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2. 사림세력의 진출과 사화
  • 1) 사림의 중앙진출

1) 사림의 중앙진출

우리 나라의 경우 ‘士林’이라는 용어는 여말선초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戊午·甲子士禍를 체험한 후인 중종 때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원래 초기의 사림은 여말선초의 왕조교체와 그에 따른 변동 속에서 향촌에 은거하여 성리학의 탐구에 몰두하던 성리학자들을 주축으로 하되, 좀더 폭 넓게는 약간의 성리학적 소양의 바탕 위에 詞章學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던 儒士까지를 포괄하는 의미를 가졌다. 이처럼 처음에는 독서인층 또는 선비의 무리라는 평범한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사림은 그 일부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집단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면서부터 그 개념상에도 변화를 가져와 오늘날 우리가 정의하고 있는 士林派377) 사림파의 정의에 대해서는 아래의 연구가 참고된다.
李樹健,≪嶺南士林派의 形成≫(嶺南大 出版部, 1979).
李秉烋,≪朝鮮前期 畿湖士林派硏究≫(一潮閣, 1984).
李泰鎭,≪韓國社會史硏究≫(지식산업사, 1986).
란 뜻을 지닌 역사적 용어로 되었다.

곧 재지사족들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金宗直과 같은 인물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어느 정도의 조직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성리학과≪朱子家禮≫의 보급을 통해 현실적인 여러 가지 제도의 개혁을 도모하였고, 그를 통해 자파세력의 확립을 모색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공동의 목표를 지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상호간의 지속적인 접촉을 유지하면서 강렬한 동류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명문화된 규약은 없었지만 성리학적 가치관에 의해 상호 규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사림파는 정치세력으로서 그 역사적 기능을 제대로 행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사림파는 고려 후기 재지중소지주인 향리층에서 진출한 新進士大夫378) 李佑成,<高麗朝의「吏」에 對하여>(≪歷史學報≫ 23, 1964).들이 고려·조선의 왕조교체과정을 계기로 입장을 달리하면서 갈라진 두 계열 가운데 전왕조에 대한 충성을 고집하며 향촌사회에 숨어 학문연구에 전념한 계열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조선왕조의 정통성에 회의를 가지고 향촌에 은거하여 ‘沈潛性理’하는 학문적 자세와 후진 교육활동에 치중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勳舊派 주도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하에서 수행된 사림의 이러한 노력은 향리 주도하의 향촌사회를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사회로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향촌사회는 장차 집권 훈구파에 대응되는 세력으로서의 사림을 배출하는 공급원 역할을 할 수 있었다.379) 李樹健,≪韓國中世社會史硏究≫(一潮閣, 1984), 342∼343쪽.
―――,≪朝鮮時代 地方行政史≫(民音社, 1989), 100∼109쪽.

향촌사회에 은거하여 침잠성리하며 ‘修己’ 지향의 자세를 견지했다고 하더라도 사림은 성리학과의 접촉을 체험한 사대부란 母胎에서 파생된 존재로서 권력지향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 정치·사회적 여건의 향상을 도모하지 않고는 성리학의 이상 구현이 불가능한 만큼, 정계 진출에 전혀 무관심할 수 만은 없었다. 또한 ‘忠臣不事二君’의 명분도 왕조교체를 직접 체험한 세대에 국한하는 것이었으므로, 이들도 결국 수기에만 만족할 수는 없었고 그 이상을 현실정치에 구현하는 ‘治人’의 경지까지를 기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림의 동향과는 달리 조선왕조의 건국을 지지 내지 주도함으로써 공신가문 또는 舊來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훈구계열은 畿湖지방 특히 近畿지역에 근거지를 두면서 정치권력과 경제력에 있어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유교적 통치이념의 기반 위에 세워진 국가의 官人으로서 성리학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마저 거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학문적 관심이나 성과도 嶺南지역 사림의 그것에 못지않았다. 이는 우선 조선 성리학의 연원을 제공한 鄭夢周의 문하에 吉再나 趙庸과 같은 영남 출신뿐만 아니라, 權近·權遇 형제와 같은 기호 출신의 인물들도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다. 또 실제로 李穡이나 권근 등의 학문이 정몽주나 길재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도 아니었다.≪牧隱集≫과≪圃隱集≫에 나타난 그들의 학문적 관심이나 성과는 그 우열을 논할 만한 처지에 있지 못하며, 길재와 권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권근이≪入學圖說≫에서 보여 준 성리학에 대한 관심은 당시의 수준에서는 높이 평가될 만한 것이며, 길재 자신도 정몽주에게서 뿐만 아니라 이색에게서도 사사한 바 있었다. 이처럼 이색·권근 등 기호학파나 길재·조용 등 영남학파 사이에 뚜렷한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뒷날 후자가 성리학의 정통을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권근·이색 등 기호계 사림은 새 왕조에 出仕하여 명분상 절의를 버렸고, 그 문하에 名官은 많았으나 名儒는 배출되지 못하여 학통을 계승할 문인을 얻지 못하였을 뿐더러, 그들의 가계가 그 뒤 계속 훈구가문의 주축을 이룸으로써 재야사림으로부터 상대세력으로 주목받은 결과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리학의 학문적 전통은 있었으나, 그 맥락은 거의 단절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해온 기호지방의 사림은 자연히 영남지방에 대해 깊은 학문적 관심을 지니게 되었으며, 마침내 이 두 지역 사림간의 접촉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들의 접촉은 여러 계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학문의 授受關係가 일반적이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영남지방의 성리학자 가운데서도 그 학통을 유지한 것은 길재→金叔滋→김종직으로 연결되는 경우에 불과하며, 후진 교육활동이 본격화한 것은 김종직부터였다. 그는 세조 5년(1459) 2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이래, 성종 23년(1492) 62세로 죽을 때까지 많은 문인들을 길러냈다. 그의 교육활동은 京職에 종사하던 세조 1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본격화한 것은 성종 원년부터였다.

김종직과 그의 문인인 金宏弼·鄭汝昌의 교육활동은 여러 갈래의 접촉계기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의 접촉계기는 친족 및 인척관계, 동향인 또는 거주지의 근접함, 지방관 재임시, 服喪廬墓時, 在京(從仕)時 등이었다. 이외에 김종직이 고시관으로서 擧子와 문인관계를 맺은 경우도 있었다. 그의 문인으로 파악되어 문인록에 등재된 인물 가운데 崔溥·權景裕·李繼孟·李冑·李黿 등은 바로 이 경우에 속한다. 蔡壽·金詮·申用漑 등은 같은 경우인데도 문인록에서 제외되어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계기나 다른 장소에서 개별적·산발적으로 사제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대의식이 매우 강인하였다. 그들간의 접촉은 대체로 김종직·김굉필·정여창 등 師友가 매체가 되고 구심점이 되어 이루어졌지만, 서로 직접적인 접촉이나 교류가 없었던 경우에도 서로가 매개가 되어 접촉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간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림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지니고, 당시 유일한 정치세력집단으로서의 지위를 누려오던 훈구파에 대해 견제 내지 압력 기능을 행사함으로써 기존세력으로부터 그 상대성을 인정받게 될 만한 수준의 집단이 된 것은 성종 15년 이후이다. 성종 8년 김종직은 善山府使로 있을 때, 그를 방문한 몇몇 門人을 餞別하면서 쓴 詩에 註記한 가운데에서 ‘吾黨’380) 金宗直,≪佔畢齋文集≫年譜, 成化 13년 정유.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 ‘오당’이라는 개념 속에 師友·문인이 느끼는 원초적인 공동체의식 같은 것이 엿보이고 있으나 이는 학문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었고 그들 가운데서 중앙정계에 진출한 인물은 아직 별로 없었다. 성종 13년 김종직은 성종 원년부터 12년간에 걸친 咸陽군수·선산부사 등의 외직생활과 복상기간을 끝내고 京職에 복귀하였다. 이 때부터가 중앙정계에서의 그의 정치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였으며, 그 이전은 향촌교화 및 후진교육 기간이었다.

김종직의 문인과 김굉필·정여창 등의 사우 중에서 문과 급제자와 중앙정계 진출자가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성종 16년부터이다. 즉 성종 원년에서 동왕 15년까지 문과에 급제한 인물은 金訢·表沿沫·曹偉·兪好仁·金諶·楊熙止·金孟性·姜景敍·康伯珍·李義亨·姜謙·周允昌·최부·金驥孫 등 14명이었다. 이 수는 점차 늘어 성종 16년부터 연산군 4년(1498)까지는 朴漢柱·李宗準·권경유·洪瀚·權五福·姜渾·金馹孫·柳順汀·이주·李守恭·이원·이계맹·方有寧·孫仲暾·任由謙·정여창·趙廣臨·김굉필·鄭承祖·安覯·南袞·李穆·鄭希良·康仲珍·李鐵均·任熙載·許磐·趙有亨 등 28명에 달하였다.

요컨대 嶺南士林間, 畿湖士林間, 더 나아가서는 영남·기호사림간의 접촉이 진전됨에 따라 원래의 ‘林下儒賢’이란 비조직적인 사림은 ‘吾黨’의 단계를 거쳐 ‘慶尙先輩黨’의 수준으로, 거기에서 다시 영남·기호를 묶는 ‘사림파’로의 성립이 가능하게 되었다. 곧 영남사림과 기호사림이 각기 지닌 현실적 조건과 기반의 한계가 양자의 相補에 의해 극복되면서 사림파로의 성립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시기 사림파는 김종직의 문인이 주축이 되고 김굉필·정여창의 사우·문인이 그에 첨가된 것이었다.381) 사림파의 성분에 대해서는 李秉烋, 앞의 책, 23∼34쪽 참조. 이들의 문집과≪東儒師友錄≫에 따르면, 김종직의 문인은 65인, 김굉필의 사우·문인은 41인, 정여창의 사우·문인은 47인으로 각각 집계된다. 이들 사이에 중복된 인물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105인으로 집계된다. 이들의 가계를 분석해 보면, 鉅族이 21인(23%)이고, 非鉅族이 55인(60%)에 달한다. 이러한 성향으로 볼 때 사림파에 속한 인물들은 재지사족 출신들로서 훈구가문과는 대조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일반적인 이해와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1급거족 출신 13인(14%) 가운데는 11인이 기호지방 출신으로서 그들이 지닌 여러 가지 유리한 여건과 환경을 거부하고 사림파로 전향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문적 취향이나 현실대응의식 및 자세와 같은 매우 가변적인 하나의 요인이 다른 몇 가지의 고정적인 조건을 극복하고 그 전향을 가능케 한 것이다. 요컨대 이 시기에 성립되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사림파는 비거족계 재지사족 출신이 주축이 되고 소수의 훈구계 가문 출신이 전향하여 가담한 세력이었다.

이 시기 사림파의 거주지는 영남지방출신이 49%를 웃도는 50인으로 집계되며, 나머지 타도 출신이 51%에 가까운 51인으로 집계된다. 그 중에서도 기호지방출신이 47%를 넘는 48인으로서 영남지방세에 거의 필적할 만한 수준이었고, 특히 김굉필의 문인에 있어서는 기호계가 훨씬 우세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성종대의 사림파가 거의 영남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처럼 이해되어 오던 통념이 시정되어야 함을 뜻한다.

사림파는 經學, 특히 성리학의 탐구에 주력하는 세력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인 의미이며, 그것도 그들의 입지가 확고하게 다져진 뒷날의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건국 후 1세기는 성리학 자체의 깊이를 천착하기보다는 그 정착을 위한 기반을 다지는 준비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朱子家禮≫의 보급과 같은 실천적인 면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사림파의 영수로 추앙받던 김종직대에 와서도 크게 달라진 바가 없었음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經術과 詞章을 초목의 根枝와 柯葉으로 비유하여 그 불가분성을 강조하였는데,382) 金宗直,≪佔畢齋文集≫권 1, 尹先生祥詩集序. 이것이 곧 그의 학문이 지닌 과도기적인 양면성이었다. 그의 학문적 성향이 지닌 양면성은 그의 문인대에 와서는 사장을 추구하는 부류와 경학, 즉 성리학을 탐구하는 부류의 두 갈래로 분기, 계승되었다. 성리학에 주력한 인물로는 김굉필·정여창·유호인·박한주 등이 손꼽히며, 사장·政事·節義·孝行 등으로 이름 난 인물로는 南孝溫·洪裕孫·茂豊副正 摠·김일손·조위·이철균·이종준·이목·이주·권오복·이수공·이원·이계맹·권경유·강겸·홍한·표연말·김흔·유순정·강경서·최부·정희량·안구·임희재·강백진 등이 손꼽힌다. 사장에 관심을 가진 인물들은 학문이나 교육활동을 통해 문인을 배출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의 저작은 중종대에 증보된≪續東文選≫ 속에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그 자취를 남겼다. 반면≪소학≫의 實踐躬行에 충실한 김굉필·정여창 등은 상당수의 문인을 배출하였으며, 특히 김굉필의 학문은 조광조에게 연결되면서 조선왕조 성리학의 정통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들의 현실대응의식은 그 세력의 성장과 더불어 점차 적극적인 경향을 지니게 되었다. 김종직은 훈구파가 정치권력을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현실에 적응하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굳혀가기 위해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의 현실대응의식 및 자세는 현실개혁적이기보다는 오히려 現實自足的이고 現實安住的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는 그가 성종 15년(1484) 이조참판이 되어 “冗官을 汰去하고 賢良을 薦用하자”383) 金宗直,≪佔畢齋文集≫ 年譜, 成化 20년 갑진.고 주장한 바 있었다고는 하나, 문인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의 천거로 진출한 사림파 인물은 거의 눈에 띄지 않은 데서도 확인된다.

이같은 그의 현실대응의식 및 자세는 학문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문하도 두 갈래로 갈리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 하나는 보수적·고답적이며 소극적인 성향을 띠면서 ‘修己’를 지향하는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진취적이며 적극적인 ‘治人’ 傾斜의 계열이었다. 이는 학문적인 성향과도 연관을 지녀서, 전자는 김굉필 등과 같은 ‘爲學’ 지향의 인물에게서 발견되며, 후자는 김일손·남효온 등 사장 지향의 인물에게서 찾아진다. 성종·연산군초의 사림파가 지닌 학문, 현실대응의식 및 자세의 두 가지 성향은 중종대의 조광조에게서 묘한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小學童子’를 자칭한 김굉필에게서 ‘爲己踐履之學’을 수업한 그는 학문면에서≪소학≫의 실천궁행을 강조하면서 ‘치인’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으며,384) 趙光祖,≪靜庵集≫附錄 6, 行狀(洪仁祐撰). 현실대응자세에서도 흔히 급진적이라고 평가될 만큼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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