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2. 사림세력의 진출과 사화
  • 4) 갑자사화

4) 갑자사화

무오사화가 일어난 지 6년이 지난 연산군 10년(1504) 4월에 또 한 차례의 대옥사가 일어났는데, 이 해가 갑자년이어서 이를 甲子士禍라 한다. 이 사화는 연산군의 생모인 尹妃가 폐위·사사된 사실이 연산군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궁중과 결탁한 朝臣과 府中의 조신이 서로 갈등을 빚은 데서 기인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연산군은 자신의 무절제한 처신을 비판·견제하던 사림파를 제거한 후 한층 더 무도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이리하여 국가의 재정이 곤궁하게 되자, 백성들에게 貢物의 수량을 늘려 부과하는 한편 공신들에게 지급되었던 賜田과 노비 등을 몰수하려고도 하였다. 대부분이 공신인 훈구파는 이에 반대하는 한편 궁중의 支用을 절약할 것을 청하였고, 나아가서는 왕의 무절제한 생활에 제한을 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측근의 일부 조신들은 궁중과 결탁하여 왕의 방종을 충동하였다. 이로 인해 조신들은 宮中派와 府中派로 나뉘어져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399) 甲子士禍의 전말은 申解淳, 앞의 글, 174∼176쪽 참조.

궁중과 인연이 있던 임사홍400) 임사홍은 성종에 의하여 ‘亂政之人’으로 지목받아 중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 任光載는 예종의 부마였으며, 任崇載는 성종의 부마였다.은 이 기회를 이용, 연산군비 愼氏의 오빠인 愼守勤과 결탁하여 조정의 훈구파뿐 아니라, 무오사화로 세력이 꺾인 사림파의 잔존세력까지도 모두 거세하려고 하였다. 이를 도모하기 위해 임사홍은 연산군 생모의 폐비·사사사건을 연산군에게 몰래 고하였던 것이다. 연산군의 생모 윤비의 폐위·사사사건은 성종 11년(1480)에 윤비가 투기죄를 이유로 폐비되었다가 얼마 뒤에 사사된 사건을 말한다. 그 당시 연산군은 4세의 유년시절이었기 때문에 장성하기까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즉위 후 10년 4월에 임사홍의 밀고로 비로소 자기 생모가 성종의 후궁 嚴·鄭 兩淑儀의 참소에 의해 폐위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두 숙의를 內庭에서 撲殺하고 그들이 낳은 왕자 安陽君 忄行과 鳳安君 忄逢을 죽였다. 나아가 자신의 이러한 폭행을 책망한 祖母 仁粹大妃를 머리로 받아 얼마 후에 죽게 하는 패륜행위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한편 연산군은 생모 윤씨를 왕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配祀코자 하였지만, 이에 대하여 대부분의 조신들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다만 應敎 權達手와 李荇만이 이에 반대하였다가 권달수는 사형당하고 이행은 유배당하였다. 나아가 그는 생모 윤비의 폐출·사사 당시의 관련 조신들을 모두 追罪하기에 이르렀다. 사건이 이 상황에까지 확대된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궁중파와 부중파가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궁중파인 임사홍 등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연산군을 책동한 데 있었던 것이다.

임사홍은 이 기회를 통해 무오사화 때 화를 면한 사림파의 잔존 세력까지도 일소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사림파의 종장인 김종직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림파가 앞으로 자신들의 弄權에 방해가 될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일파는 사림파가 國事를 비방한다고 무고하여 윤비폐출·사사사건의 연루자들과 함께 치죄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그 결과 무오사화 때 ‘遠方付處’에 처해졌던 박한주·이수공·강백진·무풍부정 총·최부·이원·김굉필·이주·강겸 등은 사형되고, 그 형제 및 아들은 決杖, 外方黜送되었다. 그리고 정여창·조위는 무오사화 때 杖流되었다가 그 사이에 죽었지만 다시 추죄되었으며, 남효온은 소릉복위 상소건으로 추죄되는 등 사림파는 일대 타격을 입었다.401) 李秉烋, 앞의 책, 49쪽. 동시에 훈구파도 윤필상·成俊·李世佐 등이 사형을 당하였으며, 이미 사망한 韓致亨·韓明澮·鄭昌孫·魚世謙·沈澮·李坡 등이 부관참시의 형을 받았고 아울러 그들의 자제와 동족까지도 벌을 받게 되었다.

무오사화가 기성세력인 훈구파와 신진세력인 사림파의 대립·갈등의 소산이었다고 한다면, 이 갑자사화는 궁정 중심의 관료세력과 신진사림을 포함한 정부 중심의 관료세력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사림파 세력은 중앙 정계에서 거의 도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사림파는 잠재적인 성장을 지속해갔다.

한편 갑자사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훈구파 대신을 포함한 보수적 성향의 인물들이 다수 피화하면서 그들 자신이나 자손 중에서 학문적 성향이나 교우관계, 그리고 현실대응의식 및 자세에 큰 변화를 일으킨 예가 다수 발견되고 있는 점이다. 鄭光弼·李長坤·李繼孟·李思鈞·洪彦弼·趙元紀 등은 스스로가 被謫 또는 수난당한 바 있었으며, 이들을 제외하더라도 부·조 혹은 至親에 연좌되어 피적, 不遇를 체험한 훈구계열의 인물도 매우 많았다.402) 李秉烋, 위의 책, 104쪽.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학문적 성향 및 현실대응의식과 자세면에서 훈구파로부터 사림파로 전향하였다. 또 사림파로 전향하지는 않았지만 사림파의 진출에 협력한 인물, 그리고 보수적이기는 하나 사림파의 정치적 처지나 그들의 이념·이상을 어느 정도 이해한 인물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중종대에 조광조와 같은 사림파의 영수가 진출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을 뿐 아니라, 언관에 자리잡은 수많은 인물들의 진출을 가능케 한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함으로써 결국 사림파의 세력확대를 가져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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