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1. 도학정치의 추구
  • 2) 언론과 경연활동

2) 언론과 경연활동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한 사림파의 개혁정치는 주로 언론과 경연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臺諫·弘文館과 같은 言官職에 자파를 진출시켜 그 관직이 갖는 권한과 기능을 이용하여 그들이 추구하는 도학정치를 실현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유교의 정치적 이상 가운데는 요순시대부터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고 군주는 백성의 이런 의사를 수용하여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하나의 인식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각자의 의사를 표현하고 이를 실현한다는 것은 하나의 이상일 뿐이므로 백성의 의사를 수용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군주에게 건의할 수 있는 기구로 언관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언관은 항상 군주 가까이서 발언할 수 있는 ‘耳目之官’으로 인식되어 그 증요성이 높이 평가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언관제도가 하나의 제도로 정착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조선초의 언론기구로는 司憲府와 司諫院, 곧 兩司가 있어 각각 일반 관원에 대한 탄핵기구, 국왕에 대한 諫諍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기능의 명확한 구별 없이 대간으로서 함께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언관제도는 왕권의 전제성을 견제하고 臣權의 독점적 장악을 방지하면서 관료체제의 균형과 안정을 도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441) 우리 나라의 언관제도와 그 기능에 대한 대표적 연구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李洪烈,<臺諫制度의 法制史的 考察>(≪史叢≫5, 高麗大, 1960).
宋春永,<高麗御史臺에 관한 一硏究>(≪大丘史學≫3, 1971).
朴龍雲,≪高麗時代臺諫制度硏究≫(一志社, 1980).
李載浩,<李朝臺諫의 機能變遷>(≪釜山大論文集≫4, 1963).
崔承熙,≪朝鮮初期 言官·言論硏究≫(서울大 韓國文化硏究所, 1976).
南智大,<朝鮮 成宗代의 臺諫言論>(≪韓國史論≫12, 서울大, 1985).
鄭杜熙,≪朝鮮 成宗代의 臺諫 硏究≫(韓國硏究院, 1989).

이 대간 외에 조선시대에는 홍문관이 언관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원래 홍문관은 궁중의 도서관 기능을 지니고 있었으나, 성종대에 이르러 集賢殿의 기능을 이어받아 학문 연구와 국왕의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홍문관원은 經筵官을 겸하였기 때문에 경연에 참석하여 정책을 논의하거나 時事를 비판할 수 있었다. 성종은 하루 세 차례의 경연을 빠뜨리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할 만큼 자주 참석하였으며,442) 조선 초기의 경연제도 및 그 운영실태에 관해서는 權延雄의 다음 연구가 크게 주목된다.
Yon-Ung Kwon, The Royal Lecture of Early Yi Korea, Journal of 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 1979·1980.
그 활성화를 위한 여러 제도를 강구하였다.443) 성종대의 홍문관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가 참고된다.
崔承熙,<弘文館의 成立經緯>(≪韓國史硏究≫5, 1970).
崔異敦,<성종대 弘文館의 言官化 과정>(≪震檀學報≫61, 1986).
성종의 이같은 노력으로 그 곳은 군주에게 학문을 강독하는 일차적 기능을 넘어서서 敎化·諫諍 등 論思의 이차적 기능을 부여받게 되었으며, 따라서 홍문관원도 언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홍문관이 경연을 통하여 언론활동을 행하게 되자, 점차 대간과 더불어 언관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으며, 경연 이외의 언론기능까지도 인정받는 결과를 가져왔다. 홍문관의 언론은 처음에는 대간 언론의 한계를 보완하는 수준이었으나, 학문 연구를 바탕으로 한 전문성을 이용하여 점차 대간 언론보다 수준 높은 언론을 행사하게 되어 3사 언론을 주도하는 위치를 차지하였다.444) 홍문관의 言官化에 대해서는 崔承熙, 앞의 책 및 崔異敦, 위의 글 참조. 이런 현상은 사림파의 정치적 진출이 두드러지는 성종대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그들이 언관과 경연을 이용하여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림파가 언관과 경연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한 것은 그 기능이 상대세력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 외에 또 다른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훈구파는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기구인 政曹를 장악하여 정치적 제특권을 향유하고 있었지만, 정계 진출이 日淺한 사림파로서는 아직 품계상 정조의 상위직에 진출할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정조에 진출하기는 했으나, 대개 하위직에 그쳤으므로 그를 통한 훈구파의 견제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그들은 언관직에 진출하여 활발한 언론활동과 경연활동을 전개하여 훈구파를 견제하는 한편 스스로의 정치적 성장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445) 言論과 經筵活動을 통해 추진한 사림파의 개혁정치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서술은 李秉烋, 앞의 책, 117∼159쪽 참조.

중앙정계에 진출한 사림파가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을 때, 가장 큰 한계로 인식되었던 것은 여러 가지 특권을 향유하고 있던 집권 훈구파의 존재였다. 따라서 그들의 언론활동은 훈구파에 대한 비판에 그 초점을 두고 시작되었다. 이 점은 성종대에 3사에 진출한 사림파가 훈구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柳子光·任士洪 등의 탄핵에 나섰던 것에서 잘 나타난다. 성종 9년(1478)에 홍문관과 藝文館의 上書로 시작된 都承旨 임사홍에 대한 탄핵은 이 일에 앞장 선 소장 사림파 언관이 처벌받는 등 그들의 피해도 적지 않았으나, 임사홍과 유자광을 유배시키는 성과를 가져왔다. 물론 이러한 일정한 성과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사림파를 지원하려는 성종의 의도에 힘입은 바 있었지만, 사림파의 성장을 바탕으로 한 언론활동이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훈구파에 대한 이와 같은 탄핵활동은 통시대적인 일반 언론활동과는 구별되는 사림파 특유의 것이었다.

그런 성격을 보여주는 다른 하나의 예로는 昭陵復位 문제를 들 수 있다. 소릉이란 문종비이자 단종의 母后인 顯德王后의 능을 말하는데, 세조의 즉위과정에서 단종의 폐위와 함께 폐릉된 바 있었다. 이러한 소릉의 복위문제를 처음 제기한 이는 南孝溫이었다. 그는 일개 유생으로 時務八條를 상서하는 가운데 ‘追復昭陵’할 것을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이 주장은 臣子로서 감히 발설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유생이 정치에 간섭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훈구파의 주장에 의해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후 성종말 연산군초에도 金馹孫에 의해 재차 건의되었으나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림파의 소릉복위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소릉복위가 세조 즉위 자체와 그로 인해 탄생된 공신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비록 실현된 것은 아니었지만, 사림파가 이러한 모험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정치적 성장이 뒷받침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훈구파의 지배적 위치가 유지되고 있던 당시에 그들의 기반을 뒤흔들 이런 문제가 제기되었다는 것은 사림파의 언론활동이 종전의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성종대의 사림파가 이러한 언론활동을 했다고 하여 그들의 성장이 훈구파를 제압할 수준까지 이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중앙 정계에 많이 진출하였다고는 하나 훈구파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고, 활동의 범주도 주로 언관직에 머물렀기 때문에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영역에까지 도달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타난 그들의 언론활동의 과감성·전향성은 훈구파의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그들이 추구한 정치적 목적의 달성은 중종 이후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朴元宗·成希顔·柳順汀 등이 주축이 되어 이룩한 反正으로 시작된 중종 초의 정국은 반정을 주도한 靖國功臣이 의정부와 6조를 장악하고 정국을 주도하는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며, 설령 소수의 사림파가 진출하였다 하더라도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이 시기 언관직의 구성을 볼 때, 상위직에는 보수적이기는 하나 온건한 훈구계 인물들이 있어서 후일 사림파 진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하위직에는 소수의 사림파나 그와 정치적 취향을 같이 하는 인물들이 진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언관직을 비공신계 훈구파가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소수의 사림파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 언관의 활동은 후일 사림파가 본격적으로 진출한 시기와는 달리 인사관계나 일반 시정 등에 관한 통시대적인 일반적 언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비공신계의 입장에서 공신중심의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의 하나로 정국공신 문제를 지속적으로 거론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공신 수의 과다, 공신 및 그 부모 친인척의 陰加事 및 그 개정문제, 공신의 土田 藏獲의 과다, 官爵濫受 등이 그 범주에 속한다.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한 사림파의 언론·경연활동이 본격화된 것은 趙光祖의 등용이 이루어진 중종 10년(1515)부터였다. 조광조가 安瑭의 천거로 정계에 등장한 이후 중종의 총애를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해 가면서 사림파의 성장도 뒤따르게 되었다. 그들은 대간과 홍문관에 집중적으로 진출하였으며, 그 결과 언관의 하위직은 물론 장관직까지도 이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그들은 홍문관을 개혁정치의 이념과 방향을 정립하고 그 실천방안을 확정하는 산실로 활용하였다. 홍문관에서 확정된 계획은 대간내 자파세력의 언론을 통하여 상달되었고, 그것은 政曹系 보수세력의 반대를 배격하면서 그대로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언관 우위의 지배체제를 굳히려 하였으며, 나아가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정치 즉 도학정치를 달성하려 하였다.

이 시기 사림파의 언론활동은 비록 일상적이고 통시대적인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양적인 면에서 앞 시기보다 훨씬 많았다. 그런데 이 시기의 언론활동이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단순히 양적 증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림파의 이념과 이상, 현실대응의식에 바탕을 둔 특수한 성격의 언론이 행사되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성종대의 사림파가 통시대적인 언론 이외에 훈구파에 대한 탄핵과 소릉복위와 같은 특수한 성격의 언론을 행사했던 점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림파의 언론활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추진되었는데, 그 하나는 전통적 명분의 회복과 因習·舊制의 革去를 목표로 하였다. 전통적 명분의 회복이란 앞 시기에 있었던 癸酉靖難, 세조의 즉위, 중종반정의 과정에서 나타난 명분의 단절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사림계 언관들은 성종대 사림파가 건의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했던 소릉복위를 다시 주장하였으며, 계유정난과 세조의 즉위, 중종반정의 부산물로 나타난 魯山君·燕山君의 立後문제, 중종반정 이후 반정공신에 의해 廢黜된 愼氏의 복위 등을 거론하였다. 이런 점은 과거의 정변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절대가치로서의 통시대적 의의를 지닌 절의와 명분을 반정 이전의 상태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그들의 의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정변에 대한 간접적 비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계획은 소릉복위를 제외하고는 훈구계의 완강한 반대로 고식적인 해결에 머물거나 실행되지 못하였다.

전통적 명분의 회복과 표리관계를 이루며 추진된 것으로 인습과 구제의 혁거가 있었다. 宮中 女樂, 內需司 長利, 忌晨齋·昭格署의 혁파로 대표되는 이 개혁의 표면에는 군주와 궁중이 도덕적으로 정화되어야 한다는 것과 비법제적인 殖利에 따른 민폐의 구제, 異敎的 祀典體制를 성리학적 사전체제로 대체하려는 명분이 표방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궁중과 연결되어 지배세력으로 성장한 훈구파의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목적도 잠재적으로 내포되어 있었다. 사림파가 추구하고자 한 도학정치의 실현은 결국 전통적 인습 및 구제의 혁거를 통하여, 그리고 그와 연결되어 있는 훈구파의 견제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중종 이전부터 부분적으로 제기되어 왔으나 이 때에 이르러 더욱 활발히 추진되었던 것은 그들의 정치적 성장과 영향력 확대에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같은 개혁론이 도학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기반조성이라고 한다면 성리학적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자기 주도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타난 것이 새로운 통치질서의 수립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먼저≪朱文公家禮≫·≪三綱行實≫·≪二倫行實≫의 보급,≪小學≫교육의 장려 등을 통하여 성리학적 윤리질서를 확립하려 하였으며, 鄕校교육의 강화, 鄕約의 보급을 통하여 새로운 향촌질서를 수립하려 하였다. 이는 물론 성리학적 윤리·통치질서를 향촌에 정착시킴으로써 그 곳에 지지기반을 구축하고 그를 토대로 중앙지배세력으로서의 우위를 확보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향촌의 ‘遺逸之士’를 발굴하기 위해 천거제의 성격을 지닌 賢良科가 실시되었다. 그 실시의 명분으로 제시된 것은 과거제의 모순과 그로 인한 참다운 인재 발굴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근본 목적은 사림파 세력의 확장에 있었다. 그들이 자파세력을 확충하려 한 것은 개혁을 추진할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그를 통해 그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도학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짝하여 靖國功臣에 대한 대규모의 ‘削勳’을 단행한 것에서 훈구세력을 억제하려는 그들의 의도를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사림파는 도학정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언론활동 이외에도 경연 강의를 적극 활용하였다. 경연은 단순히 군주에 대한 강의 기능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책토론·시정건의 등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어서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는 장소였다. 더욱이 그들은 3사, 그 중에서도 홍문관에 많이 진출해 있었으므로 경연을 도학정치 추구의 장으로 이용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도학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경연을 두 방향에서 이용하였다. 하나는 위에서 논급한 개혁정치의 구체화를 위한 것이었다. 개혁정치는 언관에 재직하고 있는 사림파의 상소나 陳啓를 통하여 제기되기도 했으나 경연에 참석한 기회를 이용하여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즉 그들은 경연의 기능을, 義理를 講明하고 治道에 보탬이 되게 하려는 데에 있다고 보면서 그 곳에서의 강의 기회를 통하여 개혁정치의 실천 방안을 논의하였다.

다른 하나는 도학정치의 성패 여부가 군주에게 있다고 판단한 그들이 군주의 자질과 덕성 함양에 우선을 두고 경연에서 이를 위한 노력을 하였던 데서 찾을 수 있다. 군주가 好學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거나, 聖君·聖賢의 언행을 체득하고 군주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고, 언로의 開閉가 국가의 운명과 관련된다면서 納諫할 것을 주장한 것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는 곧 賢哲君主의 등장이 그들이 꿈꾸는 요순삼대와 같은 지치의 실현을 가능케 한다는 사상적 구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사림파는 그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도학정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3사와 같은 언관직에 진출하였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한 언론활동과 경연활동을 통하여 국왕의 자질과 덕성 함양을 강조하는 동시에 훈구파의 세력을 억제하면서 개혁정치를 실시하려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이나 경연활동은 정책에 대한 자문에 응하거나 비판 기능의 행사를 가능하게 했을 뿐 정책집행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언관 우위의 지배체제를 구축하려 하였지만, 자파세력의 확대나 보호에 필수적인 人事權이나 兵權을 장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한계였다. 또한 도학정치의 실현과정에서는 현 체제의 유지를 바라는 훈구파와의 마찰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사림파는 이런 문제를 그들 특유의 과감성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과감성은 오히려 훈구대신뿐 아니라, 사림파에게 호의적이었던 왕의 태도마저 돌려놓음으로써 그들은 몰락하게 되었고, 그들이 추구한 개혁정치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처럼 그들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끝나고 모든 제도가 옛 모습으로 환원되었다 하더라도,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지향한 그들의 전향적·미래지향적 자세는 뒷날 새로운 질서를 국가의 공적인 정책 기제로 정착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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