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3. 사림세력 구성의 특징
  • 2) 향당적 색채

2) 향당적 색채

사림의 학문활동이 재지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점은 이들의 정치성과 사회성이 매우 鄕黨的이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나아가 각 지역적 특징을 나타내는 영남사림이니, 기호사림이니 하는 역사용어에서도 사림의 기반이 재지적이라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다. 여기서는 이들의 학문내용이 중앙정치를 위한, 또는 중앙 정치무대에 남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재지적 사회활동과 정치행위를 위한 내용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정치적 기반이나 학문적 기반이 재지적 성격과 내용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정치적 관심과 학문적 성취 목표가 국가적 내지는 중앙정치와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림의 학문과 정치적 성향이 이전의 유자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재지적이며 사림의 조직과 활동범주가 향당적임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사림파가 주장하는 학문의 논리와 구조는 성리학의 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조선 성리학의 발전축에서 중앙 정치무대가 아니라 재지적이고 재야적인 사림이 조선 성리학을 발전케 한 사실에 유의한다면 성리학의 체계가 향당적 요소를 갖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성리학은 우주론의 보편적 시각을 갖고 학문과 인간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왕 또는 왕실만을 위한 학문만이 아님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보다 광범하고 본질적인 학문적 진리에 접근하려는 유자들의 학문 자세는 바로 사림의 성리학 수용자세였다. 이와 같은 인식을 토대로 한다면, 이들 유자들은 왕실 또는 조정만을 위한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확대된 정국, 지방사회, 지방문화에까지, 특히 지방인사들에게 존재 의의를 부여하는 논리로 인식하여 성리학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성리학의 사회질서 논리인 鄕飮酒禮·鄕射禮 등을 주목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지역사회에서 지켜야 할 횡적 질서를 추구하는 의전의 내용이다. 향음주례·향사례의 보편적 규범례는 우리 역사 안에서 鄕約·鄕規 등과 함께 향촌사회를 안정시키는 질서의 규범이자 의례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재지적이며 향당적인 사림의 활동은 서원건립과 留鄕所復立運動 등에서도 확인된다. 서원에서 보여준 사회활동과 학문에 대한 열성은 바로 자신들의 주거지 중심의 서원에서 성리학에 대한 학구적 자세를 가다듬고 사림파의 정치활동을 변호하려는 노력이었다고 하겠다. 사림은 향촌의 자치를 통한 백성의 교화를 주장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유향소복립을 도모하였으며, 薦擧制를 내세우게 되었다. 유향소복립운동은 조선시대 사림의 중요한 사회활동의 중심 과제이었으며, 사림의 遺逸들을 천거하려는 운동 또한 지금까지 과거와 蔭職만으로 관료선발을 유지해온 제도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사림의 정치운동은 바로 향촌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418) 李秉烋, 앞의 책.
李泰鎭,<士林派의 留鄕所 復立運動-朝鮮初期 性理學 定着의 社會的 背景-(上·下)>(≪震檀學報≫34·35, 1972·1973).

지방에서의 지주적 생활을 중심축으로 하는 경제구조가 이들 유자에게 자신들의 경제활동, 학문과 사회활동, 나아가 정치활동을 보호하고 신장할 수 있는 성리학의 학문구조에 공감하게 하고, 사림은 이 학문을 수용·연구하면서 자신들의 사회세력 입지강화의 수단으로 성리학의 발전을 가속화시켰다.

이와 같은 사림의 재지적 기반에서 성리학 연구와 교육을 지속적으로 가능케 한 역사상은 조선 초기 이래 지방사회의 경제적 발전과 문화적 발전이 상승 작용한 결과였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재지적인 사림파의 활동을 활성화시켰다고 하겠다.

그러나 중앙집권적 정치·문화의 전통을 가진 조선 유교정치의 속성은 이들 사림의 재지적 활동의 활성화를 그대로 용납하지는 않았다. 초기의 유향소운동에 반대한 중앙 정치세력은 재지세력이 자치적 입장에서 조직한 유향소를 혁파한다든가, 部民告訴禁止法 등으로 지방의 실력자라고 할 수 있는 유자들로 구성된 品官이나 향리 또는 民의 정치운동을 억제하였다는 사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말 이래 지방 토호층에서 起身한 향리로부터 사족으로 신분을 상승시킨 사림은 꾸준히 자신들의 경제력을 토대로 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중앙 정치세력과 대결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다져갔다.419) 李泰鎭, 위의 글.

물론 이들의 중앙정계로의 진출과 정치적 대결에서 확고한 입지를 정립한 것은 몇 차례의 士禍라는 정치적 탄압을 통해서 얻어낸 결과였다. 사림이 기반으로 하는 전국에 걸친 재지적 기본 요소는 이들 사림의 정치력을 강인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경제적인 자활 능력을 가진 토호적 지주라는 요소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해 주는 성리학을 학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서원을 자신들의 온상으로 활용하였다. 즉 사림은 지금까지 성균관과 향교로 되어 있는 관 주도의 유학교육과 맞서, 서원운동으로 성리학을 연구하고 심화·발전시키는 기회를 통해서 자신들의 향당적 색채를 강화하고 있었다.

지주제 농업경영을 옹호하고 보편론과 합리론으로 왕실과 중앙집권적 정치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 한 성리학의 정치적 안목은 사림의 적극적인 정치참여의 기회를 갖게 하였다. 사림은 민본사상을 내세우면서 유자 자신들의 역할의 장을 얻고자 왕실과 함께 정치에서 역할분담을 주장하였다.

사림의 정치적 성공은 중종대 사림세력의 대표격인 조광조의 정치개혁에서 찾아진다. 조광조의 정치개혁에서 주장된 주요 내용은 역시 향당적 요소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인륜의 명분에 정치적 정당성과 ‘至治’의 지표를 설정하여 추진하였던 昭陵 복위의 건이라든가(소릉은 문종비인 顯德王后의 陵號로, 단종의 폐위에 이어 폐릉되었다), 중종비 端敬王后 愼氏의 복위(신씨는 반정 후 朴元宗·柳順汀·成希顔 등 靖國功臣들에 의해서 폐출되었다) 주장은 사림파의 공신세력에 대한 정치적 견제라는 이해도 있을 수 있겠으나, 인간이 갖는 보편적 인륜의 규제가 왕실에도 가해져야 한다는 인식에서 발의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향촌에서 기거하는 일반 민의 생활윤리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윤리라는 것이었다. 나아가 지금까지 궁중에서 보존되어 온 궁중 女樂을 폐지하고 男樂을 시행케 한다든가, 지금까지 궁중의 사적 재정의 요소로 훈구세력의 경제적 이해와도 깊은 연계가 있는 內需司 長利制度를 혁파케 한 것은 농민의 생활과 사림의 향촌생활의 안정에 필수적인 선결과제라고 보아야 할 내용이었다.

향촌질서를 성리학적 윤리로 정착시켜야 할 과제가 이들 사림에게 부여된 것이었다. 관학인 향교에 대한 관심은 물론이거니와 사림의 書齋와 서원에서≪朱子家禮≫와≪小學≫의 교육을 강조한다든가, 유향소를 통한 향리의 규찰, 鄕風敎化, 社倉制의 운영, 鄕約의 실시 등은 사림이 추진한 것이다. 이것은 유교정치에서 향촌질서의 확립이 성리학적 윤리질서와 통치질서의 기축이 됨을 시사하는 것이다.

조선의 정치에서 公論의 조성 또한 향촌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는 중종대에 이르러 안정된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사림이 공론의 형성층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정치의 무대가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이 아니었고 전국을 무대로 한 유교의 공론정치가 중종대에 보였다는 사실은 사림의 향당적 요소 위에서 형성된 공론의 정치여론이 숙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목된다.420) 崔異敦,≪朝鮮中期士林政治構造硏究≫(一潮閣,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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