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1. 사림세력의 성장기반
  • 3) 사림의 교육과 학통

3) 사림의 교육과 학통

사림파의 계보와 같은 학문적인 師友淵源 관계는 시대의 변화와 후세인에 의하여 지나치게 획일화된 감이 없지 않다. 주자학의 보급과정과 사림파의 형성배경은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전개되었다.

조선왕조의 국가통치 이념인 주자학은 安珦·權溥·李齊賢 등 신흥사대부에 의해 수용되어 여말의 成均館과 지방의 鄕校교육을 통해서 보급되었다. 공민왕은 재위 16년(1367)에 성균관을 重營하고 李穡으로 하여금 成均館 大司成을 겸하게 하고 金九容·鄭夢周·李崇仁 등 經術之士를 敎官에 겸직하게 하였다. 이후 성균관을 중심으로 문풍이 크게 진흥되었다.367)≪高麗史≫권 115, 列傳 28, 李穡. 특히 국초에는 진취적인 분위기에다 능력위주의 인재등용책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전국의 사류들이 과거를 거쳐 성균관에 모였고 거기에서 학덕이 인정된 자는 성균관 교관으로 발탁되었다.

한편 중앙의 성균관을 중심으로 새로운 유학 즉 程朱性理學이 진흥되어 재경관인이 그것에 훈도되어 나갔듯이, 지방군현에서는 향교가 많이 정비되고 문과 및 성균관 출신의 문신들이 수령으로 나가서 지방교육을 장려하였다. 여말에 신흥사대부의 대거 등장과 국가의 문교정책 장려로 수령의 직무에 ‘興學校’란 조항을 중시하였고 또 성리학에 훈도된 登科士類들이 수령으로 부임하는 예가 많았기 때문에 지방교육이 발전할 수 있었다. 특히 선초에 오게 되면 재지사족으로 상경종사한 신진사류들은 일반적으로 부모봉양을 위한 ‘爲親乞郡’을 숭상하여 본관지 또는 부모소재읍의 수령으로 나갔다. 15세기 사림파에 속하는 인사들은 대부분 이러한 목적으로 지방의 수령을 역임하였다. 그들은 지방교육을 진작하고 성리학적 사회윤리를 몸소 실천하면서 敎民化俗하였던 것이다.368) 李樹健, 앞의 책(1979).

신흥사대부들은 왕조 교체과정에서 양분되어 하나는 집권세력으로 계속 재경관료가 되었고 다른 일파는 정몽주·이숭인 등과 같이 순절하거나 吉再·元天錫 등처럼 재야세력으로 남았다. 그런데 15세기 전반까지는 전자가 관학을 중심으로 관료양성을 주도하면서 신왕조의 문물제도 정비에 주역을 담당하였다. 이색의 학통을 이은 鄭道傳·權近·河崙 등이 바로 이 계열에 속하였다. 한편 유교적인 정치이념에 투철했던 태종·세종은 적극적인 문교정책으로 이색·정몽주 문하에서 훈도된 하륜·黃喜·許稠·趙庸·尹祥 등을 비롯한 문신들을 文翰과 교관직에 포진시켰다. 또 한편으로는 학덕을 겸비한 文士를 적극적으로 선발하여 성균관과 향교에 배치하였다. 이에 성균관을 중심으로 신흥사대부들이 운집하여 마침내 일군의 성리학파를 형성하였다. 특히 태종은 전왕조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정몽주를 추숭하였다. 정몽주는 여말에 이색이 추허한 대로 당시 사류 중에서 성리학에 가장 정통하였고≪朱子家禮≫에 의거, 家廟를 세우고 喪祭를 받들며 안으로는 五部學堂을 세우고 밖으로는 향교를 정비하였다.

이와 같이 15세기 전반의 교육은 관학이 주도한 종래의 儒佛未分化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程朱의≪四書集註≫와≪小學≫을 교본으로 한 經學 위주였으며 또한 종전의 詩賦 일변도에서 벗어나 經術과 詞章을 다같이 중시하는 실용적인 교육이 실시되었다.

사림파가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한 시기는 훈구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성종대부터였다. 그들의 가계는 전술한 바와 같이 대개 여말의 혼란기에 군현 이족에서 과거·군공 또는 첨설직 등을 통하여 품관으로 신분이 상승된 재지의 중소지주 계층이었다. 그들은 祖先전래의 탄탄한 사회 경제적 기반과 성리학적 소양을 발판으로 향촌사회의 지배기반을 구축해 갔다. 동시에 이들은 절의와 명분을 중시하여 여말의 왕조 교체기에는 낙향하였고 세조의 왕위 찬탈을 불의로 간주하는 공통의 정치적 성향과 학문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

金宗直→金宏弼→趙光祖일파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특징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소학≫을 학문과 처신의 기본으로 삼았다는 것이다.≪소학≫은 주자가 三代의 교육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經史子集의 여러 경전에서 추출 선집하여 편찬한 것으로 유교적인 이상 실현에 가장 적합한 교과목이었다.369) 李樹健,<李朝時代「小學」敎育에 대하여>(≪嶺南大論文集≫2, 1969).

≪소학≫은 제경전에서 立敎·明倫·敬身의 3대 강령에 적합한 내용을 선집한 것이기 때문에 4서와 5경을 유교의 강령이라 한다면≪소학≫은 이 강령을 실천하는 시행세목이라 할 수 있다. 주자학이 안향을 위시한 여말의 신흥사대부에 의하여 수용되고 보급되었듯이≪소학≫은 유교적인 실천윤리를 강조하는 사림파에 의하여 숭상되고 보급되어 갔던 것이다.≪소학≫은 주자학의 수용과정에서≪주자가례≫와 함께 성리학 보급의 2대 수단이었다. 결국 양자의 보급과정은 궤를 같이 하였고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은≪소학≫의 화신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당시≪소학≫을 교육의 기본으로 삼았다는 것이 다른 학파와 구별되는 김종직학파의 특징이었던 것이다. 15세기 사림파가 16세기 조광조일파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어 나갔듯이,≪소학≫교육도 ‘己卯名賢’들에 의하여 정책적으로 더욱 숭상되어 갔던 것이다.

15세기초 관학에 의해 주도되었던≪소학≫장려책은 문교정책의 일환으로 제도적인 차원에서 다분히 형식적으로 관학기구에 의하여 타율적으로 실시되어 제대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반하여 김종직일파에 의해 주도되었던 사학계통에서의≪소학≫교육은 그야말로 실천궁행하는 차원에서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입장에서 실시되었다. 그 결과≪소학≫은 ‘爲己之學’의 기본교재가 되었고 사림파를 훈구파와 구별하여 학문적 내지 교육적으로 특징짓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김종직일파에 의하여 고조되었던 이러한≪소학≫숭상풍조는 戊午·甲子士禍로 인해 한때 침체되었으나 김굉필의 학통을 계승한 조광조일파에 의하여 다시 존숭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교정책의 기본과제로 운용되었다.

≪주자가례≫는 여말의 신흥사대부에 의해 수용되어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정책적으로 권장되었으나, 초기에는 일부 사림파가문에 한해 실시되다가 성종대부터 사림세력의 성장과 함께 확대 보급되어 갔다.≪소학≫교육이 김종직일파에 의하여 주도되어 나갔듯이≪주자가례≫에 의한 喪祭禮의 시행도 이들 사림파에 의하여 솔선 실천되어 갔다. 정도전·권근·하륜·허조 등 집권사대부들의 건의에 의하여 국가가 각종 의례를 제정 실시하고 정책적으로 ≪가례≫를 刊頒하여 家廟를 세우고 상제의식을≪가례≫대로 실천하게끔 導民化俗하려 했지만 그것은 단시일내에 성취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재야사대부인 사림파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실천되어 나갔고, 한편 그들의 솔선수범에 의하여 향촌사회가 따라갔던 것이다.

이러한≪소학≫과≪가례≫등 성리학적 실천윤리의 전국적인 확산과 함께 사림은 점차 확산되어 갔다. 여기에는 특히 각 지방 군현에 사림파 인사가 수령으로 부임하여 지방교육을 일으키고 성리학을 보급시켜 나간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각 군현별로 성리학의 보급과정과 사림파의 형성배경을 살펴보면, 길재가 선산지방에 낙향함을 계기로 이곳에 성리학적 분위기가 먼저 조성되었고 김종직이 선산과 밀양을 왕래하고 함양군수로 재임한 관계로 이 일대에 사림파 인사가 배출되었다. 이와 같이 문풍을 진작시키는 데는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가 거주하거나 수령으로 재임하는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사림의 세계는 길재→김숙자·종직 부자→김굉필·정여창으로 이어지는 단선의 좁은 범위만은 아니었다. 성리학이 결코 사림파의 전유물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사림파도 또한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그 일파에만 국한시킬 수 없다. 정몽주의 학통 계승문제에 있어서 그것이 길재로 이어져 私學계통으로 내려온 줄기보다는 권근·하륜·변계량 등 재경관료와 성균관 내지 집현전으로 이어지는 관학계통의 줄기가 훨씬 굵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학의 교육에≪소학≫을 기반으로 하고≪주자가례≫에 의한 喪祭奉行, 3년상과 廬墓 실행, 闢佛과 淫祀禁斷 등의 ‘爲己之學’과 성리학적 실천윤리는 결코 영남지방에 한정된 것도 아니며 또 김종직일파만이 실행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김종직 당시에는 성리학과 사림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두텁게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말선초에 걸쳐 대표적인 학자나 文士들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충절을 제하면 그들은 정몽주·길재 등 이른바 정통 성리학자의 학문 태도와 처신을 거의 같이 하고 있다. 정도전·권근·하륜·허조·河演·조용·윤상·鄭麟趾·申叔舟·姜希孟 등이 모두 기초적인 교육을≪소학≫에 두었고 벽불과 음사금단을 실행하였으며≪가례≫대로 상제를 봉행하고 있었다.

김종직의 3대 제자라 할 수 있는 김굉필·정여창·김일손의 학문적인 연원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이 김종직의 학통만을 받았다고는 결코 볼 수 없다. 김굉필은 서울에서 출생하여 현풍과 야로 및 성주를 왕래하면서 독서하였고, 金孟性과 교제하면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으며, 內院寺에 들어가 독서하다가 20세가 넘어서 김종직 문하에 들어갔던 것이다. 정여창은 처음에는 李寬義에게 수학하여 성리학을 알게 되었고 나중에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해 오자 비로소 그에게 수학하였으며, 그의 동향인인 兪好仁·趙孝仝·金悌臣과도 일찍부터 학문적인 교류가 있었다. 김일손 형제도 金克一→金孟으로 이어지는 가학을 계승하면서≪소학≫을 비롯한 기초 교육을 가정에서 받았고 외가·처가를 왕래하면서 수학하다가 17세에 처음으로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갔다.

성리학이 기호지방에 보급된 시기는 영남지방의 경우와 거의 같고 농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말선초의 신흥사대부 가운데 영남지방과 인연이 없는 인사 중에서도 성리학을 수용하고 유교적인 실천윤리를 실행하는 자가 많았다. 尹龜生·朴尙衷·李詹·李坡·李克培·金時習·許琮·尹孝孫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상과 같이 사림파의 기반은 15세기에 이미 기호지방에도 보급되어 있었고370) 李樹健, 앞의 책(1979).
李秉烋, 앞의 책(1984).
영남지방에도 김종직일파만이 사림파를 독점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오·갑자사화를 겪으면서 김종직일파는 거의 몰락했지만 직접 연루되지 않은 사족에서 사림파가 공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림파의 성장은 15세기 이래 하나의 시대적인 대세였다. 조선왕조의 지배세력이 사대부였고 그들은 신유학에 철저히 훈도되었으니 그들의 진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위의 양대 사화가 이러한 진로를 잠시 지체시킨 데 불과하였다. 다시 말하면 15세기에 조선왕조는 유교적인 통치체제와 그 통치기구를 운영해 나갈 인적 자원인 사대부가 확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5세기말부터 16세기 중반까지 4대 사화를 차례로 겪었지만, 그것은 훈구파의 몰락과정인 동시에 사림파의 성장과정이었던 것이다. 김종직계통이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으로 이어진 것은 그만큼 성리학과 사림파의 확산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것이 다시 조광조·金安國 등 기묘명현으로 계승되면서 사림파는 마침내 16세기 중반에는 兩界지방을 제외하고 전국에 전파되었던 것이다. 특히 영남지방은 바로 김종직일파의 淵藪였으니 사림파의 성장은 타도에 비하여 가속도로 급진전하였다. 중종 10년(1515)경을 전후하여 김종직→김굉필→조광조일파로 이어진 기묘명현이 집권하자 성리학적 이상을 직접 정치에 이용하여≪소학≫교육과≪가례≫에 의한 유교적인 실천윤리를 정치일선에서 강조하였다. 그 결과 양대 사화로 인해 칩거하던 영남의 잔류사림과 신진사류가 우후죽순처럼 대두하였다. 조광조일파가 바라는 인재는 바로 사림파적 성향의 인사였다. 이들은 김종직·김굉필 등의 문하와 조광조와 교유하던 인사에 많았으니 자연히 영남과 기호지방에서 많이 공급될 수밖에 없었다.

15세기 영남사림파를 16세기에 와서 크게 발전시킨 사람은 金安國이었다.371) 李秉烋,<慕齋 金安國과 改革政治>(≪碧史李佑成敎授定年記念論叢 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上, 창작과비평사, 1990). 그는 김굉필의 제자인 동시에 조광조와는 동문이었다. 그는 기묘명현이 집권할 당시인 중종 13년(1518)에 경상도감사로 재임하면서 도내의 재지사류를 발굴하여 조정에 적극 천거하였고 列邑을 巡歷할 때마다 지방자제 교육과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권장하였다. 그가 천거한 사람은 모두 32명이며 재행을 겸비하고 효제를 실천하는 재지사족으로, 김종직·김굉필의 문도가 많았다. 김안국은 기묘사화 후에도 사림파를 영도해 나가는 위치에 있었다. 李彦迪과 權橃·李滉 등 나중에 영남학파에 속하는 학자들이 그의 거처에 출입하였으니 김안국은 15세기의 영남사림파와 16세기 영남학파와의 교량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孫昭·孫仲暾의 계열에서 이언적이 나오고 권벌·李堣·李賢輔 등의 기반 위에서 이황이 나왔으며, 정여창·김굉필·김일손 등의 학문적 전통 위에서 曹植이 경상우도에서 나왔다. 마침내 이들 학자에 의하여 영남학파가 확립되어 갔던 것이다.372) 李樹健,≪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一潮閣, 1995).

신왕조의 건국을 내심으로 반대하였던 국초의 재야세력과 15세기 중엽 세조의 등극을 내심 불의로 간주하였던 절의파의 계통을 계승한 사림파는 마침내 정몽주→길재→김숙자·종직→김굉필로 학통을 이었고, 기묘사화를 치른 뒤 인종대에 가서는 조광조를 김굉필에 연결시키면서 이와 같은 계보의식이 정설화되어 갔다. 또 기묘명현의 입장에서는 자기들의 영수인 조광조의 학통을 그의 스승 김굉필에 잇고 그것을 다시 ‘東方理學之祖’인 정몽주와 연결시키는 데서 위와 같은 계보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는 16세기 후반 이황·기대승 등에 의하여 하나의 국론으로 통일되다시피 하였다. 또 16세기말에 가서 사림파가 중앙정계를 장악한 후 동방 5현의 文廟從祀論이 성균관을 중심으로 대두되자 성리학 내지 사림파의 학문적인 계보가 道統문제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학문적인 사우연원관계와 계보는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시대의 진전에 따라 후세인들이 자기의 학맥과 지연 내지 자기 당색의 우월을 강조한 나머지 그렇게 도식화하였던 것이다.

위의 사림파에 의해 제시된 계보는 문제가 없지 않다. 먼저 정몽주373)≪高麗史≫권 117, 列傳 30, 鄭夢周.→길재의 관계는 당시의 실정과 거리가 있다. 길재의 학문적인 授受에는 家學을 비롯하여 朴賁·이색·권근 및 정몽주가 거론되면서 그 중에서 정몽주와의 관계가 가장 박약했다고 보이는데 후대의 계보는 정몽주→길재로 정리되었다. 당시 신왕조의 입장에서는 전왕조의 대표적인 충절로 정몽주와 길재를 선정하여 褒崇을 아끼지 않았고 조정의 공론도 양인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이는 물론 태종의 의도와 관련되고 정몽주와 사우관계에 있던 인사가 조정에 포열해 있었다는 데도 이유가 있겠지만 양인의 학덕과 처신이 전왕조의 충절을 대표하는데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정몽주는 끝내 ‘以身殉國’하였고 길재는 ‘不事二君’의 절의를 지켰으며 양인은 나란히≪삼강행실≫의 충신전에 등재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정몽주→길재의 학통관계가 성립되었던 것이다.

다음은 길재와 김숙자와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길재는 여말에 낙향한 후 태종의 부름을 받고 정종 때 잠시 상경한 것을 제하면 줄곧 고향인 선산에서 성리학적 사회윤리를 몸소 실천하면서 지방자제 교육에 전념하였다. 길재는≪주자가례≫대로 관혼상제를 실천하고 주자가 편집한≪소학≫과 程朱集註의 四書를 교본으로 하여 지방자제를 교육하였다. 그 때 동향인인 김숙자도 그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였고 나중에는 향교에서 수업하였다.374) 吉再,≪冶隱言行拾遺≫年譜. 당시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겠다는 여말의 사류들이 길재와 함께 대거 낙향하면서,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자들은 자연히 이들과 연결되었던 것이며 나중에 세조의 등극에서 단종 지지세력들이 다시 여기에 가담하였다.

김숙자는 선산부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는 父祖 밑에서 수학하였고 16세 때에 향교에 출입하였으며, 26세에 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고 세종 원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이후 내외 교관과 수령을 역임하였다. 그는 선산·성주 敎授와 高靈·開寧 현감을 지내면서 길재의 학풍을 전파시켜 나갔다. 그의 宦歷은 대개 미관한직으로 대부분 교수직이었다. 그의 祖 金恩宥는 判官과 司宰令을 역임하였고 父 金琯은 進士출신으로, 그는 어릴 때 父祖로부터 직접 수학한 가학의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인 수학의 기초 위에 다시 鄕先生인 길재의 문하에 나아가 수업하고 다시 향교에 속하였는데 당시 선산부사는 鄭以吾였다. 김숙자는 선산향교에 속해 있을 때는 일반 校生의 모범이 되었고 黃澗현감이었던 尹祥을 찾아가서≪周易≫을 배웠으며, 사마시에 합격한 다음에는 성균관에서 유생들과 경술을 강론하면서 자기 학문을 심화시켜 갔다.375) 金宗直,≪彛尊錄≫下, 先公事業第四.

그의 師友관계를 보면 대·소과 때의 試官을 위시하여 林載(同鄕人, 인척)·길재·趙庸 및 윤상 등을 들 수 있으며 金峙·金彭老·金從理 등의 친족과 동향인 河澹·李孟專·蔣敦義·黃郁·康愼·盧浩 등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이 선산은 김종직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길재와 김숙자를 중심으로 성리학자들이 운집하여 하나의 학문세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김숙자는 가학과 길재를 중심으로 한 사우 외에 재경사대부와 접촉하였고, 권근의 학통을 이은 변계량·허조 등과 성균관을 중심으로 조용·윤상·金末 등과도 교유하면서 학문적 소양을 축적해 나갔던 것이다. 즉 그는 사학적인 기반 위에서 관학을 포용하였으며 재경관인과 재지사족간을 왕래하면서 그의 아들 김종직이 진출할 수 있는 포석을 놓았던 것이다.

김종직은 세종 13년(1431)에 밀양부 서쪽 大洞里에서 출생하여 가학을 전수하였다. 길재의 교육방법을 그대로 계승한 김숙자는 자기의 제자교육에≪童蒙須知≫·≪幼學字說≫·≪正俗篇≫을 거쳐≪소학≫·≪孝經≫·≪大學≫및≪論語≫·≪孟子≫등 순으로 단계적인 과정을 철저히 밟게 하였다. 그는 4서 5경을 父로부터 차례로 배운 다음에 특히≪소학≫을 학문의 기초로 삼았고 어릴 때부터 시를 잘하여 문명이 크게 떨쳤다. 그는 가정에서 또는 부의 任地에서 그의 여러 형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19세에는 부를 따라 상경하여 南學에 입학하였는데 그 때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김맹성과 함께 能如寺에서 독서하였으며 23세 때인 단종 원년(1453)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주역≫등 경전을 탐독하였다. 세조 원년(1455)에 東堂試에 합격하고 그 3년에<弔義帝文>을 지었다. 29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세조의 年少文臣 선발에 李坡·李孟賢 등과 함께 참가하여 이후 학문으로 유명해졌다.

당시 세조는 소장문신들을 天文·風水·律呂·醫學·陰陽·史學·詩學 등 7개 부분으로 분류하여 선발하였는데 김종직은 史學門에 속하였다. 이 7문에 분속된 문신들은 김종직과 같은 재지사족은 얼마되지 않고 대개 훈구세력에 속하는 京華子弟가 많았다. 김종직은 이들과 교유하면서 앞으로의 사림파의 진출에 포석을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김종직은 세조 10년 8월에 이러한 세조의 ‘文臣分隷七學’ 조치에 반대하고 사학과 시학을 제하고 나머지 잡학은 儒者가 힘쓸 바가 아니라고 上奏하여 세조의 노여움을 사서 한때 파직되었으나 곧 복직되었다. 이후 그는 嶺南兵馬評事가 되어 여러 읍을 순행하였으며 세조 13년에는 藝文館副修撰으로서≪世祖實錄≫을 편찬할 때는 記事官으로 참가하였다. 한편 그는 성종 원년(1470)의 재행겸비자 30명 선발에 선정된 바 있었다. 그후 예문관수찬 겸 知製敎에다 經筵檢討官과 春秋館記事官을 겸하고 있다가 養母를 위해 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이 때부터 그의 문하에 학도가 운집하였다. 그는 治郡에 있어서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실행하였고 제자교육에는 길재·김숙자의 교육방법대로≪소학≫을 기본으로 하였다. 또 김종직은 봄·가을로 향음주례와 양로례를 행하고 孝悌와≪주자가례≫대로 喪祭봉행할 것을 권장하였다. 이 때 김굉필·정여창 등이 수학하였다.

김종직은 성종초부터 신숙주·강희맹 등 영남출신의 훈구대신들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고 자신의 학문적인 소양과 시문 및 치군 성적으로 성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를 중심으로 주위에 兪好仁·曹偉 등 당대를 대표하던 문사들이 ‘好文之主’인 성종에게 영합될 수 있었다.

그는 성종 7년에 ‘爲親乞郡’하여 선산부사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이 때 친척과 故舊 등 同府人을 위시하여 각지로부터 그에게 수학하기 위해 학도들이 모여들었다. 성종 초년은 함양군수와 선산부사의 재임기였고 이곳을 중심으로 재지사족의 자제는 물론 遠方에서도 사류들이 來學하였다. 성종 10년 이후 그는 侍從·文翰·銓注의 淸要職을 계속 맡으면서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당시 鄭昌孫·尹弼商·李克培·徐居正 등 훈구대신과 함께 경연에 입시하면서 강론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김종직의 사우관계와 문도들의 성분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그의 학문적 연원 및 배경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父祖 이래의 가학에다 길재→김숙자로 이어지는 선산이란 지역의 성리학적 분위기가 기반이 되었다. 그는 성균관 생활과 경연 侍講 등의 과정에서 재경문신들과 강론하면서 자기 학문을 심화시켜 나갔다. 그의 부친인 동시에 유일한 스승이었던 김숙자에 의하여 김종직의 학문은 자리가 잡혀졌고 선배 또는 동년배의 재경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의 폭이 넓어졌다. 그는 경술과 문장을 겸비하고 성리학적 실천윤리를 실행함과 동시에 詩賦와 詞章에 능하여 일대를 풍미하게 되었으므로, 그의 문하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고 따라서 훈구파에 대칭되는 사림파의 영수로 군림하게 되었다.

당시 사림파의 학문적인 전수관계를 살펴보면, 이는 일단 가학 등을 통해 학문이 성취된 다음에 경향간을 왕래하는 과정에서, 혹은 座主와 門生관계에서, 혹은 사환상의 교유나 학문적인 토론과 질의와 같은 접촉을 통해 사우관계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성균관에 출입하는 유생도 기초적인 교육은 가학이 중심이었다고 본다. 15세기 사림파의 학문적인 전수관계와 사우관계를 살펴보면 바로 가정적인 학문의 전통이 기초가 되었고 거기에다 혈연적인 관계와 지연적인 유대가 서로 얽혀 있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성리학의 수용범위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으며, 서울을 중심으로 각지의 사류가 모여들어 학문세계를 형성하였고 그들은 또한 경향간을 왕래하면서 상호 교유하였기 때문에 학문의 세계와 사림간의 접촉범위는 아주 좁았던 것이다.

김종직의 문인록은 실록과 후세의 문집에 따라 차이가 난다. 먼저 출신지역별로 보면 영남출신과 비영남출신으로 나눌 수 있고, 학문적인 경향에 따라 살펴보면 정통성리학의 입장을 견지한 金宏弼·鄭汝昌 등과, 시문으로 유명하였던 金馹孫·조위·表沿沫·유호인 등이 있겠고 이른바 方外人에 속하는 鄭希良·南孝溫·洪裕孫 등으로 구분된다 하겠다. 또 정치적 성향으로 보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눌 수 있다. 전자에는 비영남 출신과 방외형문사와 宗室출신이 많고 후자에는 영남출신과 처사형인사가 많았다. 김굉필은 한때 그의 사문 김종직의 현실안주 태도를 비판하였지만 자신은 정여창·유호인·조위 등과 함께 온건파에 속하였다.376) 金宗直·金宏弼·鄭汝昌 3인의 문인록에 의거해 그들의 성분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김종직의 문인 59명을 姓貫 및 거주지별로 분류하면 (1) 嶺南姓貫으로 영남거주가 30명, (2) 영남성관이나 타도거주가 6명, (3) 타도성관으로 영남거주가 9명, (4) 타도성관으로 타도거주가 14명이며, 김굉필의 사우 30명은 영남이 15, 비영남이 15명이며, 정여창은 영남과 비영남이 19 : 20명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세조의 등극을 내심 불의로 간주하였던 사림파가 표면상으로는 공통의 정치적 성향을 갖고 있었지만 그 내부는 여러 파로 나뉘었다. 金時習과 남효온 등은 경화자제로서 서울의 분위기에서 생장하였고 홍유손은 현직 향리의 자제라는 데서 처음부터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영남출신 인사와는 성향이 달랐다.

한편 성종대부터는 종실 가운데 시문과 가악에 능하여 당시 대두하고 있던 사림파와 교유하는 자가 많았다. 李深源 부자를 비롯하여 李摠·李賢孫·李貞恩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이들은 종실이란 이유로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학문과 가악을 수련하면서 朝士들과 교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文才가 있으면서도 ‘宗室不任官’이란 국가의 제도에 얽매어 관직에서 배제된 유한계층이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세상을 경시하고 時政과 當路者를 비판하기도 하였으며 이런 연유로 사림파와 연계되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김종직 문도 가운데서도 젊고 재능있는 소장인사는 서울의 분위기에서 생장한 일부 경화자제와 합세하여 훈구파에 전면 도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남효온의<師友名行錄>, 김굉필과 정여창의<사우문인록>을 살펴보면 서로 중복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15세기 사림파의 범위를 말할 때 위의 김종직 문인을 위시하여 김굉필·정여창·남효온 3인의 사우문인록을 포함한다면 거의 누락된 자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사림파가 영남지방에서 형성되어 다른 지방으로 확산되어 나가듯이 김종직의 문인은 그 구성비율이 영남출신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 데 반해 김굉필과 정여창의 문인은 기호지방 출신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15세기 후반에 김종직을 宗匠으로 하여 확립된 사림파는 정치의 公道와 官人의 正道를 내세우면서 당시 세조를 도와 권세를 누리고 있는 훈구파의 권귀화를 비난하였다. 사림파는 대개 재경시간보다는 재야시간이 많고 지방 수령을 역임했기 때문에 농촌의 실정과 민중의 생활상을 누구보다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경제적 기반은 중소지주이면서도 자신들은 청빈한 선비의 생활을 하였고, 자기들의 경작농민과 노비를 地主 대 佃戶 내지 主奴의 관계에서 이해하고 민생안정의 편에서 훈구파와 대결하였던 것이다. 사림파의 대거진출이 마침내 戊午士禍를 유발하였고 그 후 세번의 사화를 통하여 가혹한 탄압을 받았지만 꾸준히 자기성장을 계속하여 16세기 후반에 가서는 결국 사림파가 중앙정계를 장악하는 결과를 이루어 놓았다.

15세기의 사림파는 고려시대의 불교적이고 음사적인 생활양식을≪소학≫과≪주자가례≫에 의한 유교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성리학적 실천윤리와 의리정신을 내세워 훈구세력의 권귀화를 어느 정도 제재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유향소와 사마소를 중심으로 향촌지배체제를 종래의 이족에서 사족 주도형으로 대치시키고 지방교육을 진흥시킴으로써 성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들은 16세기 후반의 사림과는 달리, 아직 중소지주의 위치에 있었고 經術과 詞章 및 吏事(행정기능)를 겸비하였던 것이며 집권층의 秕政을 비판하고 민중의 편에서 제도적 개혁과 민생의 향상을 위하여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역사적 사명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16세기로 넘어오게 되면서 사정은 달라지게 된다. 조선왕조 집권체제의 해이와 함께 그들은 토지와 노비를 증식시켜 가면서 鄕曲을 무단하는 존재로 변질되었다. 학문경향도 성리학의 현실적·정치적 기능이 약화되고 반대로 사변적인 理氣哲學과 번쇄한 禮學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림세력은 확대되어 갔고, 그들의 토지·노비증식책에 의하여 公田의 私田化와 양인의 노비화가 급격히 진행됨으로써 과거의 중소지주가 대지주 또는 지방 토호로 탈바꿈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추세는 결국 자영농민의 몰락과 농촌의 피폐를 초래하고 말았다.

<李樹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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