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5. 국제교역의 발달과 마찰
  • 2) 여진과의 무역
  • (2) 공무역

(2) 공무역

여진은 조공을 통하여 회사·상사품을 받았으나, 이것만으로는 생필품 등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려웠다. 이에 여진은 끊임없이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그래서 명이 요동에 馬市를 둔 것처럼, 조선도 貿易所를 두어 국가의 감시 아래 공무역을 허락하였다. 무역소는 태종 6년(1406) 5월에 鏡城과 慶源 두 곳에 설치되었다. 여진인은 무역소뿐 아니라 서울의 野人館에 머물면서도 무역을 하였다. 야인관은 세종 20년(1438) 北平館으로 명칭을 개칭하였다. 무역소와 야인관에서 무역하는 것을 허락한 것은 생필품 구입을 허용하는 대신, 변경의 소요를 예방하고 여진의 동태를 살피기 쉬운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이들을 회유·복속시키기 위해, 추장에게 관직을 주기도 하였다.307) 李炫熙,<朝鮮前期 來朝野人의 政略的 待遇에 대하여>(≪史學硏究≫18, 1964).

무역소는 태종 10년 2월에 우디캐인 金文乃·葛多介 등이 경원을 침략한 사건을 계기로 폐지되고 말았다. 무역소는 4∼5년 정도밖에 존속하지 않았으나, 고려시대 保州·定州 榷場의 후신으로서, 조선 후기 會寧·경원의 北關開市나 평안도 中江開市의 전신이 된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308) 李仁榮, 앞의 책, 31∼42쪽.
李炫熙,<對女眞貿易-對野人 交涉政策의 背景->(≪韓國史論≫11, 國史編纂委員會, 1982), 312쪽.
북평관에서는 공식적인 무역 외에 관리자인 房守나 시전상인이 여진인과 결탁하여 밀무역을 하기도 하였다.

무역소를 통하여 여진에 소금·철 등 생필품을 수출하는 대신, 여진의 모피를 비롯한 토산물이나 말 등을 수입하였다. 공무역은 대개 무역품의 교환비율이 정해져 있었으나, 여진과의 무역에서는 그 비율이 어떠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여진과의 무역은 경제적으로 큰 이익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경제적 요구를 충족시켜 줌으로써, 복속시키는 것이 용이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았다.309) 홍희유, 앞의 책, 178쪽. 국가의 통제가 약화되거나 여진과의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공무역이 수시로 폐지되었으며, 그 결과 사무역은 더욱 발달하여 갔다.310) 金九鎭, 앞의 글(1995), 355∼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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