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2. 사림세력의 진출과 사화
  • 6) 을사사화

6) 을사사화

기묘사화에서 중종말까지에 이르는 治世는 대체로 세 시기로 세분될 수 있다.409) 이 시기 정국에 추이에 대한 서술은 李秉烋, 앞의 글(1990), 153∼157쪽 및<朝鮮前期 支配勢力의 葛藤과 士林政治의 成立>(≪民族文化論叢≫11, 嶺南大, 1990), 176∼186쪽 참조. 기묘사화 이후 중종 26년(1531)까지는 起禍人을 주축으로 한 훈구파 주도의 정국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동왕 26년에서 32년말까지는 權臣 金安老의 擅權期였다. 끝으로 동왕 33년에서 39년까지는 김안로가 실각하면서 훈구파가 주도하는 정국으로 환원되었다. 단 마지막 시기에는 일부 사림파가 재등용되면서 잔존 사림파와의 연결이 이루어진 점이 주목된다.

기묘사화 직후 의정부는 남곤·홍경주·심정 등을 위시하여 金詮·柳聃年·李荇 등이 장악하게 되었고, 정광필·안당 등 사림파와 일정한 연관을 가졌던 인물들은 散職으로 밀려났다. 6조와 언관도 高荊山·李沆·金謹思·李蘋·金克愊 등이 주도하는 체제로 바뀌었으므로 사림파에 의해 제기되었거나 성취된 개혁의 거의 대부분을 원점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중종 16년에 홍경주가 죽고, 22년 남곤이 죽음으로써 3인 주도체제는 일단 해체되었고, 홀로 남은 심정과 그의 우익인 이항 등이 훈구세력의 구심점을 형성하면서 다소 약화된 채로 종전의 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의 김안로의 등장은 상당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그는 지난 날 사림파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관련을 가져왔던 인물인데, 사화 이후 훈구계에 가담함으로써 중종 19년 이조판서에 보임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뒤 그는 남곤·심정 등과 갈등을 빚으면서 일시 유배를 당하였지만, 아들 禧가 부마임을 적극 활용하여 동왕 24년에는 放還되었으며, 그의 우익인 金謹思·沈彦光 등을 요직에 앉힐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남곤이 죽고 난 이후의 취약한 심정 주도체제를 붕괴시킴으로써 중종 25년에는 직첩을 환급받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심정의 죽음과 함께 재서용되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까지 오르면서 정치를 농단하였다. 그러나 그는 중종의 제2계비인 文定王后를 폐하려 한다는 대사헌 梁淵 및 문정왕후의 族親인 尹安仁의 탄핵을 받아 사사되었고, 그의 우익이었던 許沆·蔡無擇 등도 같은 조처를 받았으며, 김근사는 관작을 삭탈당하고 門外黜送되었다.

남곤·심정 집권하에서나 김안로 천권하에서나 정부가 그들을 주축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소수의 사림파가 잔존하여 정부의 일각에 고립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대개 사림파의 계보에 속하면서도 개혁정치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아 화를 모면한 인물들이거나, 처음부터 사림파와의 관계를 가깝게 설정하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기묘사화 당시에는 출사 전이었거나 官歷이 짧아 개혁에 참여할 기회를 미처 얻지 못한 인물들도 더러 포함되어 있었다.

김안로의 실세 이후 실권은 다시 훈구파에게 돌아갔다. 그리하여 의정부는 尹殷輔·柳溥·洪彦弼·金克成 등에 의해, 6조는 權輗·曹繼商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6조나 언관에 있어서는 다소의 변동이 있었으나, 의정부의 경우는 중종말까지 윤은보(영의정)-홍언필(좌의정)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있어서는 앞 시대에 비해 사림파의 진출이 다소 활발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중종 33년초에는 김안국·김정국·申光漢 등이 재서용되어, 이미 재등용되어 있던 權橃과 연결되면서 이후 사림파 재등장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앙정부내에 사림파의 분포가 눈에 띄게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이는 ‘己卯人’의 재등용에 말미암은 것보다는 신진 사림파의 진출이 더욱 큰 몫을 한 때문이었다. 언관, 특히 홍문관의 구성에서는 李浚慶·林億齡·具壽聃·李滉·羅世纘·尹希聖·李瀣·羅淑·鄭希登·宋世珩 등의 사림파가 포진하게 되었다.

인종대에도 중종 말기의 정치적 상황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다만 중앙정부의 구성상 사림파의 비중이 좀더 커진 것이 하나의 변화였다. 의정부의 구성은 이제까지의 윤은보·홍언필 주도체제가 홍언필·尹仁鏡 주도체제로 바뀐 변화가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成世昌·李彦迪·권벌 등이 貳相의 직에 있었음이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6조에서는 신광한이 이조판서에 오랫동안 재임하는 가운데 柳仁淑·尹漑 등의 존재가 확인된다. 대간에서는 閔齊仁·이해·宋麟壽 등이 대사헌을 맡았고, 朴光佑·宋希奎·丁熿 등이 그 밑을 받치고 있었으며, 구수담·李潤慶 등이 대사간에 재직하였고, 許伯琦·郭珣·金鸞祥·盧守愼 등의 존재가 그 하부에서 확인된다. 홍문관에서는 宋世珩이 부제학을 오래 지내면서 그 곳을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인종 원년 6월, 즉 인종의 죽음에 임박한 시기에는 柳灌과 성세창이 각각 좌·우의정이 되었으며, 이언적이 좌찬성에 올랐고, 6조에서는 尹任이 형조판서에 보임된 것이 눈에 띈다. 대간은 큰 변화가 없었지만, 홍문관에서는 李若海·이황·박광우의 존재가 확인된다.

위와 같이 중종말 이래 인종대에 걸쳐 사림파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증하는 가운데 외척의 동향 또한 미묘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왕세자(인종)의 외삼촌인 윤임과 慶原大君(명종)의 외삼촌인 尹元衡 및 그 지지세력간의 미묘한 갈등이 곧 그것이었다. 그 와중에서 사림파는 명분상 세자측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는데, 그것이 乙巳士禍 때 피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인종의 짧은 치세는 중종대의 연장선상에서 사림파의 복권이 성취되는 성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명종 즉위초에도 중앙정부의 구성성분이나 정치적 분위기는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政曹 내에서는 이언적·권벌·신광한 등이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고, 언관은 사림파 우세의 상태가 유지되면서 그들 특유의 公道·公論을 창출해 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문정왕후와 연결된 李芑와 윤원형 등은 그 세력의 취약점을 보강하고 상대세력을 견제함으로써 그들 주도의 정치운영체제를 구축하려 하였다. 그 결과 명종 즉위년(1545) 8월 하순에 을사사화의 대옥사가 일어난 것이다.410) 을사사화의 전개과정 및 이후의 정국 추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禹仁秀,<朝鮮 明宗朝 衛社功臣의 性分과 動向>(≪大丘史學≫33, 1987).
金宇基,≪16世紀 戚臣政治의 展開와 基盤≫(慶北大 博士學位論文, 1995).
사화는 문정왕후의 밀지를 받은 이기·윤원형 등이 대간으로 하여금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탄핵케 하려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대간이 이를 거부하자, 부득이 이기·윤원형을 비롯한 鄭順朋·林百齡·許磁 등의 주도하에 대신들만이 忠順堂에 모여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윤임은 ‘不自安之心’하고 유관·유인숙은 ‘形迹’이 있었다는 애매모호한 죄목으로 각기 유배, 파직, 遞差에 처해졌다. 이에 대해 홍문관의 관원과 執義 송희규·사간 박광우 등이 그 부당성을 논박하였으나, 그것은 그들에게 加罪의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뒤이어 권벌이 유관·유인숙의 억울함을 극력 변론함으로써 그 자신도 ‘護黨’으로 몰리면서 3인에게는 더욱 죄가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위의 3인과 李輝·李德應 등은 참형에 처해졌고, 권벌은 체차되는 것으로 일단 마무리되었다. 그 과정에서 衛社功臣 28인, 原從功臣 1,400인이 冊錄되었다. 그러나 상대세력에 대한 분쇄작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경기도 관찰사 金明胤이 桂林君 瑠와 鳳城君 岏을 역모로 고변함으로써 피해의 범위는 더욱 확대되었으며, 그 결과 사림세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을사사화에 의해 지배 기반을 구축하는 데 어느 정도는 성공했지만, 권신 이기와 척신 윤원형이 주도한 공신 중심의 지배체제는 애초부터 구조적 취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그들은 이를 보강하는 방안으로써 사화를 확대시키는 방향을 택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사건들이 조작되거나 무고되었다. 그 하나는 명종 2년 9월에 일어난「良才驛 壁書事件」인데, 이는 척신계열의 鄭彦慤이 양재역의 벽 위에 첨부되어 있던 문정왕후와 이기의 弄權을 비난한 내용의 글을 보고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 사건으로 宋麟壽·李若氷·林亨秀·봉성군 완·成子澤 등은 사사되었고, 이언적 등 3인은 極邊安置되었으며, 노수신·정황·柳希春·김난상 등은 絶島安置, 權應挺 등 8인은 遠方付處, 권벌·송희규 등 14인은 中途付處의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명종 3년(1548) 2월에는 을사사화 당시 사관이었던 安名世가 이기의 죄상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武定寶鑑≫편찬 준비과정에서 드러나면서 또 한 차례의 타격이 잔존 사림파에 가해졌다. 그 뒤 명종 4년 4월에는 이약빙의 아들 洪男이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寧越에 귀양가 있던 중, 그 아우 洪胤을 역모로 무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희생된 사람은 주로 忠州에 거주한 이약빙의 문인들이었는데, 피해 범위가 워낙 넓어서 죽은 자만 士庶를 합쳐 300명에 달했으며, 한 面이 텅 빌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사화가 연쇄적으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김안로의 실세 이후 점증의 추세를 타고 중앙정부내에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여 ‘己卯人’의 복권, 현량과의 復科를 가능케 했던 사림파는 그 구심점이 분해되었고, 그 피해는 주변에까지 파급되는 타격을 입었다. ‘기묘인’의 복권은 백지화되었고, 현량과도 다시 罷榜되었다. 이후 척신정치가 지속되는 과정에서는 설사 소수의 사림파가 정부 일각에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의지가 정책 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는 없게 되었다. 을사사화를 비롯한 일련의 獄事는 좁게는 외척의 실력대결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넓게는 성장일로의 사림세력에 대한 훈구세력의 위기의식과 공도와 공론에 입각하여 정치를 운영하고자 한 사림파의 통치원리에 대한 훈구파의 괴리감정 등이 첨가되면서 더욱 확산되고 더욱 격화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공도론의 출처는 사림세력이었고, 척신정권의 통치형태는 다수의 공론에 입각하지 않고 소수 특권층에 의한 과두지배 방식을 택하려 했기 때문이다.

을사사화 이후의 정권은 이기와 윤원형에 의해 재단되었다. 그러나「안명세사건」의 처리를 둘러싸고 양자는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기가 이 사건을 계기로 사림파에 대해 추가적 타격을 가하려 한 데 반해, 윤원형은 그를 견제할 목적으로 사건의 확대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이기는 좌의정에서 일단 물러났으나, 뒤이어 일어난「李洪胤사건」을 계기로 조정에 복귀하여 이후 병사하는 명종 6년까지 영의정에 재직하였다. 이기의 죽음은 공신세력의 실질적인 붕괴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핵심 인물들이 노환으로 죽거나 공신호를 삭탈당한 상황이어서 윤원형을 비롯한 척신세력이 자연스럽게 정권을 천단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척신지배체제가 유지되는 가운데 沈連源·沈通源 등 또 다른 외척세력이 가세함으로써 그 체제는 더욱 굳어졌으며, 장기화의 조짐을 보이게 되었다. 명종비의 조부인 심연원은 명종 3년 우의정에 卜相된 후 좌의정을 거쳐 동왕 6년 영의정에 올라 13년 병사할 때까지 윤원형의 체제에 순응하였다. 심연원이 이끈 의정부에는 비공신계의 尙震이 좌의정에, 공신이면서 윤원형의 族叔인 尹漑가 우의정에 보임되었고, 이들 3인은 윤원형의 막후 조정을 받으면서 상당 기간 동안 의정부에 재직하였다. 그 뒤 명종은 중전의 외삼촌인 李樑을 등용함으로써 윤원형의 독주체제에 일정한 견제를 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량은 沈義謙에 의해 제지되어 명종 18년 유배당함으로써 실세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윤원형 주도의 지배체제는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명종초의 몇 차례에 걸친 옥사를 통해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림파는 중앙정계에서 도태되었다. 이 시기에 화를 입은 사림파 계열의 인물은 거의 100여 명을 넘는 큰 규모였다. 얼마 뒤 몇몇 사림파 계열의 인물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였지만 숫적인 면에서나 세력면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맥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으며,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노력은 꾸준히 경주되고 있었다. 세력의 저변확대를 위한 그들의 노력으로는 書院의 건립활동을 들 수 있다.411) 사림파의 서원건립활동에 대해서는 李泰鎭,<士林과 書院>(≪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참조.

기묘사화 이후, 鄕約을 통해 향촌질서를 확립하려는 사림파의 노력은 더 이상 정책적으로 제기되지 못하였다. 이는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이 억제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사회적 혼란은 이미 교화적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이에 그들은 방향을 전환하여 향약보다는 서원건립활동에 주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향촌의 재지적 기반 강화 및 사회·문화적 분위기의 개선을 통한 새 통치체제 수립에의 접근이라는 우회적이고 점진적인 방법이자, 상대세력의 경계권 밖에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재지 사림파의 세력 결집의 구심처를 얻을 수 있는 묘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중종 38년(1543) 豊基郡守 周世鵬이 白雲洞書院을 세운 것을 효시로 그들의 서원건립활동은 진전을 보여, 명종대 20여 연간의 척신정치 아래서도 18개소가 세워지는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李秉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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