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이 진압된 지 1년 후 일본막부에서는 국왕사로 승려 弸中을 파견하여 강화를 제시하고, 대마도와의 통교 재개를 요청하였다. 조선에서는 통교단절이란 강경론도 나왔으나, 조건부로 화의에 응하였다. 붕중이 강화교섭을 하는 중에, 대마도주가 주모자의 斬首來獻, 피로인 송환 등 조선측 요구조건을 이행하였다. 조선도 통교단절로 동남아시아산 후추·소목의 수입이 곤란하게 되자, 완전한 단절을 바라지 않았다. 이에 중종 7년에 壬申約條를 체결하여 교역재개를 허락하였다.327) 池上裕子,<戰國の群像>(≪日本の歷史≫10, 東京;集英社, 1992), 154∼155쪽.
河宇鳳, 위의 글, 280쪽. 약조는 ① 3포에서의 일본인 거주 불허, ② 대마도주 歲遣船을 50척에서 25척으로 반감, ③ 島主 歲賜米豆를 200석에서 100석으로 반감, ④ 도주 特送船制의 폐지 등 9개조로 되어 있었다. 삼포왜란 전에 비해 교역조건을 대폭 제한한 것이다. 약조의 실시로 접대비용이 줄고 일본인의 이익이 줄었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328) 中村榮孝, 앞의 책(下)(1965), 111∼142쪽.
河宇鳳, 위의 글, 280∼281쪽.
李鉉淙, 앞의 책, 285∼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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