 곡물의 상품화는 15세기에 이미 나타났으며 16세기 이래 상품경제의 발달에 부응하여 촉진되었다. 17세기말에 이르러서는 곡물가격이 지역적 차이를 극복하여 전국적으로 균등한 상태를 보일 정도였다.139) 高錫珪, 앞의 글, 205∼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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