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3.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의 모순
  • 2) 공납제의 폐단과 방납
  • (2) 공납제 개혁의 방향과 방납대응책

(2) 공납제 개혁의 방향과 방납대응책

공납제의 모순이 빚어낸 여러 폐단들을 해결하는 것은 당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梁誠之는 일찍이 세조연간에 농민부담의 약 6∼7할이 공물대납임을 지적하고 국가의 대납실태 미파악과 ‘用財’의 무절제로 백성과 국가가 당하는 곤란한 현실을 비판하여 방납제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양성지의 개혁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는 방납 등의 폐단을 시정하는 데 비상한 관심과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165) 韓永愚,<梁誠之의 社會·政治思想>(≪朝鮮前期社會思想硏究≫, 지식산업사, 1983), 213∼214쪽.

한편 金宗直은 성종대에 咸陽郡守로 있을 때, 그 지방에 나지 않는 공물인 茶가 上供으로 분정됨으로 인하여 겪던 민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智異山에서 茶種을 구해 嚴川寺 北竹林 중에 建園하여 종식·번성케 하여 上供에 충당함으로써, 불산공물의 분정으로 인한 민폐를 구하였다.166)≪增補文獻備考≫권 157, 田賦考 貢制. 이는 주어진 조건하에서 수령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개별적으로 폐단을 시정하고자 하였던 예이다. 공납제의 문제점을 제도 자체의 모순에서 찾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보다는 운영의 기술적인 보완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아직 공납제 개혁의 실마리가 제공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중종대에 이르면, 趙光祖가 보다 체계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는<論貢物之弊>에서 공납제의 문제를 공액의 과다와 불산공물의 분정 그리고 방납의 폐로 지적하면서, 규모를 고쳐 安民의 내실을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고 논하였다.167) 趙光祖,≪靜菴集≫附錄 권 5, 年譜 論貢物之弊 여기서 조광조가 공안의 개정(改貢案)과 방납의 근절(杜防納)을 공물폐의 제거를 위한 양대 과제로서 인식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공납제 개혁의 방향을 규정지었다.

즉 선조대에 이르러 李珥가 민호·전결의 다소를 헤아려 균평하게 敷定하도록 공안을 개정하고 또 本色納을 실현하여 방납을 근절케 하자고168)≪宣祖實錄≫권 15, 선조 14년 5월 병술. 한 데서 조광조에 의해 제시되었던 개혁방안이 다시 거론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또 仁祖反正 후 金長生이 李貴·金瑬·崔鳴吉 등에게 보낸 글 중에서 “공안을 개정하고 방납을 막은 다음에야 도탄에 빠진 민생의 고통을 달래줄 수 있을 것이다”169)≪仁祖實錄≫권 1, 인조 원년 3월 계축.라 하여 역시 ‘改貢案·杜防納’을 개혁의 요체로 꼽았다. 이처럼 조광조에 의하여 제시되었던 공납제의 개혁방향은 그 후 대동법으로 귀결되기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런데 위와 같은 개혁의 방안에서도 특히 비중이 컸던 것은 무엇보다도 방납을 막는 것이었다. 방납의 비리는 16세기 내내 심해져만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전 사회의 경제체제 속에 구조적으로 그 틀을 확고히 하여 나갔다. 따라서 날로 만연하는 방납의 폐단을 방치해 둘 수만은 없었다. 정부는 공물 방납이야말로 민생에 해를 끼치는 모리행위일 뿐만 아니라 정부의 현물재정체계를 위협하는 폐단으로 인식하고 대책에 부심하였다. 이에 여러 유형의 대응책이 나타났다.

마련하기 어려운 물종 특히 불산공물의 분정으로 말미암은 방납의 경우는, 그 발생의 원인이 불산공물의 분정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는 것이 하나의 유력한 해결책이었다. 따라서 産·不産을 바로잡은 뒤에 이를 기초로 공안을 개정하면 어디서나 본색납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방납을 저절로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특히 이이의 경우에 명백하였다.170)≪宣祖實錄≫권 15, 선조 14년 5월 병술. 그러나 방납이 확대되었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여러 계층의 방납배들에 의한 모리행위 그 자체에 있었다. 산·불산을 바로잡는다고 방납배들이 모리행위 자체를 포기할 리는 없었다. 따라서 바로 이들에 의해 자행되던 비리를 척결하기 위한 조치들이 보다 적극적인 대응책이 될 수 있었다. 위정자들은 규찰강화를 위해<外貢捧上作弊禁止單子>를 내리거나,171)≪中宗實錄≫권 92, 중종 34년 10월 임오. 방납 주체로서 가장 문제가 되던 각 사의 書員을 혁거하고 書吏로 대체하자는172)≪中宗實錄≫권 88, 중종 33년 8월 을묘·병진·정사. 등의 제도적 보완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한편에서는 각 도 관찰사가 직접 看品하고 差使員을 따로 정하여 ‘親自領來’케 한 다음 該官과 臺監이 함께 거두도록 하자는 등의 논의도 나타났다.173)≪宣祖實錄≫권 217, 선조 40년 10월 임술. 이는 곧 감사나 수령 등의 지방관에 의해 일부 지역에서 행해지던 ‘친자영래’의 방식을 원용하여 수령 대신 차사원을 따로 두어 이를 제도화함으로써 방납의 폐단을 막아 보자는 제안이었다. 이와 같은 감사나 수령에 의한 ‘친자영래’ 행위는 비공인 상태이지만 지방관이 공적 지위를 이용하여 친히 공물을 거두어 바침으로써 방납의 폐단을 막고 있었다는 점에서 ‘私大同’의 한 단서로 주목된다.174) 高錫珪, 앞의 글, 202∼203쪽.

그러나 산·불산에 따른 공안개정이나 지방관의 ‘친자영래’ 등에서처럼, 방납 그 자체를 전혀 부정하는 차원에서의 대응책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방납은 일과성의 투기이거나 단순한 비리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방납은 중세국가의 조세수취체계에 편승한 상업행위였다. 방납은 막대한 상업적 이윤을 가져다 주는 영리행위였다. 공물을 대납하기 위해 거래되는 공물의 가격이 통상 십배의 이익을 남긴다고 할 정도였다.175) 이지원,<16·17세기 전반 貢物防納의 構造와 流通經濟的 性格>(≪李載龒博士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90), 486쪽. 따라서 사대부와 상인 즉 양반지주와 상인이 상호공생적 관계에서 자금조달, 방납행위의 실무담당, 방납권리의 획득 등의 조건을 갖추고 공물의 수취체계를 장악하여 방납의 이득을 독점·분배하였다.

이와 같은 방납현상은 다른 한편에서 농민들의 유통경제편성을 촉진시켰다. 지방의 장시나 서울의 京市는 공물시장의 기능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176) 兪棨,≪市南先生文集≫권 17, 江居問答. 농민들은 현물납을 완수하기 위해 공물을 상품으로서 구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공물상품의 구매는 쉽게 아무 곳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전라도에서 평안도로 다니며 공물을 구매하였다.177)≪中宗實錄≫권 29, 중종 12년 8월 무신.
이지원, 앞의 글, 482쪽 참조.
16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 현저하게 증가하던 장시는 바로 이러한 공물시장이기도 하였다. 16세기 중반 이후에 이르면 정기설장의 방법이 제시되기에 이를 정도여서, 전국 각지에서 생산되던 수공업제품을 제때에 정상적으로 교환할 수 있는 단계까지 나아갔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를 바탕으로 방납은 전 사회의 경제체제 속에 구조적으로 그 틀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시는 월 2, 3회 내지 5일장이 서면서 그때그때마다 일용품을 교환하는 것이 주요한 기능이었기 때문에 매년 2월(전세공물은 6월)에 정례적으로 한 차례 상납하는 공물의 구매시장으로서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비록 그러하나 공물을 구매하기 위하여서도 농민들은 이와 같은 장시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방납은 유통경제발전의 현상이면서 동시에 농민들을 유통경제 속으로 몰아넣는 기제이기도 하였다.

방납과 관련하여 특히 그 유통경제적 기능이 커지는 것은 경시였다. 장시에서 거래되는 물품들은 농업생산을 보완하고 농민생활을 보충하는 데 필요한 일용품들이었다. 따라서 높은 품질의 사치품·소비품이 많은 공물은 장시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상품들이 아니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보다 적절한 공물 구매시장은 바로 경시였다.

서울은 인민의 都會로서 군현제의 원칙에 입각한 부세제도의 운영을 통해 사방의 물산이 집중하고 유통하는 지역이었다.178) 李恒福,≪白沙集≫권 9, 陳時務一啓. 국가권력이 독점적으로 통제하는 유통경제 정책의 핵심부였다. 서울의 물자유통은 주로 市廛과 京中富商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더욱이 16세기 이래로는 私船業者, 京商들이 국가의 稅穀運送, 在京 양반지주들의 지대운송 등에 편승한 교역행위 등을 통하여 새로운 특권상인으로 성장하여 갔다.179) 崔完基,<官船漕運體制下의 私船賃運活動>(≪朝鮮後期船運業史硏究≫, 一潮閣, 1989). 아울러 유통망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유통망의 확대와 유통경제적 특성은 공물구매시장으로서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경시에서의 구매는 구매방법뿐만 아니라 운송·상납에서도 유리하였다. 즉 서울은 공물을 최종 상납해야 할 主司들이 있는 왕도였기 때문에, 지방에서 공물상품을 구매했을 때와 같이 공물상품을 지방에서 서울로 가져올 필요가 없어서 운송에 따르는 경비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방 각 관에서는 많은 경우 공물을 대납한 미·포를 수합하여 서울에서 공물상품을 구매 상납하였다. 공물을 현물 대신 교환수단인 미 또는 포로 수납하는 일은 16세기의 이른 시기부터 보편화되고 있었다.180) 高錫珪, 앞의 글, 204쪽.

이처럼 서울을 중심으로 한 공물거래는 부세운영과 관련하여 진행·발달한 것이지만, 그 내부에는 상업적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별도의 구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공물의 방납은 이러한 유통경제의 발전에 따른 전업적인 상행위의 일환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동시에 공물방납의 확대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유통경제가 활성화하는 주요한 계기이기도 하였다. 방납의 확대는 곧 중세 상업·유통경제의 발전과정이기도 하였다.181) 이지원, 앞의 글, 481∼486쪽.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방납은 유통경제의 발달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납제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하여는 이러한 발달을 억제하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여야 하였다. 그것은 방납에서의 비리는 제거하되, 방납행위 자체는 원칙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곧 공물의 대가로서 미 또는 포를 거두는 이른바 收米·收布 형태의 합리적 운영의 모색이었다. 그 제도의 개혁은 주지하듯이 대동법으로 귀결되었다.

이와 같이 대동법의 성립과정은 공납제시기의 유통경제적 발전을 조선왕조 정부가 재편·장악하여 가는 과정이었다. 대동법은 생산물의 본색징수가 미·포·전을 매개로 전결세화되는 부세형태상의 변화만이 아니라, 이전의 본색공물 대신 각종 官用 물자를 시장을 통해 구매·사용하는 체제로 전환하였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대동법의 성립은 이 시기 유통경제의 변동에서도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高錫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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