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4. 군역제도의 붕괴
  • 4) 방군수포제

4) 방군수포제

앞에서 대립제의 성행과 번상보병의 납포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정병에는 번상하는 정병 외에 각 지방의 鎭營에 머물러 防戍하는 정병이 있었다. 이를 留防正兵 또는 鎭軍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정병 외에 지방군 병력으로는 諸浦에 머무는 수군이 유방정병과 거의 비슷한 수를 차지하였다. 성종 6년(1475)의 군액 정수를 나타낸 앞의<표 2>에서 보면 정병이 72,109명, 수군이 48,800명이며, 정병 중 번상정병은 27,620, 유방정병은 44,484명이다. 번상과 유방은 원칙적으로 상호 교체하도록 하였지만 번상정병과 유방정병이 고정되어 버리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이러한 지방군의 경우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근무하였기 때문에 군역의 문란이 서울보다 훨씬 심하였다. 즉 지방군은 번상병의 대립보다 더 일찍 지휘관인 兵使·水使·僉使·萬戶와 그 아래의 관속들에 의하여 이른바「放軍收布」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254) 李泰鎭, 앞의 글(1968), 249∼252쪽 참조.「방군수포」라는 것은 지방의 각급 지휘관들이 군역 복무를 하러 온 군사를 放歸시키고 그 대가로 布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지방군의 경우 군사에 대한 모든 감독지휘권이 지휘관에게 맡겨져 있었으므로 특별한 감시가 없는 한 이러한 방군수포의 불법행위는 쉽게 자행될 수 있었다. 또 군사들도 군역에서 방귀되면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으므로 이익이 되는 것이 없지 않았다.

지방군의 대립 현상은 번상병의 그것보다 더 일찍 나타나고 있었다. 세종 26년(1444) 慶尙節制使와 水軍處置使 등에게 내린 교서에서 “水陸의 軍이 혹은 冒名代戍하거나 혹은 納貨代身하거나 혹은 관리가 다른 일로써 사역한다”255)≪世宗實錄≫권 106, 세종 26년 9월 기묘.고 지적한 것과 신분증명을 위한 圓牌 착용의 실시 등은 그러한 경향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후 차츰 방군수포 현상도 나타났다. 문종 즉위년(1450)에는 각 浦의 만호와 천호 등이 당번의 선군이 입번하지 않으면 ‘月令’이라 하여 1개월당 포 3필 또는 미 9두를 징수하기도 하였다.256)≪文宗實錄≫권 4, 문종 즉위년 10월 경진. 이러한 부분적·산발적인 경향은 성종 때 급격히 불어났다.

성종대에 접어들면서 ‘어느 포 만호가 방군수포하여 이를 자신의 이익으로 삼는다’라거나 ‘어느 포 만호 아무개는 방군수포하여 그 벌어들인 면포가 얼마나 된다’라는 사례는 이 시기≪成宗實錄≫에서 수없이 나타나고 있다. 방군수포의 초기적인 발생형태를 보면, “선군 立番이 고되어 一朔의 役價를 만호에게 주면 만호 역시 이득이므로 선군을 많이 放縱하게 되니, 양자가 서로 편하게 여겨 고소하는 자가 없다”257)≪成宗實錄≫권 142, 성종 13년 6월 임자.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이 점점 심하게 되어 성종 23년 평안도 병마절도사 吳純이 1,234명의 군사를 放軍시키고 미·포를 징수한 혐의로 臺諫의 탄핵을 당했을 때, “赴防軍士를 冬除라 하여 방군시키고 미·포를 징수하는 것은 평안도의 예사이며 오순이 처음으로 한 바가 아니다”라는 사신의 평이 있을 정도였다.258)≪成宗實錄≫권 265, 성종 23년 5월 계미. 이 당시 정부내에서 지방관의 비리에 대한 탄핵은 수없이 나타나고 있다.

지방군의 방군수포는 처음에는 군사의 편의를 위한 점이 없지 않았으나 얼마가지 않아 지휘관은 사리축적을 위하여 이를 강요하고 있었다. 이들은 “수군 一分의 闕이 만호·첨사에게는 一分의 利가 되고, 十分의 궐은 만호·첨사에게 十分의 利가 된다”259)≪中宗實錄≫권 88, 중종 33년 9월 경자.라고 표현되듯이, 군인들이 군역 근무에 빠지는 것을 오히려 자신의 이익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군인들이 부방 근무에서 빠질 경우 만호·첨사들은 자신의 심복을 군인들 집으로 보내어 布貨를 징수하여 착복하였다. 이것은 결국 지방군의 허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근래 각 포 수군이 역이 무거워 逃散하는 자가 태반이다”260)≪中宗實錄≫권 2, 중종 2년 2월 기축.라고 하는 바와 같이 지방군은 피역 저항을 감행하였고, “첨사·만호 등이 군졸을 侵漁하여 번가를 거두어 들이니 유방하고 있는 군사가 없으며, 병영·수영 등의 大鎭에도 유방하는 자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261)≪中宗實錄≫권 93, 중종 35년 9월 병진.라고 하여 지방군의 방어실태는 지극히 허술한 실정이었다.

栗谷 李珥는 그의<萬言封事>에서 군정 개혁의 첫번째 항목으로 지방군의 방군수포를 들고 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제도적 결함에서 찾고 있다. 즉 병사·수사·첨사·만호·權管 등의 관직은 설치되어 있으나 이들에 대한 녹봉제도가 마련되지 않아 이들 지방관들이 士卒들에게 모든 경비를 얻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경국대전≫에 의하면 지방재정에 있어서 주현 등의 관아는 지방관의 祿으로 주어진 衙祿田, 빈객의 접대를 위한 公須田, 부족한 관아경비를 보충하는 官屯田이 있으며, 諸營鎭에는 아록전·공수전이 없고 다만 관둔전만이 있었다. 군사 지휘관들의 녹봉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고 지방재정내에서 적당히 해결하도록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록전·공수전 등은 모두 행정관 겸 군사지휘관인 수령들의 몫으로 돌아가고 그 아래 첨사·만호들은 일정한 녹봉이 없이 자신들의 임의적인 조달로 경비를 마련케 하고 있었다.

이에 이들 첨사·만호는 방군수포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중종 39년(1544) 홍문관 부제학 宋世珩은 그의 상소에서 “첨사·만호는 군사를 수탈하는 것으로 재산을 늘리고 관청을 시장으로 삼아, 뇌물로 자리를 얻으면 그것을 종신토록 생계로 삼아 방군수포하여 집으로 실어나르는데 거리낌이 없다. 비록 이름은 武籍에 올라 있으나 소행은 장사꾼과 같다”262)≪中宗實錄≫권 103, 중종 39년 5월 갑자.라고 그 실정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지방관 임명시 “某鎭의 將은 그 가격이 얼마이고 某堡의 官은 그 가격이 얼마이다”라는 말이 공언되고, 그들에게는 ‘債帥’라는 별칭까지 붙어 있다고 하였다.263) 李珥,≪栗谷全書≫권 5, 疏箚 2, 萬言封事.
債帥란 돈을 주고 장수가 된 사람을 일컫는다.

각 지방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던 방군수포의 현상은 이와 같이 불법적·음성적으로 시행된 채 끝내 번상보병의 경우처럼 布價의 공정 등이 취해질 수 없었다. 중종 36년의 대립가 공정 및 그 징포 절차상의 개혁 등에서도 지방군은 제외되었다. 동일한 정병 또는 수군이었지만 이들에게 동일한 시책을 적용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지방군 納布의 공인은 곧 국방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군수포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 마련없이 이를 방기하여 둠으로써 지방군은 허약하게 되었다. 이는 동시에 조선 초기 국방체제의 근간인 鎭管體制의 허설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金鍾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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