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1. 도학정치의 추구
  • 1) 도학정치의 이념

1) 도학정치의 이념

고려말의 신진사대부들은 조선의 건국을 두고 참여파와 은둔파의 두 계열로 분화되었으며, 그 중 참여파가 건국초의 정국을 주도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논급한 바 있다. 勳舊派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이들은 건국 이후 잦은 功臣冊封으로 정치적·경제적 특권을 구축하면서 權貴化하여 갔다. 반면 조선 건국에 반대한 은둔파의 계열을 이어 받은 士林派는 성리학적 질서에 충실하려는 입장을 지니면서 향촌에서 학문연구와 교육을 통해 세력확대에 노력하고 있었다. 이들이 중앙정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대부터였다. 훈구파가 권귀화하면서 왕권을 능가할 정도로 권력을 강화하자,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파를 중용하였다. 이렇게 중앙무대에 등장한 사림파는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한 활동에 나섰으나, 그들을 보호하던 성종이 사망함으로써 일단 정계에서 도태되고 말았다.

사림파가 정계에 다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中宗反正 이후였다. 반정을 주도한 靖國功臣들은 연산군대의 폐정을 개혁한다는 명분하에 정국을 운영하였으나 그들도 점차 권귀화함에 따라 그 대응세력으로 사림파가 다시 정계에 나올 수 있었다. 훈구파의 권력독점에 따른 문제점을 해소하고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중종대의 사림파는 道學政治라는 새로운 정치질서의 수립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세력기반을 확대해 갔다.

“天命을 性이라 하고 성에 따르는 것을 道라고 한다”432)≪中庸≫제1장.는 유교의 논리구조에 의하면, 도를 따르는 것은 곧 천명을 따르는 것이 된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사림파는 군주나 백성 모두가 천명에 따라 행동하고 생각하는 사회를 至善의 정치가 행해지는 ‘至治’ 즉 이상사회로 규정하였고, 堯舜三代가 그에 해당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인식은 물론 사림파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성리학자들의 공통된 이상이었지만, 당시의 사림파는 이러한 지치주의를 재현할 수 있다는 확신하에433) 趙光祖,≪靜庵集≫권 3, 侍讀官時啓 六. 모든 노력을 경주했던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기 전에 좌절하게 된 것도 오히려 이 시기 도학정치의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림파는 요순시대와 같은 이상사회의 구현에 정치적 목표를 두었는데, 이의 실현을 위해서는 몇 가지의 전제가 필요하였다. 그 전제를 몇 가지 분야로 나누어 살펴보면 도학정치 이념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유교사회에서 정치의 근본목표는 백성의 생활을 안락하게 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民惟邦本’이라는 정치적 구호가 상징하듯이, 民의 존재는 정치의 대상이자 목적이었다. 유교사회를 지향하는 조선시대에도 물론 민의 권리를 제약하거나 민생을 피폐케 하는 양상이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민유방본’의 이념과 구호만은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왔다. 이 점은 사림파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즉 이들이 제시한 도학정치도 역시 백성의 존재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릇 임금과 신하는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이 마땅히 이 뜻을 알고 밤낮으로 백성을 마음 속에 새긴다면 잘 다스리는 방도를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趙光祖,≪靜庵集≫권 3, 檢討官時啓 六).

이것은 당시 위정자 일반에 대한 공통적인 警句이기도 하였지만, 사림파의 입장에서는 더욱 선명하게 실감되는 사항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훈구파의 대토지 소유, 貢納制度의 모순, 軍役의 徭役化, 還穀의 高利貸化 등으로 인하여 민생은 더욱 피폐해져 갔는데, 사림파는 향촌에서 직접 그러한 상황을 목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계에 등장하면서 이러한 문제들을 먼저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그들은 도학정치의 근본이념을 爲民·愛民에 두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위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몇 가지 하위 이념을 제시하였다.

사림파는 이상정치의 실현을 위해 먼저 정치 및 권력의 주체인 군주의 자질이 賢哲함이 필수적이라는 ‘賢哲君主論’, 즉 聖君論을 제기하였다. 이는 군주는 賢者이어야 하며, 항상 성심성의껏 학문에 힘써 삼대의 聖治에 도달하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군주 자신이 먼저 덕을 배양하고 이를 실천한다면 백성들이 감복하여 스스로 교화될 수 있다434) 趙光祖,≪靜庵集≫권 3, 參贊官時啓 一.는 德治를 특히 강조하였으며, 덕치는 반드시 仁政으로써 백성을 다스려야 함과 표리관계에 있으므로 ‘현철군주론’은 곧 올바른 정치로 가는 道程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와 같이 사림파가 이상정치의 실현에 군주의 훌륭한 자질이 무엇보다도 필수적이라고 주장한 이유는 연산군대의 학정에 의한 여러 가지 폐단을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사림파는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해 군주 자신의 덕성과 자질 함양에 노력해야 함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股肱之任’인 大臣을 성의로 감동시키고 예로써 대접해야 한다435)≪中宗實錄≫권 33, 중종 13년 6월 경오.고 주장하였다. 곧 군신 상호간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그들의 신념을 그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신들도 군주가 賢君이 될 수 있도록 군주를 보필해야 하며, 조정의 공론에 따라 여러 신하의 의견을 수렴하여 왕에게 건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요컨대 정권이 군주에게로 귀일되는 것은 군주의 專制를 가져오고, 반대로 대신이 정권을 천단하는 것은 국가의 체통을 상실하는 것이므로 모두 배제되어야 하며, 왕권과 신권이 상보적인 입장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至治를 실현할 수 있다는 논리로서, 이는 권력구조에 대한 사림파의 정치철학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그들은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해 정권의 담당자인 군주와 대신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言路가 열려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언로의 通塞은 국가에 가장 관계되니, 통하면 다스려져 편안하고 막히면 어지러워져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주는 언로를 넓히는 데 힘써 위로 公卿百執事로부터 아래로 閭巷·市井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말할 수 있게 해야 됩니다. 그러나 言責이 없으면 스스로 다 말할 수 없기 때문에 諫官을 설치하여 주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말하는 바가 혹 지나치더라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언로가 막힐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趙光祖,≪靜庵集≫권 2, 司諫院請罷兩司啓 一).

그들은 언로의 通塞이 국가의 운명과 직결된다고 여겨 언로의 개방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였고, 군주 역시 言官의 언론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언관의 활동이 활발하게 나타날 때, 군주는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게 되며 도학정치의 실현이 가능해진다는 것이었다.

또 사림파는 이러한 언로의 개방을 바탕으로 “臺諫은 국가의 일에 있어서 그 기미를 알면 마땅히 자신을 돌보지 않고 기강을 붙들어 일으켜야지 한 가지 일의 잘못을 논하고 한 사람의 비행을 논박하는 것으로 직분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436)≪中宗實錄≫권 37, 중종 14년 10월 갑신.라고 하였다. 언관은 탄핵활동도 중요하지만 기강을 확립하는 것과 같이 국가를 위한 원대한 활동을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졌던 것이다. 이는 그들이 언관의 활동이 단순히 탄핵이라는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정책을 수립하는 것과 같은 보다 차원 높은 영역에까지 도달되기를 기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政曹를 세력기반으로 삼고 있던 훈구파와 상대적 입장에 서 있던 그들로서는 당연히 언관을 주목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갖고 있는 탄핵권을 이용하여 훈구파를 견제함과 동시에 자기들의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기반으로 삼으려 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인재등용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사림파만의 관심 영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치의 실현을 이상으로 추구하고 있던 그들에게 있어서 그 문제는 더욱 절실한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먼저 그들은 훌륭한 인재의 조건으로 君子·小人의 구별을 제시하고 군자를 등용해야만 지치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군자·소인의 구별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에 군주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지적하였다. 즉 군주의 학문이 깊지 않으면 군자를 소인으로, 소인을 군자로 오해하기 쉬우므로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어렵다고 전제하고,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여 소인을 퇴진시키고 군자를 등용하는 것이 국가의 안위와 직결된다고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군자가 진출하면 천하가 태평하고 소인이 등용되면 천하가 어지럽게 됩니다. 대개 군자와 소인이 섞여 혼용되면 서로 해치니, 소인은 반드시 군자를 제거해야 술수를 쓸 수 있고 군자도 반드시 소인을 억제해야 도를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국가의 安危가 결정되는 것이니, 조정의 급선무는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여 진퇴시키는 것입니다(≪中宗實錄≫권 33, 중종 13년 6월 경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군자와 소인의 분별을 강조한 것은 실상 인재등용방법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기존의 보편적인 인재선발 機制는 물론 科擧制였고, 당시의 사림파도 대부분 과거를 통해 진출하였다. 그러나 詞章 중심의 과거는 성리학에 침잠하고 이를 실천하려는 도학과는 일정한 거리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才士는 등용될 수 있었지만, 덕망을 갖춘 인물은 등용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게다가 훈구파로 구성된 기득권층이 과거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자제를 등용하는 ‘行私’의 병폐가 나타나는 등437) 당시 훈구파에 의해 자행된 대표적인 科弊로는 借述·代作·科場挾冊 등을 들 수 있다. 차술·대작이란 타인의 제술을 빌려 쓰거나 타인을 위해 대신 제술해 주는 것으로 科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나 가끔은 과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과장협책은 반입이 인정된 韻書 이외의 책을 과장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폐들은 대부분 응시자(擧子)의 단독행위로 이루어졌지만, 그 중에는 試官과 결탁하고 자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과폐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해도 상당수가 훈구파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과거를 이용하여 자파세력을 확장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曺佐鎬,<學制와 科擧制>,≪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74, 170∼177쪽 및 李秉烋,<賢良科 硏究>,≪朝鮮前期 畿湖士林派硏究≫, 一潮閣, 1984, 233∼236쪽). 과거제의 모순이 드러나게 되었다. 사림파는 이러한 모순의 극복과 아울러 훈구파 세력을 견제하고 자파세력을 대거 진출시켜 요순삼대의 지치를 실현하기 위한 인적 기반으로 삼으려는 의도에서 군자와 소인의 구별 등용을 위한 새로운 인재등용방법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또 요순시대를 모범으로 하는 도학정치를 추구하면서 그 실현에 있어서는 모든 법제를 마땅히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는 祖宗之法은 쉽게 고칠 수 없다는 것을 명분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한 훈구파의 그것과는 상반된 대응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지치의 실현을 이상으로 삼고 있던 그들로서는 훈구파의 기득권을 보장하고 있던 법제를 고치지 않을 수 없었고, 그에 따른 變法論을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림파는 그대로 두어도 좋을 것을 변통하는 것도 문제지만, 변통해야 할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은 더욱 불가하다는 명분438)≪中宗實錄≫권 33, 중종 13년 5월 병진.을 내걸고 祖宗朝의 成憲이라 해도 후세에 와서 폐단이 생기면 후손이 이를 당연히 고쳐야 한다는 견해439)≪中宗實錄≫권 34, 중종 13년 8월 경인.를 적극 제시하였다. 이는 곧 조종지법을 경솔하게 변경해서는 안되지만, ‘時王之俗’ 곧 현실상황에 적합하게 고칠 것은 고치고 삭제할 것은 삭제해야 한다는 변법론적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변법론의 구체적 시행방법에 있어서는 급진적인 견해와 온건한 견해로 다시 나뉘었으나,440) 이 점은 후술할 개혁정치의 방법에 있어서도 金安國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가 성리학적 통치질서를 수립하기 위하여 점진적으로 그 기반을 확립하고 풍토를 조성하는 식의 온건한 길을 모색한 반면, 趙光祖 등은 舊習과 舊制의 과감한 개혁만이 새로운 통치질서 수립의 첩경이라고 믿고 이를 급진적으로 시행하려 하였다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李秉烋, 앞의 책, 112쪽). 일단 정해진 법의 개폐에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면서 당시의 폐해를 개혁하려 하지 않았던 훈구파에 비해서는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이 곧 사림파 개혁정치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사림파가 추구한 도학정치는 외견상 요순삼대의 지치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복고적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훈구대신의 집권과 그에 의해 파생된 제반 모순을 극복하고 유교사회의 이상적 정치를 구현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었으므로 오히려 진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이념을 딛고 서 있었으므로 사림파의 집권에는 개혁정치가 수반되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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