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5. 국제교역의 발달과 마찰
  • 3) 왜변의 발발
  • (4) 삼포왜란 이후의 왜변

(4) 삼포왜란 이후의 왜변

임신약조 이후 세견선 수는 삼포왜란 이전의 210척에서 60척으로 줄었다. 교역의 규모가 축소되자 대마도주는 세견선의 증가, 대마도내의 수직인·수도서인의 복권과 증가 등을 요구하면서, 무역상의 이권을 대마도에 집중시키려고 하였다.329) 田中健夫, 앞의 글(1985), 972쪽. 중종 16년(1521) 8월에 제포 1곳 외에 부산포를 추가하고, 동왕 18년 9월에는 세견선수 5척을 증가시켜 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종 39년 4월에 왜선 20여 척이 경상도 蛇梁津을 침략·약탈해 간 사량진왜변이 일어났다. 이 왜변은 삼포왜란과는 달리 왜구의 일종으로, 피해자 수는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일본인의 도항을 일체 거절하는「絶倭論」이 강하게 제기되어, 양국 관계는 室町幕府와 大內·小貳氏를 제외하고는 단교상태가 되었다.

막부와 소이씨의 거듭된 통교재개 요청과 대마도주의 간청으로, 명종 2년(1547) 丁未約條를 맺어 교역재개를 허락하였다. 정미약조는 ①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25척으로 감소, ② 50년이 경과된 수도서인·수직인 접대 폐지, ③ 潛商의 금지 등 6개 조로 되어 있었다. 정미약조는 임신약조를 재확인하면서 규정을 보다 강화한 것이다. 포소는 제포를 폐지하고 부산포 1곳에 한정하였다. 정미약조 체결로 교역은 재개되었으나, 평화로운 통교관계는 더 어려워졌다.330) 中村榮孝, 앞의 책(下)(1965), 170∼181쪽.
李鉉淙, 앞의 책, 294∼297쪽.
河宇鳳, 앞의 글, 281∼282쪽.
田中健夫, 위의 글, 972∼973쪽.

사량진왜변 이후 명종 말년까지 30여 차례의 왜구 침략이 있었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이 명종 10년의 乙卯倭變이었다. 五島지방에 근거를 둔 王直을 비롯한 대해적단이 5월 7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 達梁浦(전남 해남군 북평면)를 침략하여, 전라병사·장흥부사를 살해하고 靈巖까지 침입하였다. 달량왜변에서 퇴각한 해적은 6월말 천여 명의 왜적을 이끌고 다시 제주도 禾北浦를 침입하였다. 이 두 차례의 왜변을 을묘왜변이라 한다.331) 金泰能,<川尾浦의 倭亂과 乙卯倭變>(≪제주도≫36, 제주도청, 1968).
宋正炫,<乙卯倭變에 대하여-康津周邊을 中心으로->(≪湖南文化硏究≫12, 全南大, 1982).
岡本敬二,<乙卯達梁の倭變について>(≪內陸アジア史硏究≫3, 1986).
金柄夏,<乙卯倭變考>(≪탐라문화≫8, 제주대, 1989).
鄭瑛錫,<朝鮮前期 湖南의 倭變에 대하여-乙卯倭變을 중심으로->(≪전통문화연구≫3, 조선대, 1994).
제주왜변이 일어나기 10일 전에 대마도주 宗盛長은 적선에 관한 정보를 보냈다. 그 내용은 천여 척의 적선이 대마도를 습격한 후 90여 척이 셋으로 나누어 조선으로 갔고, 나머지는 잘 단속하여 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보제공은 도주 세견선과 세사미두를 임신약조 이전의 구례대로 회복시켜 줄 것을 조건으로 한 것이었다.332) 田中健夫, 앞의 글(1985), 973쪽.

명종 11년 10월 대마도주의 뜻을 받은 일본국왕사 天富·景轍이 파견되어 10개 조의 약조 개정을 교섭하였다. 그 결과 명종 12년 4월 도주의 세견선 4척을 증가시켜, 원래의 30척으로 복구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 丁巳約條가 체결되었다. 이 세견선의 정액은 임진왜란으로 국교가 단절될 때까지 지속되었다.333) 田中健夫,≪倭寇と勘合貿易≫(東京;至文堂, 1961), 191쪽.
中村榮孝, 앞의 책(下)(1965), 196∼205쪽.
金柄夏,<乙卯倭變이 對日貿易經營에 미친 영향>(≪韓國經營理念史≫, 啓明大出版部, 1994), 453쪽.

조선과의 무역 확대를 추구하려던 일본측의 바램은 마침내 삼포왜란으로 귀결되어, 오히려 무역축소를 지향하는 조선측 입장에 따라 무역량이 반으로 줄었다. 畿內以西·若狹·信濃의 상인·大名들의 배가 잇따라 조선으로 건너갔던 室町시기의 열기는 사라지고, 대내씨 등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침체일로를 걷게 되었다.334) 池上裕子, 앞의 글, 154∼155쪽.

삼포왜란이 일어난 지 10여 년 후인 중종 18년에 명의 무역항 寧波에서 일본인들이 난을 일으켰다. 近畿지역의 堺 상인세력과 細川氏, 九州지역의 博多 상인세력과 大內氏 두 세력의 치열한 무역 쟁탈전이 영파의 난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난을 계기로 대내씨가 對明 감합무역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335) 田中健夫, 앞의 책(1961), 97∼108쪽.
武野要子,<堺と博多>(≪中世史講座≫3, 東京;學生社, 1982), 394∼397쪽.
그러나 이 난으로 말미암아 명종 2년(1547) 이후 감합무역이 폐지됨에 따라, 일본은 큰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일본을 통일한 豊臣秀吉은 대명무역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려고 하였다. 선조 22년(1589)경 그는 왜구를 종식시키는 대가로 감합무역의 기회를 다시 얻는 방안을 검토하였다.336) 藤木久志,≪豊臣平和令と戰國社會≫(東京大出版會, 1985), 218∼238쪽.
李泰鎭, 앞의 글(1994), 178쪽.
그러나 3년 뒤 선조 25년 풍신수길은 이를 포기하고 중국침입을 목표로 전쟁을 일으켰다. 그것이 바로 壬辰倭亂이다. 임진왜란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전국 大名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경제적인 면에서는 일본이 처한 교역상의 열세와 불리함을 한꺼번에 타파해 보려고 한 체제변혁전쟁의 일환이었다.337) 中村榮孝, 앞의 책(中)(1965), 55쪽.
李泰鎭, 앞의 책(1986), 315쪽.
감합무역 부활 요구가 임진왜란의 근본원인이라고 주장한 대표적인 견해로는 田中義成,≪豊臣時代史≫(明治書院, 1925 ; 東京; 講談社 學術文庫 520, 1982) 및 辻善之助,≪增訂 海外交通史話≫(內外書籍, 1930)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이 전쟁이 동아시아 통상권의 변동에 대응하는 동시에 일본국내의 상품유통 진흥과 통제를 도모하려는 織豊政權이 안고 있던 경제적 과제의 해결과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국제적 지식이 없는 豊臣秀吉이 이것을 감합무역의 부활이라는 형태로 대처하려고 처음부터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풍신수길의 영토확대 욕구가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中村榮孝, 앞의 책, 1966, 178∼179쪽).
曾根勇二,<秀吉の朝鮮侵略の眞のねらいは何か>(≪新視点 日本の歷史≫5, 東京;新人物往來社, 1993), 24쪽 참조.

17세기는 세계사적으로「소빙하기」를 맞이하여 자연재난이 심하였다. 소빙하기의 재난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자 만주일대의 여진족이 남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중국·조선과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15∼16세기에 생활기반이 농경으로 바뀐 것이 더욱 사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들의 남하는 1616년에 재위한 누르하치대에는 다소 자제되었으나, 팽창주의적 성격이 강한 태종이 1626년 제위에 오르면서 더 이상 유보되지 않았다.338) 李泰鎭, 앞의 글(1991), 74∼75쪽.

임진왜란에 의해 붕괴되기 시작한 명 중심의 중화적 국제질서는 後金의 성장에 의해 더욱 급속히 붕괴되었다. 여진족 지배층 출신인 누르하치에 의해 건국된 후금은 인조 5년(1627) 丁卯胡亂을 일으켜,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었다. 그후 인조 14년 후금은 국호를 大淸으로 고치고, 丙子胡亂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였다. 조선은 청에 굴복하여 丁丑和約을 체결하고 청과 군신 관계를 맺었다. 이로 인해 명의 책봉체제를 바탕으로 한 중화적 국제질서는 마침내 붕괴되고 말았다.339) 孫承喆, 앞의 책, 229∼236쪽.

<金東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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