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4. 군역제도의 붕괴
  • 2) 갑사·정병·수군 군역의 변질
  • (2) 기정병의 보군화

(2) 기정병의 보군화

16세기 군역제의 변동은 양인으로 이루어진 의무 번상병인 正兵에서도 일어났다. 정병은 앞의<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 초기 여러 軍種 중에서 가장 많은 군정 수를 보유하였다. 갑사가 서반 관직에 들어가 토지와 녹봉을 받고 근무함에 비해 양인 농민의 의무 군역인 정병에게는 일체의 토지나 녹봉은 주어지지 않았다. 단지 국가가 마련한 군호체제 안에서 보인과 더불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여야 했다. 그런데 정병에게도 근무 일수 64일이 차면 종5품 影職에 去官되며 정3품까지의 散階로 올라가는 것이 허락되고 있었다.207)≪經國大典≫권 4, 兵典 番次都目. 이렇게 영직·산계를 수여한다는 것은 정병도 일정하게 관직 체계에 포섭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것은 그야말로 그림자 관직일 뿐 實職과는 거리가 멀었다.

船軍을 제외한 양인 농민의 의무 군역을 정병이라고 부른 것은 세조 5년의 병제 개편 때부터였다. 이전까지는 서울에 번상 시위하는 군사를 侍衛牌, 각 지방에서 근무하는 군사를 營鎭軍·守城軍, 평안·함길도의 군사를 正軍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 때부터 우선 평안·함길도의 정군과 나머지 도의 시위패를 통일하여 정병이라 부르기로 하고 말이 있는 사람을 正騎兵, 말이 없는 사람을 正步兵이라 규정하였다. 그리고 세조 10년에 영진군과 수성군이 정병에 합속되어 ‘和會分番’하도록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지방의 군사들은 모두 정병에 속하여 번상과 유방을 번갈아 하게 되었다.≪경국대전≫兵典 番次都目에 의하면 번상정병은 ‘8番2朔相遞’로, 유방정병은 ‘4番1朔相遞’로 규정되어 있었다.

양인 농민에게 군역을 지우고, 또 일단 군역의 의무를 진 자를 정군과 봉족으로 나누고, 정병으로 정한 자를 다시 기병과 보병으로 나누는 것은 호적을 기초로 한 군적의 작성에 의해서였다.208)≪中宗實錄≫권 22, 중종 10년 6월 무인. 따라서 군역의 의무를 결정하는 군적 작성은 농민의 이해와 밀접한 관련을 지녔다. 농민 자신이 정군이 되는가, 보인이 되는가 아니면 군역에서 빠지는가는 생존과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군적의 작성은 원래 鄕吏와 더불어 향촌의 里正·勸農官이 軍籍監考가 되어 그 실무를 담당하였다. 군적 작성시 향리의 작간은 일찍부터 큰 폐단으로 지적되었다.≪경국대전≫에도 ‘몰래 뇌물을 받고서 役을 지우는 것을 불공평하게 하는’ 元惡鄕吏에 대한 처벌은 매우 엄격하게 규정되었지만,209)≪經國大典≫권 5, 刑典 元惡鄕吏. 그 폐단은 조선왕조 전 기간을 통해 그칠 줄 몰랐다. 한편 중종대에 이르러 군적감고를 권농관에서 유향소 임원으로 대체하면서부터 군역의 차정이 이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농민의 불만이 커졌다.

세조대에 보법이 실시된 이후에도 ‘壯實人’으로 하여금 군역의 의무를 지우게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것은 군인들이 보인 이외에 다른 물질적 지급이 없더라도 군역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현실적 조건이었다. 정병 중 특히 기병은 지방에서 부유하고 건장한 사람으로 차정하였다. 보병이라 하더라도 건장하고 혈기가 왕성한 사람은 기병으로 정하는 것이 원칙이었다.210)≪成宗實錄≫권 291, 성종 25년 6월 임신. 기병은 말과 군장을 갖추고 궁궐을 시위하는 군사로서 때로는 국왕 가까이에서 근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병의 사회적 위치는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기병은 입역기간 중에 都試에 응하여 갑사나 무반으로의 진출 기회가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보인도 보병보다 1丁 많은 1保 1정, 즉 3정을 지급받았다. 즉 기병은 조선 초기에는 양인들의 의무 군역 중 가장 정예병이었고 대우를 받는 군대였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 부유한 사람들은 차츰 권리보다는 많은 의무가 따르는 기병을 기피하고 갑사로 올라가거나, 아예 보병으로 또는 보인으로 가려고 하였다.211)≪成宗實錄≫권 293, 성종 25년 8월 임술. 이러한 상황에서 군적 작성의 과정에서 姦吏들이 부유한 자들에게서 뇌물을 받고 군역을 면제해준다든지 ‘장성한 자를 봉족으로 만들고 빈약한 자를 戶首로 만든다’라는 부정이 빈번하였다.

일단 군적에 올라 기·보병으로 구분된 자들은 留防과 番上으로 나뉘어 근무에 임하여야 했다. 이러한 군역 의무를 소홀히 할 경우에는 일족이 피해를 입었다. 고향에서 터를 잡고 농사를 짓고 살기 위해서는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번상 근무를 하는 자들은 번상기일 5일 이전까지 서울로 올라와야 했는데 교통이 불편한 당시로서는 서울로 올라오는 과정 자체가 고역이었다. 강원도나 전라도·경상도의 연해·산간 벽지에 거주하는 군인들은 서울로 올라오는 데만 8∼9일이 걸렸다. 또 上番하는 과정에서 강물을 넘다가 빠지거나 도적에게 털려 서울에서 생활할 물자를 잃어버리거나, 산을 넘다가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번상 기병들은 軍營에 거처하면서 기마·복마와 군장의 점고를 받아야 했다. 군영이라는 곳은 비좁고 불편했으며, 군장을 갖추는 것도 무척 힘들었다. 종이로 만든 갑옷이라도 값이 면포 50필에 해당하였다.212)≪中宗實錄≫권 89, 중종 34년 정월 기해. 이에 기병들은 아무런 군장도 지니지 못한 채 번상하기도 하였다.

특히 말의 문제는 심각하였다. 조선은 원래 “농사에는 소가 중요하고, 兵事에는 말이 중요하다”213)≪世宗實錄≫권 116, 세종 29년 5월 병진.라고 하여 말을 중시하였다. 그런데 16세기 지주제의 전개 속에서 확대되는 농지 개간 등에 의하여 목장이 줄어들면서 말의 수가 감소하였다. 14세기 후반부터 연해 지역의 낮고 평평한 곳에 설정된 목장이 해도로 옮겨지고 있었고, 16세기에는 해도의 목마장도 대부분 개간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214) 李泰鎭,<15·6세기의 低平·低濕地 開墾 동향>(≪國史館論叢≫2, 國史編纂委員會, 1989). 이에 따라 중종 17년(1522) 高荊山은 “성종조의 馬籍을 보면 말의 수가 4만여 필에 달하고 있는데, 지금은 겨우 2만여 필만 남아 있다. 또 그 중 쓸 만한 말은 없다”215)≪中宗實錄≫권 44, 중종 17년 2월 정해.라고 말할 정도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馬價는 폭등하였다. 말 한 필의 값이 면포 100∼150필에 달하였다. 그래서 “예전에는 말을 탄 군사가 천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겨우 40∼50명에 불과하다”라거나 “말을 가지고 있는 군사가 백에 하나, 둘도 안된다”216)≪中宗實錄≫권 36, 중종 14년 9월 갑오.라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모두 서울에 와서 남의 말을 빌려 탔던 것이다. 자신의 말을 소유하고 있는 자라도 서울에서 말을 사육하는 비용이 많이 들어 자신의 말은 돌려 보내고 말을 대여해서 탔다. 정부에서는 말을 빌려 타는 자나 대여해주는 자나 ‘制書有違律’217)≪大明律≫吏律 公式條에 制書(왕의 詔勅)를 받들어 시행하는데 위반함이 있는 자는 杖一百에 처한다는 규정을 가리킨다.로 엄단한다고 하였으나 이것은 그렇게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정부내에서 시세와 인정에 따라 말을 빌려 타는 것을 용인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말을 빌려 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말 한 필을 하루 빌리는데 거의 40필이나 든다”218)≪中宗實錄≫권 89, 중종 34년 정월 기해.라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군사력 증강에는 아무 도움도 없으면서 빈한한 군사들은 말을 빌리는데 더욱 피폐해지고 오직 말을 빌려주는 자들만이 이익을 본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중종 15년 정부내에서 騎·卜馬 중에서 복마는 폐지하고 기마만 세우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쉽게 합의를 보지 못하다가 선조 16년(1583) 병조판서 李珥에 의해서 복마가 폐지되었다.219)≪光海君日記≫권 106, 광해군 8년 8월 기해. 그후 기마까지 폐지되어 기병이 말이 없는 보군이 되어 군역에 임했던 것은 임진왜란 직후였다.220) 金鍾洙,<17세기 軍役制의 推移와 改革論>(≪韓國史論≫22, 서울大,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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