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3. 사림세력 구성의 특징
  • 5) 절의사상의 고취

5) 절의사상의 고취

사림은 왕실과 자신들 사이에서 대립되는 정치세력의 정치적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스스로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대의명분을 節義思想에서 찾았다.

군왕과 신료의 관계에서 설정된 정치적 내용을 도덕적 가치개념으로 승화한 忠의 정신과 유자들 사이의 지식인으로 지켜야 할 도덕률로서 義의 이념은 사림의 정치적 위상을 지켜줄 도덕률의 내용이 되고 있었다. 사림들은 역사에서 忠節을 상징하는 인물로 정몽주를 찾아 그들의 학맥의 비조로 삼고 왕조에 대한 사림의 상징적인 인물로 강조하고 있었다. 사림은 정몽주가 조선 건국에는 반대하였으나 왕조가 안정된 다음 단계에서는 그와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는 논리로써 왕을 설득하였다. 그러한 변호논리는 곧 정치적 방어벽을 삼으려는 것으로, 조선왕조에 대한 충절을 실천적으로 보일 수 있는 유자로서 정몽주가 필요했던 것이다. 즉 사림들은 그들의 정치활동에서 자신들의 방어벽이 될 수 있는 명분을 정몽주의 충절과 연계하였던 것이다.

성리학은 정치활동에서 윤리적 내면성을 至公無私한 德으로, 충은 자신을 희생하여 국가와 군주를 위해 전심 노력하는 것으로, 절의사상은 人欲을 제거하고 天理를 보호하기 위한 예절이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었다.

사림의 절의사상은 이 시기에 강조되었던≪주자가례≫의 준용과도 연계된다.≪주자가례≫는 실천적인 면으로 사림의 세계에 침투되어 갔다. 조선왕실로서는 절대적 충성을 표시하는 정치인이 필요할 때 사림이 그 대상이었다. 사림은 국왕에게 표하는 충절을 실천적으로 수행하는 훌륭한 유자가 바로 자신들이라는 인식을 학행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유학의 예사상과 합일되어 복합적 사회질서의 기준으로 평가된≪주자가례≫는 외형적 형식과 내면에서의 충절사상이 강조되는 사림의 정치운동에서 매우 적절한 주제가 될 수 있었다.

앞에서 사림의 학문적 정통성과 정치력 표출의 면을 문묘종사운동으로 인식할 수 있음을 언급하였는데 절의사상은 이들 문묘배향운동에서 배향인들의 학행을 상징하였던 주제였다. 이는 정몽주의 문묘종사를 건의하는 사림의 상소문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중종 때 成均生員 權磌은 다음의 상소문에서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할 대표적 인물로 결정하는 조치와, 사림이 이를 통해서 나타내려는 대의명분 안의 정신이 군왕에 대한 충절과 유자 자신들의 결속을 상징하는 의리사상이 예절에 맞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道學이 전해진 것은 堯舜으로부터 시작하여 孔子의 門下에서 융성하였으며, 孟子 이후로는 천여 년간 계승하는 자가 없어서 참으로 道統을 잇기 어려웠습니다.…우리 나라를 생각하건대 檀君 이래로 말하면, 먼 옛날이라 징험할 수 없으며, 箕子가 나라를 세우고서야 겨우 八條를 시행하였을 뿐이었는데, 다행히 하늘이 도와 고려말 儒宗 정몽주가 태어나 성리를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서 깊은 뜻을 혼자 알되 先儒와 잘 맞았으며, 忠孝와 大節이 당대를 聳動하였으며, 부모의 喪을 입고 祠堂을 세우는 것은 한결같이 家禮대로 하였으며, 文物·儀章이 모두 그가 다시 정한 것이었으며, 학교를 세워서 유학을 크게 일으켜 이 道를 밝혀서 후학에게 열어준 것은 우리 나라에 이 한사람뿐이니, 학문은 周子·程子에 비하면 참으로 차이가 있겠으나, 공로는 주자·정자에 비하면 거의 같습니다(≪中宗實錄≫권 29, 중종 12년 8월 경술).

己卯·乙巳士禍 이후에도 조정에서 박해를 받았던 사림은 재야에서 꾸준히 유학을 연구, 성리학에 침잠하고 있었다. 유학이 심화된 학문으로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조선왕조의 정치적 지표가 되었기 때문이지만, 유학을 학문으로 소화·발전시킬 수 있는 사림층이 두텁게 형성되고 있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사림은 과거시험을 통해 왕실에 접근하여 관료로 진출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학문으로 유학을 연구하고, 동시에 자활적인 생활방법을 개발하여 정계를 관망하며 비판도 하고 협력을 하는 다양한 생활모습을 소유하고 있었다.

조정을 이루고 있었던 중앙정계에서는 이 시기에 이른바 당색의 조짐이 보이면서 여러 갈래의 학파로 일컬어지는 스승과 학생들의 모임이 결성되고 있었다. 유자들은 조선 초기 이래 누적되어 온 역사적 모순을 자성하고 이를 개혁하려고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이를 거부하려는 보수세력과 정치적 갈등을 빚었다. 이 때 사림들이 정치적 지표로 주장한 것은 충절과 개혁이었다. 이는 곧 왕과 협력하면서 역사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유교정치이념의 기초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구도 논리와 재야사림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논리로 양분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 때 사대부 관료들의 정치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왕권을 강화하여 사회안정을 추구해야 한다는 정치명분이 맞서면서 보수와 개혁의 논리, 또는 당색의 경색으로 사림사회의 구조가 형성되고 있었다. 자파의 학통과 논리의 발전, 보호를 위한 사림의 활약이 조선 중기 이후 문묘종사운동·서원배향운동으로 표출되고, 내면에서는 이른바 절의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사림파는 보수적 사림파와 진보적 사림파로 구분되기도 한다. 왕실에 기탁하여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여건을 유지·보호하려는 사림을 전자라고 한다면, 민초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누적되는 상부구조의 모순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비판세력으로의 사림의 존재가 후자이다. 후자는 이른바 민중을 위하자는 명분으로 기득권층의 정치세력을 비판하려는 존재로서 조선 중기 이후의 사림 세계의 한 실상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들 중에는 이른바 實學이라는 학문상의 방법으로 특징지어지기도 하고 당색으로도 구분되어 재야유자층으로 규정되면서 사회비판적 지식인으로 활약하는 사림층이 존재하게 되었다. 후자 그룹에는 남인·북인계의 재야사림이 속한다. 정치적으로는 집권정치세력과 재야의 유자로 구분되고 있지만, 이들 모두는 유학을 자신들의 학문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공통된 주제는 절의사상을 기저로 하면서도 방법론으로는 왕실의 위상을 절대적 권력으로 강화시켜 현실세계의 모순을 극복·개선해야 한다는 주장과 왕실과 협력하면서도 관료의 위상을 중심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논의가 대립되고 있었다. 사림층은 貢納의 개선책, 문무의 균형적 국방 대비책, 胥吏들의 개선책 등 현실정치의 치유 노력을 제안하고 있었다.

절의사상에서 주목되는 것 중의 하나는 그 실천적 내용이다. 사림들은 죽음으로써 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정치적 소신이나, 정치모순의 개혁을 위하여 적극적인 실천의지와 사상적 내용을 가지고 民人과 국가재정을 위한 개혁을 제안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한 평생을 학문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림은 예에 맞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활동을 하는 충절의 모습을 자신들의 생활에서 발현하고 있었다.≪주자가례≫의 勵行이 갖는 의미가 성리학의 심화과정과 일치되는 것을 시사한다고 하겠다. 정몽주를 자신들의 학통과 연계시키고 있는 점에서 이미 지적하였거니와, 이후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으로 이어지는 사림의 학통과 문묘배향에서 주장되는 이들의 행적에서 공통되는 것은 모두 실천적인 유학사상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중기 이후 문묘배향에서는 정치적 성향이 지나치게 나타나 당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문묘배향이 이루어지지 않은 유자가 있었지만, 현실문제에 대한 문제의식과 이를 개선하려는 학문적 노력,≪주자가례≫의 실천에서 연유되는 절의사상의 기저는 사림이 공유하는 이념이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의 유자들, 사림으로 형성된 정치세력은 강한 실천력을 수반하는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른바 사림의 사회사상을 절의사상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李範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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