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4년 4월 대마도주 宗材盛이 죽자, 새 도주 宗義盛의 도서를 받기 위해 宗盛明이 조선에 파견되었다. 제포·부산포 항거왜인은 종성명에게 사정을 호소하고, 代官 宗盛親에게 부탁하여 무장봉기를 계획하였다. 종의성은 200여 척의 선단을 파견하여, 3포 항거왜인의 폭동을 도왔다.325) 田中健夫, 앞의 글(1985), 971쪽. 중종 5년 4월 제포·부산포의 恒居倭酋 大趙馬道 등 4천∼5천여 명이 제포·부산포를 공격하는 대규모의 폭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삼포왜란이다. 삼포왜란은 15일 만에 진압되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측에서 272명이 피살되고, 민가 800여 호가 불탔으며, 일본측에서는 선박 5척이 전파되고 300여 명이 참살되었다. 이 난이 발생하자 조선과 대마도와의 통교는 일시 단절되었으며 삼포왜란은 조선 전기 조일관계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326) 中村榮孝, 앞의 책(上)(1965), 714∼720쪽.
田中健夫, 위의 글, 971쪽.
河宇鳳, 앞의 글,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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