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5. 국제교역의 발달과 마찰
  • 2) 여진과의 무역
  • (3) 사무역

(3) 사무역

15세기까지는 여진 추장을 주대상으로 하는 공무역이 중심이고, 사무역은 부수적이었다. 여진족이 변경을 자주 침략·약탈함에 따라, 16세기 이후에는 공무역은 현저하게 줄어들고, 사무역이 크게 발달하였다.

수출품은 면포·저포·마포·금·은·농기구·식기·종이·쌀·콩·술·鹽醬 등이 중심이었다. 여진은 옷·식품 등 생필품과 철제 농기구 등을 수입하였다. 여진에서는 철이 거의 생산되지 않았으므로, 철은 무기·농기구·일용기구 등의 원료로서 가장 중요시된 물품이었다. 철 가운데 농기구·가마솥을 만드는 무쇠(水鐵)는 수출을 허용하였으나, 무기를 만드는 시우쇠(熟鐵, 正鐵)는 금하였다. 이러한 금지조치로 무기 등 철물을 밀무역하는 자가 증가하였다. 철을 수입하는 한편, 철 생산기술도 배워가 철제품 자체를 생산하기까지 하였다. 농경이 발달하면서 농경에 필요한 耕牛와 철제 농기구를 많이 수입해 갔다. 사무역을 통해 수출된 소·말이나 철물은 여진이 농경사회로 넘어가는 데 큰 촉매역할을 하였다.

수입품은 모피·말 등이 중심이었다. 군사용 말은 공무역으로도 수입되었으나, 사적으로 비싼 값에 수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말을 교역하면서 금지물품까지 매매하여 폐단이 심해지자, 성종대 후기에는 사무역을 금지하였다. 모피는 여진의 토산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물품이었다. 모피로는 貂皮(담비가죽)·土豹皮·土皮·虎皮·熊皮·狸皮·海豹皮·海猪皮·海牛皮·海狗皮·襲鼠皮·靑鼠皮·紅鼠皮·黃狂皮 등을 들 수 있다.

사무역 발달을 크게 촉진시킨 것은 특히 초피 수입이었다. 성종초까지는 담비가죽옷(貂裘)이 주로 궁중 안에서 사용되었다. 초피가 널리 유행한 것은 성종 5∼6년(1474∼1475)경부터였다. 담비가죽옷을 입지 않으면 함께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할 정도였다. 초피는 대부분 소·말·철제품을 주고 수입하였다. 초피무역을 주도한 사람은 邊將과 수령 외에 ‘興利之徒’·‘謀利者’라 불리우는 상인이었다. 이들 상인은 권세가와 결탁하여 활발한 무역활동을 하였다. 초피 수요의 증가로 값이 폭등하여, 모리배들이 北道에 구름처럼 모여든다고 할 정도였다.311) 이상 사무역의 내용은 다음의 글을 참고하여 요약·정리하였다.
홍희유, 앞의 책, 180∼182쪽.
金九鎭, 위의 글, 360∼362쪽.
李仁榮, 앞의 책, 43∼46쪽.
李鉉淙,<對明關係>(≪한국사≫9, 국사편찬위원회, 1973), 445∼447쪽.
河內良弘,≪明代女眞史の硏究≫(京都;同朋舍出版, 1992), 625∼637쪽

초피는 평안도·함경도에서 공물로 바쳤다. 그러나 생산량이 한정되어, 5진(회령·鍾城·穩城·慶興·경원) 주민은 소·말·농기구 등을 팔아, 여진에서 초피를 사서 바쳤으므로 많은 폐단을 일으켰다. 초피무역의 발전은 北邊 주민의 생활을 점점 궁핍하게 만들었다. 초피 수요가 급증하자, 여진인은 소·말·철제품을 얻기 위해 늘 초피를 준비해 두면서 교역을 요구하였다. 초피값의 폭등으로 초피 1장 값이 큰 소 1마리 값 정도나 되었다. 초피를 공물로 상납하기 위하여, 京商에게서 구입하는 경우도 있었다.312) 韓相權, 앞의 글, 465쪽.

이처럼 변방 주민의 폐단이 심해지자, 중종 때는 소·말·철제품을 私賣하는 사람을 처형하는 등 초피무역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초피의 국내수요가 계속 증가하였으므로 단속 책임을 맡은 변장·수령의 암묵 아래 초피무역은 더욱 발달하였다. 명종 때 와서는 중앙 재상의 수탈까지 가중되어 북변 주민의 궁핍은 더욱 심각해졌다. 재상의 주구와 변장·수령의 수탈 때문에 몰락한 주민들 중에는 여진이나 중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사람도 늘어났다.313) 초피무역은 河內良弘, 앞의 책, 596∼637쪽을 참고하여 요약·정리하였다.

5진 부근에 살던 城底 야인들이 성안에 살던 조선인과 교역함에 따라, 성저의 교역이 활발하였다. 조선에서는 원칙적으로 사무역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진의 사무역을 엄금하였다. 그러나 사무역은 後市로 점점 성행하였고, 淸나라가 수립된 뒤 인조대에는 회령의 개시가 성행하여 互市로 공인되었다.314) 金九鎭, 앞의 글(1995), 357∼358쪽. 여진과의 무역은 국가의 강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증가하여 함경도를 중심으로 한 국내상업 발달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여진도 조선과의 무역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많은 이득을 얻었으며, 기술·문화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315) 홍희유, 앞의 책,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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