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3. 사림세력 구성의 특징
  • 3) 사림의 성향과 특징

3) 사림의 성향과 특징

성종대 이후 정계에 등장한 사림의 역사적 위상 중에서 재지적 색채 그 자체도 사림의 성향과 특징을 시사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특히 이들이 추구한 성리학의 학문 가운데≪소학≫과≪주자가례≫의 실천을 강조한 내용에 관한 역사적 인식의 의미를 밝혀보고자 한다.

≪소학≫은 사림의 학문적 계보를 밝히는 과정에서 金宏弼의 인물됨을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강조되었고,≪주자가례≫는 정몽주를 우리 나라의 道學, 성리학의 비조로 평가하면서 항상 강조되는 주제였다.421) 金駿錫,<朝鮮前期 社會思想>(≪東方學志≫29, 延世大, 1981).

≪소학≫과≪주자가례≫의 주제가 사림의 학문적 관심사에서 매우 주요한 위상을 차지한 점은 그들이 성리학을 학문의 대상으로서 뿐 아니라, 그 이념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는 구체적 사항을 예시하는 것으로서≪소학≫과≪주자가례≫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인간교육의 교과서를 대표하는≪소학≫의 내용을 생활 속에서 재현하려는 학문적 의지가 이들 학통의 중심사상 속에서 강조되었던 것이다.≪소학≫은 사림계 인사들에게는 필수적인 교육내용이 되고 있었고, 그들 스스로 유교적인 가치관을 자신들의 생활에서 재현하려고 하였다. 이 점은 이들의 정치개혁의 의지와 개혁 논리 안에도 내재되어 있었다.

≪소학≫은 주자가 三代의≪소학≫에서 교육하였던 내용을 복원하고자 의도했던 교과서이다.≪소학≫의 敎人法은 灑掃·應對·進退의 節度와 愛親·敬長·隆師·親友하는 도리이다. 즉≪소학≫이 지향하는 인간형이≪소학≫교육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인간의 완성은 국가질서의 확립이라는 논리로 연결되어 있다. 즉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大學≫의 논리는 이 ≪소학≫교육의 실천과 연계되어 있다. 말하자면 바람직한 사회, 良村과 善俗의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敎人으로 완성된 인간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자는≪소학≫이 신분에 구애됨이 없이 모든 童蒙에게 강조되어야 할 책이라고 역설하였다.≪소학≫은 지배자이거나 피지배자이거나를 막론하고 가르쳐야 할 교재였던 것이다. 주자학을 수용하려는 유자들은≪소학≫을 중시하고 이를 ‘化民成俗’의 길로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 權近은 백성을 다스림에는 교육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소학≫을 중시하면서 교인을 위한 정책수행을 주장하였다.

유교 교화론의 바탕에는≪소학≫이 반드시 깔려 있었다. 사림의 학문내용을 지적하는 많은 자료에서≪소학≫의 내용이 강조되고 있었다. 예컨대 김굉필은 ‘소학동자’로 호칭되면서까지≪소학≫을 생활화하려는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송대의 주자가 구상한 地主와 佃戶의 원만한 관계가 성립되는 사회질서를 위한 선량한 풍속, 양질의 인간을 위한 교육을 이루려는 교과서가≪소학≫임을 확신하는 유자들에게는 바로≪소학≫이 자신들의 행위 교범서임을 자부하려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중국사회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도 그것이 가능한 것이고, 또한 그래야만 된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주자가례≫의 실천적 수용자세와 인식이다.≪주자가례≫가 주자의 저작물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쟁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우리 나라의 주자학 수용단계에서 주자의 저작물 이상의 역사성을 갖고 유자들에게 접근되어 이해되고 있었다.422) 琴章泰,<朱子家禮의 形成過程>(≪東洋哲學硏究≫14, 東洋哲學硏究會, 1993).

≪주자가례≫는 冠·婚·喪·祭라는 의례를 통하여 혈연공동체인 종족공동체의 삶을 질서있게 운영하려는 구체적인 생활규범이다.≪소학≫이 지배·피지배 신분을 구별하지 않는 범사회적 규범인 인간윤리를 내용으로 한다면,≪주자가례≫는 종족공동체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또 하나의 보편적 사회질서의 가치를 기저로 한 생활규범인 것이다.

의례의 형식에서는 중국의 그것과 큰 차이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말선초 이래 유자들은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는 通過儀禮的 내용, 즉 관·혼·상·제의 의례를 동일하게 하였을 때 문화의 동일화가 가능하다고 인식하였다. 중국문화를 수용하려는 원인은 문화적·사대사상적 요인도 없지 않으나, 그보다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보편적 문화능력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의식에서≪주자가례≫를 습용하고, 의례를 통해서 전달되는 유교문화를 수용한 문화인으로서 자부심을 표출한 것으로 이해된다.

관례는 남녀 모두에게 책임의식을 갖도록 하는 성인식의 의미가 있다. 성인이 되면 혼례를 하게 된다. 혼례는 곧 다른 종족과의 첫번째 교섭과 협력의 절차를 의례화한 것이고, 동시에 도덕성을 마련하는 것이다. 다른 종족과의 일정한 의식을 통해서 사회구성원간의 신뢰를 구축하며, 동시에 인간애를 촉발케 하는 의례였다. 상례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재인식하게 하면서 生者와 死者와의 관계설정과 동시에 세대교체에서 파생되는 사회혼란의 문제를 상례의식을 통해서 처리될 수 있다는 지혜였다고 하겠다. 제례는 인간의 성장과 주변 종족집단간의 관계와 세대교체에서 파생될 수 있는 갈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하는 의례였다. 따라서 관혼상제는 사대부의 종족집단 공동체의 사회적 권위를 지킬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社會儀式의 의미를 갖는≪주자가례≫의 습용은 현실적으로 이들 유자들에게 학문적 욕망과 이상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 역사 전통이≪주자가례≫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스스로 밝혀지는 것이다. 중국의 그것과 차이가 있는 관·혼·상·제의 내용을 이 시기의 유자들 곧 사림이 주자의 관·혼·상·제와 합일시키려는 노력이≪주자가례≫의 연구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노력이 심화되어 사림내에서 하나의 禮學派가 성립하게 되었다.

≪가례≫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어 17세기에 와서 소위「禮學」시대라는 단계에 이르렀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사림이≪주자가례≫를 실천하고 이를 소화·수용하려 한 의지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하기 위한 작업에서 지적해야 하는 내용은≪주자가례≫가 갖는 보편적 가치론에 의거한 질서체계와 재지적 사림의 위상을 정립하는 것에 이≪주자가례≫의 의미가 중요했다는 점이다.423) 高英津,≪朝鮮中期 禮說과 禮書≫(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2).

예론은 고전적 유학체계에서 이미 禮經으로 파악되는≪儀禮≫·≪周禮≫·≪禮記≫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은 원론적으로는 인간의 개별적인 질서 의식의 자각을 강조하고, 다음 단계에서는 보다 정치적으로 유학의 질서체계로 정립되어, 이른바「五禮」의 형식으로 나타나 皇帝權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례의 체계로 구성되었다. 다음으로 宋代의 사대부 유자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위상과 정치적 욕망을 황제권과 어울리면서 주장할 수 있는 질서론을 보편적 가치체계와 기초적인 논리 안에서 예제를 정리했을 때, 바로 관·혼·상·제라는 통과의례적 의례를 주목하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424) 李範稷,≪韓國中世禮思想硏究≫(一潮閣, 1991).

황제로부터 사대부, 서인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적 내용인 관·혼·상·제의 의례는 황제 중심의 5례의 구조와 대립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가례≫가 갖는 보편적 가치체계는 황제권을 구속하는 보다 기초적 가치론에 있다는 점이 후일 왕권을 제약하는 정치적 논리로까지 발전할 여지가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조선의 사림이 순수한 학문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정치세력으로 전환하였을 때, 보편적 가치론에 기초한≪주자가례≫는 이들의 정치적 보호막이 될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조선의 사림세력이≪소학≫과≪주자가례≫의 수용에 열정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갖게 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재지적 지주로서 유학을 공부한 유자들은 지역사회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국가차원의 정치적 안정에 기여한다는 자부심과 의무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성향이 모두 역사발전에 긍정적으로 기여한 것만은 아니었다. 재지적 성향에서 비롯한 지방적 색채와 종족적 집단의식의 팽배는 소위「朋黨的」성향으로 발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의 성리학은 학문 자체가 갖는 보편적이고 세계사적인 논리를 그 내용 안에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현장에서는 사림의 사회활동에서 당색적 내용을 찾을 수 있는 근거를 남겼다. 학파가 지역성과 가계에 연결·세습되면서 사림은 붕당적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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