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1. 사림세력의 성장기반
  • 2) 사림의 사회적 기반

2) 사림의 사회적 기반

사림파 형성의 사회적 배경을 구명하는 데는 먼저 각 읍 土姓의 존재실태와 土姓吏族의 사족화과정 및 사족과 이족의 분화, 재지사족의 혼인 등 재지사족의 존재양상이 밝혀져야 한다. 나말여초에 걸쳐 형성되었던 각 읍의 토성은 바로 후삼국시대 그 지방을 대표하던 재지세력으로, 그 군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 호족은 왕건과의 연결과정에서 왕건의 麾下將相이 되거나 새로 姓을 하사받기도 하고 혹은 본관지를 떠나 상경종사하면서 귀족과 관인이 되었고 재지토착의 토성은 상급향리층을 구성하여 군현을 지배하였다. 이러한 토성의 분화는 고려초부터 재경관인과 재지세력으로 나누어졌다. 국가는 중앙정부와 지방 군현과의 사이에 事審官制와 其人制를 이용하여 재지세력을 조종하였다. 기성세력인 재경관인들은 고려왕조의 진전과 끊임없는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세력교체가 빈번하여 지배세력의 신진대사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에 신진세력을 공급해 주는 자원은 다름 아닌 지방군현을 지배하고 있던 재지토성이었다. 군현토성이 상경종사하여 귀족과 관인이 되었지만 이들은 동시에 계층분화를 계속하고 있었다.363) 李樹健,≪韓國中世社會史硏究≫(一潮閣, 1984).

지방은 이미 고려 이전부터 州·郡·縣과 村 또는 鄕·部曲 등의 구역으로 구획되어 그 구획마다 각기 토성이민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지역적인 구획과 토성은 각기 그 형세에 있어서 대소·강약의 차가 있었다. 한 군현이 주위의 지역을 흡수함으로써 대읍이 되고 많은 군현과 향·소·부곡을 보유함으로써 강력한 토성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군현구획의 광협과 재지세력의 강약은 서로 비례하였다. 그리하여 당초에는 대등했던 군현이 이제는 主邑 또는 領·屬縣으로 분화되고 같은 토성이 한쪽은 지배하는 위치에 있게 되고, 다른 한쪽은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은 마침내 토성의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읍세가 큰 곳의 토성들은 그 관내에 많은 任內土姓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여초부터 상경종사한 세력은 주로 이들 주읍의 토성들이었다.

군현토성이 역대 지배세력의 공급원이라 하지만 거기에는 질적인 차가 많았다. 종전의 九州·五小京이나 고려시대의 京·州·府 등 大邑의 토성들은 귀족과 관인들을 계속 배출시키고 있는가 하면, 어떤 군현은 수백년이 경과하도록 이렇다 할 관인을 내지 못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왕경과의 거리의 원근과 외관의 유무에 따라 현저한 차가 있었다. 재지토성의 진출과정을 살펴보면 대체로 개경에 가까운 군현일수록 상경종사의 시기가 빨랐고 외관이 있는 주읍일수록 그 고을 토성의 진출이 활발하였다.

역대 지배세력의 변천과정은 재경세력이나 재지세력을 막론하고 계속 교체되어 갔다고 볼 수 있는데, 대체로 중앙에서는 세력교체가 빈번한 반면 지방에서는 완만하였다. 재경세력도 그 일문이 고관요직을 장악하는 데서 계속 權貴의 지위를 유지해 나갔듯이, 재지토성들도 그 고을 戶長層을 확보하는 데서 一邑의 영도권을 계속 지닐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초 이래 상경종사하는 가문은 대개 군현 호장층의 자제였고 후세의 명문거족의 시조 가운데는 호장이 많았다.

고려 이래 군현은 邑治(邑內)·직촌 및 임내로 구획이 편성되어 있었다. 군현의 읍치는 관아와 邑司를 중심으로 관청시설이 있고, 토성이족을 비롯하여 官屬과 시정배가 거주하는 異姓雜居지역이었다. 임내는 본읍의 축소판에 불과하였다고 보이며 직촌에도 村姓을 중심으로 異姓이 혼성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대체로 15세기까지도 일반 촌락에는 두 개 이상의 성씨가 혼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후세에 일반적으로 호칭되는 사족 중심의 동족(同姓)부락은 17세기 이후에 보급되었다.

여말선초의 호적이나 읍지를 통해 살펴보면 재지토성의 통혼은 대개 同邑土姓간의 신분內婚과 동성동본간의 族內婚이었다. 토성이족이 상경종사하여 재경관인이 되면서부터 통혼권은 확대되었다. 각 읍의 호장층은 正朝戶長 또는 徵稅調役 등 업무로 경향간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고 서울에서 其人·京邸吏 등 각 읍 이족간의 접촉이 빈번해지자 현직호장과 재경관인간에 인간관계를 맺는 경우가 있었다. 또 이족에서 사족화하면서 동성혼을 기피하고 遠婚하거나 ‘동성불혼’의 원칙을 지키려는 경향이 점차 일반화하였다. 특히 여말선초에는 자녀균분상속제가 철저히 지켜지고 外孫奉祀가 흔한 동시에 친손·외손의 차별이 별로 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가족제도와 사회적인 관념으로 인해 사족이 거주지를 옮길 때 대개 처향을 택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동족부락으로 성장하였지만 16세기 이전까지는 대개 子와 壻가 동촌에 거주하였고 그 결과 친가·외가 또는 처가의 일문이 한 촌락을 점거하였던 것이다.

사림파의 가계는 대부분 군현의 토성이족에서 유래하였고 사족화의 시기는 가문에 따라 선후의 차가 있지만 대체로 14세기에 가장 많았다. 우리는 17세기 이후의 관념으로 여말선초를 관찰하려는 데서 과오를 범하고 있다. 첫째 당시의 향리존재를 과소평가하고 중앙집권체제와 외관의 통치체제를 지나치게 강조하며 지방 토성의 出仕路 가운데 과거에 지나치게 비중을 많이 두는 감이 없지 않다. 이와 함께 향리세계도 호장층과 하급향리층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15세기까지도 호장층의 자제는 비록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관인화의 길이 열려 있었다. 지방토성은 재경세력이 교체될 때마다 진출이 활발하였다. 무신간의 빈번한 정권쟁탈과 정권의 불안정, 신분제도의 문란, 원의 지배 및 끊임없는 북로남왜로 인해 군현이족은 사족화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들은 과거를 통해 진출하기도 하였고 麗元관계에서 출세하기도 하였으며, 군공으로 첨설직을 얻어 品官으로 향상하였다. 사림파의 가계를 분석해 보면 工曹典書·版圖判書 등 첨설직과364) 李樹健, 앞의 책(1979), 158∼160쪽.
鄭杜熙,<高麗末期의 添設職>(≪震檀學報≫44, 1978).
令同正·史同正·軍器監 등 影職과 檢校職 및 軍職·雜職 등을 발판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신분을 고양시켜 나갔다. 그래서 여말을 경계로 하여 군현이족의 사족화가 활발히 진행되어, 그 때까지 그 고을의 이족을 대표하던 토호들은 그 기회를 최대한으로 포착하여 품관이 되었으며, 이들은 선초에 閑良계층으로도 나타났다. 이에 반해 현임 향리들은 현직에 만족하다가 미처 시대의 대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신왕조에 들어와서는 사족화의 기회를 끝내 얻지 못하고 계속 이족으로 남게 되었다.

여말선초에 걸쳐 사회신분면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변화는 재지사족이 광범하게 존재하게 된 점과 토성에서 사족과 이족이 확연하게 구분되어 간 것이라 하겠다. 무신란을 계기로 田柴科體制가 붕괴되면서 토지의 사유화와 농장의 발달이 일반화되어 갔다. 또 기성 관인들의 낙향생활과 지방의 중소지주층이라 할 수 있는 향리 자제의 대거 관계진출은 마침내 지주적 성격을 강하게 지닌 신흥사족을 창출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조선왕조의 중앙집권화와 군현제의 정비에 따라 외관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족의 지위는 현저히 저하되어 갔고 그들의 권한도 계속 위축되어 갔다. 또한 고려 후기 이래 지방향리 자제들의 급격한 관계진출과 첨설직의 남발은 결과적으로 관료군의 포화상태를 유발시켜 여말에 오게 되면 기성사족만으로도 內外官僚기구를 충당하고도 남았기 때문에 더이상 새로운 관인의 배출을 바라지 않게 되었다. 향리자제의 계속적인 관계진출은 기성사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의 독점적인 특권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므로 이족의 새로운 관계진출을 봉쇄한 데서 사족과 이족의 분화가 점차 명확해져 갔다.

조선 초기까지도 ‘吏’職은 文·武와 함께 3대 출사로의 하나였다. 그러던 것이 양반지배체제의 확립에 따라 文·吏의 업무 한계가 점차 명확해지면서 사족과 이족의 분화는 더욱 촉진되었다. 사족과 이족의 분화에는 또한 세대의 소원에서 오는 친족 관념의 희박과 향촌사회의 변모에서도 그 배경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말까지만 하더라도 부자형제 사이에 향리와 관인이 공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종전의 형제·숙질관계가 三從·四從관계가 되고 有服之親이 이제 路人과 다름없는 관계가 되면서 양자의 구분은 더욱 확실해졌다.

고려시대에는 군현토성에서 분화된 재경관인과 재지이족이 제각기 자기의 위치를 지키면서 부여된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양자의 공존이 가능했다. 그러나 여말부터 상경관인들의 낙향생활과 재지적 기반구축 및 그로 인한 재지사족의 광범한 존재로 인해 결국 중앙의 관직에만 의존하지 않고 지방에 적극 관심을 가지면서 비로소 留鄕所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유향소의 설치 운영과 함께 社倉·鄕規·鄕案 등이 사족과 이족을 더욱 분화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양자의 분화 현상은 15세기로 넘어오면서 더욱 촉진되어 같은 토성 출신이면서 한쪽은 상경종사하여 재경관인이 되고 다른 한쪽은 다시 이족과 재지사족으로 구분되고 더 나아가서는 양반과 중인이란 계층 분화로까지 발전되어 갔다. 이는 또한 양반은 관리직인 ‘官’을, 이족은 행정실무인 ‘吏’事를 담당한다는 데서 소관직무까지 확연히 구분되어 갔다. 양자의 구분은 다시 그들의 주거지까지 구분짓게 되었다. 대체로 여말까지는 재지토성이 각기 읍치에 거주했으나 그 이후부터 이족(향리)에서 벗어나 사족화하면서 읍치의 외곽 촌락 또는 부근의 임내지역이나 인근 타읍의 외곽지대로 복거하거나 이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당시 가족제도와 재산상속제도에도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즉 男歸女家婚制의 보편화와 자녀균분상속제가 철저히 지켜진 사회에서 자녀 嫁娶를 시킬 때 딸을 출가시킨다는 의미보다는 사위를 영입한다는 뜻을 더 강하게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娶妻와 동시에 처가로부터 처남과 동일한 양의 妻財를 분금받았던 것이며, 그 분금받은 재산은 처가소재지나 그 처가의 연고가 있는 곳에 분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결혼과 함께 분가하여 처향으로 이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 결과 고려말 이래 재경관인이 낙향하거나 기성사족이 거주지를 옮길 때는 대개 처향과 외향을 택했던 것이다. 한편 임내의 이족들은 그 임내의 소멸과 동시에 주읍 향리에 흡수되거나 다른 지방으로 유망함으로써 기존의 토착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고 그러한 곳은 신흥 재지사족들의 세력권화하였다.

한편 재지사족들은 여말선초부터 지방사회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군현에 따라 그 鄕邑을 영도할 수 있는 문벌과 학덕을 갖춘 사족의 父老·子弟에 의한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그 조직은 고려 이래 邑司를 구성했던 향리들의 ‘壇案’과 같이 조직 참가자의 명부, 즉 향안(鄕錄·鄕座目)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며, 의결기관이면서 鄕射·鄕飮酒禮·養老禮·鄕約讀會 등의 거행과 기타 회의 친목의 장소이기도 한 鄕會 또는 사무소이면서 공동의 집합장이기도 했던 유향소를 갖고 있었다. 향안에는 이른바 ‘世族’이어야 입록할 수 있었다. 세족이란 그 고을에 세거하면서 문벌과 地望을 갖춘 사족이란 의미를 지녔다.365) 鄭經世,≪愚伏集≫권 15, 尙州鄕案題名錄序. 군현토성에서 상경종사했다가 낙향한 가문, 이족에서 재지사족으로 성장한 가문, 타읍·타도출신의 기성사족으로서 이주하여 벼슬·학문·덕행을 갖춘 가문의 인사들이 향안에 들 수 있었다. 대·소과에 응시하거나 仕宦上의 署經에서 결격사유가 없는 그런 가문이 1차대상이 되었으며, 향안을 ‘三參錄’이라 하듯이 父系를 비롯하여 外系와 妻系에 하자가 없는 가문이어야 했다. 이러한 유향소는 재경관인들의 조직체인 京在所와 연결되어 명실상부한 재지사족의 조직체로 존재하였다.

경재소는 신왕조를 창건하는 데 주역을 담당했던 신흥사대부 세력이 이제까지 군현의 지배권을 갖고 있던 향리를 배제하고 재경관인과 연결된 재지사족 주도의 지방통치와 성리학적 향촌사회를 확립하려는 과정에서 유향소와 함께 거의 동시에 중앙과 지방에 각각 설치 운영되었다. 그 조직은 품계에 따라 2鄕에서 8향까지로 한정했다. 경재소는 관할 유향소 임원의 任免權을 가지며 향리규찰과 인재천거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향중 인사들로부터 갖가지 청탁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경재소의 예산은 해당 고을의 유향소나 京邸에서 공급되었다.

한편 이와 동시에 향촌사회에서는 그 운영에 필요한 제규약으로 鄕規·鄕約·洞約 및 각종 契가 조직되어 있었다. 향규는 유향소의 조직과 운영 및 향촌규제에 관한 규약으로, 향안 작성과 함께 여말 이래 재지세력들에 의한 유향소가 설치 운영되자 각 읍별로 제정되었던 것이다.366) 田川孝三,<鄕案について>(≪山本博士還歷記念東洋史論叢≫, 1973).
――――,<鄕憲と憲目>(≪鈴木俊古稀記念東洋史論叢≫, 1975).
――――,<李朝の鄕規について>(≪朝鮮學報≫ 76, 78, 81, 1975, 1976).
이러한 규약은 종래의 향도관계 규정과 함께 실시해 오다가 중국의 향약이 보급되자 종전의 불교적이고 음사적인 의식과 관습이 주자학적 실천윤리로 대체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향규의 향약화 현상을 가져왔다. 사족들은 이러한 규약들을 통해 그들 상호간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지배하에 있던 하층민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재지사족들은 위와 같은 자체 조직과 내부규약을 통해 향촌지배 기반을 다져 나갔던 것이다.

사림의 사회적 기반도 이러한 시대적 추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림파 형성의 사회적 기반은 무엇보다 강력한 토성이 반근 착절하여 재지세력을 대표하던 이족과 사족을 공급시키는 데 있었다. 각 읍 토성들은 고려 후기부터 상경종사를 활발하게 하여 재경관인이 되어 기성세력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타도 출신 사족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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