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1. 사림세력의 성장기반
  • 1) 사림의 경제적 기반

1) 사림의 경제적 기반

사림의 경제적 기반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말선초 향촌사회의 변화에 대한 구체적 검토가 있어야 한다. 여말선초의 향촌사회의 변화는 고려 후기 이래 정치·사회·경제적 변동과 함께 군현제와 지방통치체제의 개편과 정비에 따른 鄕·所·部曲의 소멸과 任內의 直村化,344) 李樹健,≪朝鮮時代 地方行政史≫(民音社, 1989). 토지의 사적 지배권의 발달에 따른 재지사족의 광범한 존재, 儒佛교체에 따른 재지세력의 불교적인 시설과 기반의 인수, 北虜·南倭와 기타 전란·기근으로 인한 流移民의 대량 발생 및 새 선진농법의 수용에 따른 재지사족들에 의한 임내 또는 외곽지대에 대한 활발한 지역개발이란 사실 등을 들 수 있다.345) 李樹健,<古文書를 통해 본 朝鮮朝 社會史의 一硏究>(≪韓國史學≫9,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7).

고려 전기 이래 광범하게 존속했던 屬縣과 향·소·부곡 등은 후기 이래 승격과 소속의 변동, 혁파 등으로 인해 점차 소멸의 길을 걸었다. 그 시기는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고려 후기부터 여말까지, 제2기는 15세기 전반, 제3기는 임란을 전후한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에는 무신집권, 원의 지배, 북로·남왜 등 내외정세의 격변으로 外官의 증설과 향·소·부곡의 소멸현상이 나타나고 한편으로는 權臣·入朝宦寺들의 청탁으로 임내가 무질서하게 승격되기도 하였다. 특히 몽고의 침입과 왜구의 창궐은 임내의 土姓吏民의 대규모 이동을 유발시켜 조선 초기 군현제 정비를 보다 용이하게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제2기에 오면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 지방제도가 확립되면서 당시까지 잔존했던 속현과 향·소·부곡이 정리되고 여말에 무질서하게 승격된 임내가 새로이 정비되어 갔다. 즉 영세한 主縣을 다시 속현으로 환원시키고, 수개의 小縣을 병합, 하나의 주현을 만드는 작업이 15세기에 걸쳐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 결과 잔존했던 속현은 임란을 전후하여 직촌화하면서 面里制로 개편되었다. 향·소·부곡의 직촌화과정은 속현보다는 그 시기가 훨씬 앞서서 진행되었고 15세기 후반까지 잔존했던 향·소·부곡도 16세기에 와서는 모두 직촌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각종 임내의 소멸은 이제까지 그 곳을 장악·지배했던 土姓吏民을 流散시키고 그들의 향촌지배기반을 박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시대의 지방행정은 임내의 경우 토착이족(鄕吏·長吏)에 의해 邑治의 중심에 위치한 邑司를 발판으로 발동되었던 것이며 향촌사회의 지배권도 읍치지역을 장악한 그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의 각 군현 古跡條에 실린 廢縣 및 향·소·부곡 등의 소재지를 현지 답사해 보면 실제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는 군현과 각종 임내를 막론하고 그 구역의 유래가 강인하게 후대까지 존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둘째는 고을의 邑格高下와 주읍·속현 및 향·소·부곡의 구분은 그 위치가 당시 농업생산성의 우열, 농경지의 廣狹과 대체로 비례한다는 사실이다. 즉 大邑의 읍치보다 다소 협소한 곳에 중소군현의 읍치가 있으며 그보다 더 열악한 곳에 향·소·部曲司가 있었다. 따라서 읍격의 고하는 동시에 그 곳을 본관으로 한 土姓勢의 대소·강약과 대체로 비례하였다. 여기에서 바로 본관의 우열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며 각기 토성들의 上京從仕나 사족화에도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고려초 이래 지방관청의 소재지인 동시에 그 고을 토성이민의 집거지였던 읍치지역은 15세기 이전에 이미 그 나름대로 개발되어 있었다. 주읍의 읍치는 임내의 그 곳과 외곽지역에 비해 비교적 넓은 면적의 농경지를 보유하였고 그 위치가 대개 하천의 중·하류유역에 해당하여 토질이 비옥하였다. 더욱이 당시의 보편적인 농법인 休閑法과 直播法하에서는 16세기 이래 移秧을 전제한 水稻作 재배 적지인 산간·계곡지대에 비해 농경이 편리하고 수확량도 많이 올릴 수 있었다. 또한 읍치지역은 왕권의 대행자인 수령의 직할 감독하에 있어 量田과 徵稅체제가 임내나 벽지·오지의 외곽지대에 비해 철저했다고 볼 수 있다. 이곳 토지는 각종 職役田을 비롯한 公田과 土豪的 위치에 있던 토성이민의 사유지로 구성되어 있어 여말선초 이래 신흥사족이 새 농장을 설치하거나 새 터전을 마련할 소지가 없었던 것이다. 수령의 직할통치하에 있고 또 토성이민의 장악하에 있던 읍치지역은 여말 이래 농업생산성 향상을 위한 官民의 노력이 경주된 결과 오지·벽지에 위치한 속현이나 향·소·부곡 등 임내지역보다는 개발이 훨씬 앞섰던 것이다.

대체로 고려 후기까지 토착향리·장리들의 장악하에서 미개발된 상태로 있었던 임내지역은 고려 후반 이래 조선 초기에 걸쳐 기성사족의 낙향과 재지사족의 확산에 따라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갔다. 한편으로 인구의 증가와 개간, 새 농법의 수용과 移秧法의 보급은 각 주읍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오지·벽지의 개발을 촉진시켰다. 그 결과 이러한 지역은 이앙을 전제한 수도작 재배지로서 또는 漁鹽(해안)과 임산지 및 別業·書院 설치의 적지로서 列邑의 재지세력이 주목하는 대상이 되었다.

한편 신흥사족들은 새로운 선진농법을 수용하면서 지역개발에 주력하였다.346) 李泰鎭,<14, 5세기 農業技術의 발달과 新興士族>(≪東洋學≫8, 1978).
―――,<16세기의 川防(洑)灌漑의 발달-士林勢力 대두의 經濟的 背景 一端->(≪韓㳓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1981).
金容燮,≪朝鮮後期農業史硏究≫(一潮閣, 1977).
李樹健, 위의 글, 29∼57쪽.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왕조의 사대부층은 대농민시책과 대향촌시책에 있어서도 朱子의 사상과 시책을 모범으로 하려고 하였다. 신왕조를 개창한 사대부들은 주자의 이상을 실제 정치에 적용하여 과전법을 제정 실시하고 적극적인 권농책과 향촌안정책을 추진해 갔다. 세종을 비롯한 역대 군주들의 勸農策과≪農事直說≫의 반포, 姜希孟의≪衿陽雜錄≫, 申氵夙의≪農家集成≫등에서는 주자의 勸農文에서 제시한 이상향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깃들여 있었다. 15세기에 와서 농서의 편찬, 농법의 개량 및 농경지의 확대정책은 주로 영남출신 인사들에 의해 추진되었는데 특히 이들은 이앙을 전제한 ‘苗種法’과 川防(洑) 축조를 적극 건의하였다.347) 李樹健, 위의 글. 이하 서술은 이 논문을 주로 참고하였다. 15세기초 이앙법은 주로 경상도와 그 인접지역인 강원도 일부지방에서만 시행되고 있었으나, 임란 때의 日錄인≪瑣尾錄≫에 의하면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에서도 直播하여 苗가 난 뒤 묘가 성글면 총밀하게 자라고 있는 곳에서 拔秧하여 그 묘를 성근 곳에 이식하는 방법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후 17세기초에는 이 시기 선진농법을 대변하는 柳袗의≪渭濱明農記≫에서 ‘還種秧法’·‘秧糞法’·‘養秧法’·‘養乾秧法’ 등의 항목을 설정하여 이앙과 관계되는 새 농법을 채록한 바 있다.

이러한 이앙법을 비롯한 선진농법은 여말 이래 신흥사족 및 재지사족의 노력에 의해 추진되었으며 이와 함께 川防灌漑法과 人糞·家畜糞의 활용, 퇴비제조와 같은 施肥法도 이앙법의 보급과 궤를 같이 하면서 발달해 갔다. 특히 이앙법은 관개수리를 전제한 농법이기 때문에 그것의 보급은 필연적으로 수리시설의 확충을 가져오기 마련인데 종래의 堤堰에 대신하여 천방(보)의 축조가 16세기 이래 재지사족들에 의해 활발히 추진되었다. 제언은 천방에 비해 工役이 훨씬 많이 들고 규모가 적어 조그만 한재에도 쉽게 고갈되었으므로 수전에 물을 안전하게 공급해 줄 수 없었다. 이에 이앙법의 보급과 함께 사림파에 의한 천방축조도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신흥사족 또는 재지사족들에 의한 南中國의 선진농법과 농서·목면의 전래 및 우리의 독자적인 새 농서편찬과 농법개발 등은 그들로 하여금 재지적 기반을 다지는 한편 정치·사회적 세력의 성장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즉 선진농법을 활용하여 향토를 적극 개발함으로써 그들의 세력도 함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지사족들은 강의 상류와 중류유역 및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크고 작은 지류와 산간 계곡을 따라 卜居하거나 농장을 개설하였다. 이렇게 개설된 농장은 앞에서 언급한 여러 선진농법을 활용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구비한데다가 하천이나 계곡의 물을 이용하여 관개할 수 있어 한해가 적었고 또 河床이 낮기 때문에 홍수와 같은 수해가 적었다. 또한 재지사족들은 대개 중소지주였으므로 비록 평원 광야지대는 아니더라도 자기들의 농지획득의욕을 충족시키는 데는 크게 부족함이 없었다.

한편 이러한 곳은 대개 避兵·避世하는 데는 유리한 자연지세를 갖추었고348) 李重煥,≪擇里志≫八道總論, 慶尙道 및 卜居總論, 山水 참조. 한재와 수해를 동시에 최소로 줄여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학문을 닦고 유한한 정경을 선호하는 사림파의 성향에 맞았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곳은 대개 背山臨水하여 각종 농산물과 땔감 및 부식용의 淡水魚를 쉽게 조달할 수 있었다. 외관상 이러한 거주지는 교통이 불편하고 관청과의 거리가 멀다는 데서 취락의 적지가 아니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중세사회하에 있던 재지사족들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면이 장점이 되기도 하였다. 안팎으로 노비가 있어 항상 시중을 들고 또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었으며 관청과 격리되어 있는 것도 그들에게는 오히려 번잡한 시정의 분위기와 관권의 감시 및 관리의 침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소지주였던 재지사족의 田民(토지와 노비)은, 대지주였던 在京勳戚·관료의 토지와 노비가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거주지를 중심으로 한 通婚圈 내에 분포되어 있었다. 사족의 재산은 크게 노비와 토지·가옥 및 기타 가재도구로 구분되며 재산상에 있어서 토지와 노비의 비중은 시대에 따라 한결같지 않았다.

사족의 재산 증식방법으로는 첫째 父·母·妻邊에서 전래되는, 즉 상속과 분배 및 기타 친척으로부터 수증하는 경우, 둘째 卜居와 개간에 의한 새 가옥과 전답의 확보, 셋째 이러한 자산의 기반 위에서 매득하거나 증식하는 경우 등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祖業계승과 자녀균분상속제하의 혼인에서 증식되는 것으로, 이는 家勢와 명망 또는 貴婚과 富婚에서 가산이 축적되는 경우이며 名門들의 복거나 지역개발의 경우는 둘째에 해당된다. 그들은 父祖 傳來의 세거지를 떠나 자신이 새 터전을 잡거나 처향·외향을 따라가서 이주하였는데 그러한 곳은 대개 피병·피세에 적합하며 배산임수하여 山水勝景이 있었다. 또한 그들은 내외조상의 배경과 현지 外官의 관권비호하에 無主地·陳荒地를 수령으로부터 立案을 받거나 影占하기도 하며 개간가능지를 찾아서 새 전답을 확보하기도 하고 廢寺의 토지와 노비를 冒占하기도 하였다. 첫째와 둘째에서 축적된 재력으로 다시 長利나 商行爲를 통하여 토지와 노비를 계속 증식시켜 나갔던 것이다.

특히 당시 양반들의 노비를 통한 상행위는 주목할 만하다. 당시는 농업과 현물을 위주로 한 봉건경제하에 있어 상업유통은 침체하고 자본축적이 빈약함으로써 産地와 소비지에 따라 상품의 가격에 격차가 심했다. 따라서 일정한 자산을 가진 사족들은 幹奴들에게 상술과 갖가지 利殖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고 상행위를 시켜 막대한 이득을 올리게 했다. 계절에 따른 곡물과 布木 가격의 등락을 고려, 作米 또는 作木하여 그 차액을 얻는다든지, 곡물과 魚鹽을 교환하는 행위, 과실·소채·약재 기타 생활용구 등을 지방 場市를 통해 거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사례는 吳希文·趙靖·鄭維翰·李聃命 등의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담명일기에 의하면, 이 가문은 내륙(石田)에 거주하면서 하도나 동해안 쪽에 솔거노비를 보내 어염을 구입하여 수로·육로를 통해 운반해 와서 등짐·우마차에 싣고 내륙 각지의 장시 등을 통해 米·米牟·稷·小豆·포목·과실 등과 교역하였다. 특히 貿鹽은 당시 웬만한 가문이면 모두 소규모로 행하고 있었다. 기호학파의 成渾도<答安邦俊書>에서 海陸産物의 조달과 貿販, 농업생산성과 風氣를 고려하여 卜居地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각종 分財記와 토지·노비관계 明文을 종합적으로 고찰해 보면 조선 전기는 토지보다는 노비에 더 많은 비중이 두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노비는 당시 사족들의 사회·경제적 생활에 있어서나 재산의 생산성·수익성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다.349) 이러한 현상은 15, 6세기 財産文書上에서도 확인된다. 그래서 훈구파나 사림파 또는 재조·재야세력을 막론하고 엄청나게 많은 노비를 갖고 있었다. 성종 때 永膺大君의 노비수는 “만 인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350)≪成宗實錄≫권 251, 성종 22년 3월 계묘.고 하였고 洪吉汶·柳漢 등의 노비도 천여 口나 되었던 것이며, 승려 惠敬은 자기 노비를 龜巖寺에 시납했는데 그 노비도 번식하여 수천 구에 달했다고 하였다.351)≪太宗實錄≫권 11, 태종 6년 6월 갑신 및 권 13, 태종 7년 2월 경자.
≪文宗實錄≫권 12, 문종 2년 2월 병진.
李孟賢(성종 때 부제학) 부처의 노비는 700여 구에 달하였고 柳義孫(세종 때 예조판서) 남매가 나눠 가진 그 부모의 노비도 381구나 되었다.352) 李樹健 編著,≪慶北地方 古文書集成≫(嶺南大 出版部, 1981), 266·273·281쪽. 일반적으로 재지사족들의 가문에서도 노비가 보통 수백 명은 넘었다.

在京權貴들의 노비는 토지와 함께 거의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데 비하여 재지사족들의 노비와 토지는 주로 거주지를 중심으로 부근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353) 金容晩,<朝鮮時代 在地士族의 財産所有形態(1)>(≪大丘史學≫27, 1985) 참조. 노비의 증식방법도 토지와 비슷하게 자신의 공훈과 관직을 매개로 하여 획득하기도 하고 부변·모변·처변 등에서 分衿·和會·別給형식으로 전래된 것도 있으며 구매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확보한 노비는 노비 신분 내지 소유의 世傳法에 의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는가 하면, 소유노비의 奴妻婢夫라는 良賤交婚에 의해서 더욱 증식되어 갔다. 흉년·기근·전란 등으로 인한 救恤노비도 노비획득의 한 방편이었다.354) 李樹健, 앞의 책(1981).

私家의 노비 상속은 토지와 함께 자녀균분을 원칙으로 하였다.355) 士族들의 토지·노비상속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金容晩,<朝鮮時代 均分相續制에 關한 一硏究>(≪大丘史學≫23, 1983) 참조. 국왕의 입장에서는 사족전체의 보호와 권익을 위하여 조상 전래의 토지와 노비가 자녀에게 균분되도록 종용하였는데, 그것은 권력의 집중을 예방하듯이 富의 집중을 방지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왕권의 안정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지배세력을 대표한 사족 전체의 지지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며 사족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는 자녀균분상속제가 무엇보다 요망되었던 것이다. 家産의 상속규정에 있어서 조·부모가 자손에게, 외조부모가 외손에게, 처부모가 처에게 許與 또는 別給하는 데 제한을 두지 않는 대신 혈연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즉 ‘孫外與他’해서는 안된다는 강한 관념을 견지하였다. 財主는 조상의 유산이 대대로 혈족자녀에게 世傳되기를 바랐고, 법제적인 면에서도 그것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조업을 계승할 자녀 및 내외손 가운데 혈손이 없을 경우에는 使孫(4촌까지)에 傳係되었고, 출가녀가 자녀가 없이 사망했을 경우에는 특별한 사전조치가 없는 한 그녀가 가져온 재산은 친정으로 환속되었다.356)≪經國大典≫권 5, 刑典 公賤. 한편 토지·가옥·노비 등 조상의 유산을 放賣하는 행위를 불효로 간주하였는가 하면 부득이 매각할 경우에는 내외자손 사이에 매매 또는 교환하기를 바랐다.

재주가 자녀에게 노비와 토지를 分衿할 때는 대체로 분할주의를 지켜 분배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가령 여러 자녀에게 각처에 산재한 노비와 토지를 거주 지역별이나 노비호 단위, 소재지 전답별로 배정하지 않고 각처 소재의 토지와 노비를 세분하여 자녀 수대로 분할·분급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민분급방식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번잡하고 불편한 것 같지만, 재주의 입장에서는 조상의 유산이 자손 이외의 사람에게 전계되는 것을 예방하고 자기자녀가 공동 연대의식을 갖고 관리한다는 데서 위험부담을 그만큼 감소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며, 노비주의 입장에서 노비의 족적 유대를 약화시키고 공동관리에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조치였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한 신분계층으로서 노비의 자기보호 역할을 사전에 봉쇄하여 도망과 같은 그들의 신분상승을 위한 운동 등을 약화시키는 데 의도가 있었다.357) 李樹健, 앞의 글.

사족의 노비지배체제가 확고했던 조선 전기에는 노비가 토지에 비해 생산성과 수익성이 훨씬 높았다. 따라서 노비는 사족의 수족으로서 또는 중요한 재산으로서 그것의 多寡가 家運의 성쇠에 직결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족의 禮俗과 체통을 유지하는 것도 모두 노비노동의 바탕 위에서 가능하였다. 使喚·居家·處鄕·농경·길쌈·상행위 등 그 어느 경우도 노비 없이는 사족으로서의 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집권세력과 재야사림이 일반 政論에 있어서는 의견이 상반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노비문제에 한해서는 양자의 이해가 거의 일치하였다.

노비 수의 증감은 대체로 왕권과 집권력의 강약에 비례하였다. 15세기 전반기의 국가적 良多賤少策에 의하여 줄어들었다가 그후 훈구세력의 비대와 재지사족의 성장에 따라 15세기말부터는 다시 증가하여 당시의 전체 인구 가운데 노비층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였다.358) 成俔은≪慵齋叢話≫에서 “我國人物 奴婢居半”이라 한 바 있다. 광해군 원년(1609)도 蔚山府戶籍臺帳에서 인구통계가 가능한 6개 面의 것을 정리해 보면 良人 이상이 51.4%, 賤人이 48.6%로서 公賤이 12.9%, 私賤이 35.7%였다. 家內奴婢는 上典內外의 분신과 같은 존재로 가내사역과 잡역은 물론 幹奴·庫直 등으로 행세하기도 하였고, 외거노비는 상전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묘지기로서 墓山을 수호하고 墓位土를 경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자식 노비의 재산은 그 소유주에 귀속되었고(記上), 노비가 개간한 토지는 동시에 그 소유주의 것이 되기도 하였다.359) 上典과 奴婢의 생생한 主奴관계는 吳希文(≪鎖尾錄≫)과 趙靖(≪壬亂日記≫), 李聃命, 鄭維翰 등의 일기를 통해 노비들의 구체적인 활동과 존재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재지사족의 전답은 재경훈척세력과는 달리 공신전과 賜牌地는 별로 없고 衿得·매득 및 개간에 의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재경훈척가문의 토지는 노비와 함께 그 분포지역이 광역화했다면 재지사족의 전답은 財主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한 통혼권 내에 분포되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재경권귀와 재지사족 사이에는 그들의 토지·노비소유체제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선초 이래 훈구세력들은 관직과 권력을 이용, 토지·노비를 축적한데다가 기존 토지와 노비의 유지에도 항상 집권세력과 관권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여기에서 재경관인들과 京在所와의 긴밀한 관계가 성립되었다. 사족소유의 토지·노비가 父邊·母邊·祖母邊·曾祖母邊·妻邊 및 본관·출신지·任官地 등으로 전래 또는 획득된 것과 마찬가지로 경재소도, 재경관인들의 토지·노비 소재지와 같이 연고지별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체제가 바로 재경관인들이 서울 및 근기지방에 살면서 전국에 산재하다시피한 토지와 노비를 관장하여 효과적인 收租·收貢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경관인들은 인맥·학맥·혈연·지연 또는 동료적 결합에서 각기 소유 토지·노비의 소재지 수령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관권의 협조와 경재소 및 유향소와 연결된 상태하에서 도망노비의 추쇄와 外地의 토지·노비에 대한 수조·수공체제를 원활히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세가 몰락하거나 실세 또는 낙향하게 되면 기존 토지·노비의 소유체제가 붕괴되고 그 노비는 그 틈을 타서 상전을 바꿔 비호를 받거나 도망가서 신분향상을 꾀했던 것이다. 16세기 이래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함께 왜란과 호란을 겪은 17세기부터는 사족의 토지·노비소유와 그 지배체제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혁이 있었다. 즉 사족의 경제적 비중이 노비에서 토지로 옮겨왔고, 재지사족의 확대로 종래의 不在地主가 재지지주로 전환되었으며, 종래의 노비노동에 대신하여 노비의 佃戶·雇工化 내지 양민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과정에서 경재소는 마침내 광해군 4년(1612)에 완전 혁파되었다.360)≪光海君日記≫권 49, 광해군 4년 정월 기미 및 권 58, 광해군 4년 10월 경인.

사족의 토지·노비 소유체제는 이 양자가 항상 유기적인 관련하에 賜與·기증되거나 분금·매매·교환되었다. 일정한 토지에 그 관리인과 경작인이 반드시 붙어다니듯이, 고려 이래 공신전과 사패지 지급에는 꼭 노비가 함께 지급되었다. 이처럼 私家의 재산 분금에도 반드시 일정량의 토지와 함께 노비가 분급되었다. 각종 분재기상에는 노비의 이름과 전답, 경작지의 명칭이 기재되어 있는데 양자를 비교해 보면 서로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전답매매명문의 분석에서 밝혀지듯이 사족들은 조상으로부터 전계받은 유산을 어떤 필요가 있어 방매할 때는 ‘孫外與他’하거나 ‘손외방매’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견지하여 매매가 주로 분재자의 혈통을 이은 내외 친척간에 이루어졌다. 물론 예외가 많았지만 조선 전기의 사족가문에서는 대체로 이러한 원칙이 지켜졌다. 그런데 17세기부터는 내외양변의 재산을 분급받은 당사자 또는 그 당사자의 자녀나 내·외손 사이에서 전답의 상환행위가 많아졌다. 상환의 이유가 바로 ‘먼 곳에 경작이 불가능’, ‘거주지 부근 전답을 대신 구매’라는 경우처럼 종전의 부재지주에서 점차 재지지주화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사족간의 토지매매행위는 실질적으로 사고 파는 경우보다는 각자 편의대로 거주지 중심의 토지를 서로 교환하는 데 주안점이 두어졌다. 그것은 농업생산성의 향상과 재지사족의 재산증식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도 있으나 17세기 이전에 비해 토지·노비의 분포범위가 그만큼 축소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족의 외지전답은 대개 幹奴나 佃戶에 의해 관리되고 경작되었으니 집약적인 영농과 효과적인 수조체제가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면을 시정한 보다 효율적인 토지경영책이 바로 외지전답을 거주지 중심으로 집적하는 데서 성취될 수 있었다.

사족의 토지집적에는 무엇보다 양천민의 것을 매입 또는 겸병하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양인의 경우는 대개 還上(환자)·장리상환, 병역수행상, 부채상환, 기근 또는 艱難 등의 이유로 자기 전답을 부근에 사는 사족에게 방매하였다. 더구나 凶荒과 기근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당시에 일정한 재산을 갖고 있던 사족의 입장에서는 적은 재화로써 많은 토지를 매득할 수 있었다. 천인의 경우도 양인과 마찬가지로 飢寒을 벗어나기 위해서, 또는 부채나 身貢의 독촉에 못이겨 전답을 방매하거나 상납(記上)했던 것이다.

재지사족들은 여말선초에는 閑良으로 존재하면서 과전법하에서 外方軍田을 수급할 수 있었으며,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田地와 노비를 갖고 거기에다 매득·개간·겸병 등의 수단을 통하여 중소지주로서의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한편 중앙정계에서 낙향하는 재경관인들도 당시 가족제도와 자녀균분상속제에 의하여 각기 외향과 처향으로 가서 안착할 수 있었다. 또 재지사족들은 유불교체기에 편승하여 廢寺의 토지와 노비를 影占하기도 하였고, 소유노비로 하여금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지를 확대해 나갔다. 이러한 개간가능지는 노동력만 있으면 쉽게 얻을 수 있었고 외거노비를 시켜 경작케 함과 동시에 일정한 노비신공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면 15세기 대표적인 몇몇 사림파 가문의 경제적 기반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361) 李樹健, 앞의 책(1979), 184∼195쪽 참조.

① 金宗直家門 : 이 가문은 善山의 土姓吏族에서 여말에 비로소 사족으로 성장하였고 따라서 그의 父子代 이전에는 관직과 혼인으로 재산을 획득하지는 못하였다. 그의 父 金叔滋는 密陽의 토성사족으로 일찍이 상경종사한 朴弘信의 女壻가 되면서 선산에서 밀양의 처가로 이주하였고, 장인이 죽자 그의 田宅奴婢를 아내가 상속하게 되었다. 또한 김숙자는 大小科를 거쳐 내외관직을 역임하면서 소수나마 토지와 노비를 확보해 나갔다. 김종직은 밀양 외가에서 생장하였고 출사 후에는 선산과 밀양을 왕래하였으며 결혼 후에는 처가를 따라 金山에 농장을 두었다. 그의 아들 緄도 처가의 재산을 분금받아 開寧에 전택을 마련하였다. 그외 이 가문은 당시 사족이 그러하듯 매득·수증 또는 卜居란 수단을 통해 家財를 증식할 수 있었다. 김종직가문의 고문서 분석에 의하면362) 金容晩,<佔畢齋 金宗直家門 硏究>(≪嶠南史學≫1, 嶺南大, 1985). 16세기 중반 전체 재산은 노비 100여 구, 전답 수백 두락지 정도로 나타나며 이후 확대되는 추세였다. 이들 재산의 분포지는 16세기말까지 전답은 처가·외가 등 2∼3개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노비 또한 이와 유사하였다.

② 鄭汝昌家門 : 정여창은 河東縣吏의 7세손이며, 그의 증조 鄭之義 때 본관지 하동에서 咸陽으로 처음 이주하였다. 증조모는 寶城宣氏로, 그 가문은 여말에 사족화하면서 본관지를 떠나 상경종사하였으며 그 일부는 함양에 이주하였다. 이 가문은 15세기 훈벌가로 성장하였는데 정여창의 증조가 하동에서 함양으로 옮긴 것도 처향을 따라온 것이다. 이 가문의 경제적 기반은 선조전래의 전택·노비에다 증조모·조모 및 모변의 재산이 첨가되었다. 또한 그의 처가 定宗의 子인 桃平君 李末生의 女였으니 京中 재산 중에는 처변의 재산이 또한 많았다. 그의 증조모가 훈벌가에서 왔고 父가 순절한 대가로 국가적인 포상을 받았고 또 그가 종실의 사위가 되었으니 누대에 걸쳐 내외변으로부터 전래된 토지와 노비가 많았던 것이다. 이처럼 그는 一門의 노비가 ‘幾百口’였다고 할 정도로 부호가였던 것이다.

③ 金宏弼家門 : 김굉필의 先世는 본래 瑞興土姓으로 고려 후기에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증조 金士坤이 처향을 따라 玄風에 이주하면서 드디어 현풍인이 되었다. 그의 조부 金小亨은 개국공신 趙胖의 사위였으니 처변으로부터 분금된 재산이 많았다. 서울 貞陵洞私第는 바로 父祖 이래 전래해온 京中田宅이다.

성종 3년(1472)에 그는 陜川郡 冶爐縣의 順天朴氏의 사위가 되면서 처가를 따라 야로현에 이주하였다. 그의 가문은 누대에 걸쳐 명문사족과 혼인하였으니 부조 이래 현달하지 않아도 경제적 기반은 공고했다. 김굉필의 전택·노비도 그의 연고지에 산재하였다. 그는 경중의 정릉동과 好賢坊에 주택이 있었고 세거지 현풍을 위시해서 야로(처가)·星州 伽川(처외가)·城南·迷原 등지에 토지와 노비가 있었다.

④ 金馹孫家門 : 그의 先世는 본관 金海에서 향리를 세습하다가 6대조 金管代에 와서 비로소 사족으로 성장하였으며, 그의 고조대에 淸道人이 되었다. 조부는 한성부윤 李暕의 女壻였으며, 父는 龍仁士族 李宋順(工曹典書)의 曾孫女壻가 되어 처가를 따라 용인에 우거하기도 하였다.

이 가문의 전택·노비도 청도(부가)·김해(본관)·용인(외가)·木川(처가) 및 경중 등지에 흩어져 있었다. 이것은 당시 자녀균분상속제하에서의 혼인관계에 의한 결과였다. 이 가문은 당시 재지사족들과 마찬가지로 농장뿐만 아니라 精舍와 樓亭 같은 건물도 여러 곳에 건축하였는데, 이는 당시 그들의 경제력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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