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1. 도학정치의 추구
  • 3)≪소학≫실천운동

3)≪소학≫실천운동

≪小學≫은 朱子가 三代의 소학에서 가르치던 교과내용을 복원하려는 의도에서 저술한 敎本으로 고려 후기에 우리 나라에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충숙왕 17년(1330)부터≪소학≫이 과거시험 과목의 하나로 부과되기 시작했던 사실과446)≪高麗史≫권 73, 志 27, 選擧 1, 科目. 李崇仁이 소학서를 읽는 사대부 자제의 모습을 기록한 것들이447) 李崇仁,≪陶隱集≫권 4, 朴生詩 序. 이를 방증하고 있다.

이≪소학≫은 성리학의 입문서로서 가족관계나 행동규범에 관한 실천적인 면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448)≪小學≫의 교육에 관해서는 李樹健,<李朝時代『小學』敎育에 대하여>(≪嶺南大學校論文集≫2, 1968),≪소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는 金駿錫,<朝鮮前期의 社會思想-≪소학≫의 社會的 機能分析을 중심으로->(≪東方學志≫29, 延世大, 1981), 그리고≪소학≫의 실천운동에 대해서는 李泰鎭,<16世紀 士林의 歷史的 機能>(≪大東文化硏究≫13, 成均館大, 1979), 사림파의≪소학≫교육 목적에 대해서는 李秉烋, 앞의 책, 139∼145쪽 참조. 그래서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성격이 강한 성리학 보급을 위한 이해 기반의 확보라는 차원에서≪소학≫교육은 강조되기 마련이었다. 조선초의 역대 군주나 사대부들이≪소학≫의 보급과 교육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조선초의 집권 사대부들은 학교를 중심으로 교화정책을 추진하려 하였다. 곧 학교는 ‘風化之源’이었으므로 여기에서는 특히≪소학≫교육이 강조되었다. 선초의≪소학≫교육에 대한 관심은 權近의<勸學事目>에 투영되어 있다. 권근은≪소학≫은 인륜·世道에 긴절한 책이므로 국가가 ‘先講의 書’로서 법제적으로 규정하여 四學과 향교의 생도들이 우선적으로 배우도록 해야 함을 강조하였다.449)≪太宗實錄≫권 13, 태종 7년 3월 무인. 權遇 역시 1품 이하 庶人에 이르기까지의 자제를 모두 部學에 입학시켜≪소학≫을 맨처음 가르칠 것을 上啓하였다.450)≪太宗實錄≫권 25, 태종 13년 6월 정축. 이같은 그들의 의견은 태종 12년(1412)에 편찬된≪續六典≫에 “8세 이상은 모두 학당에 취학시켜≪소학≫의 도로써 가르친다”451)≪文宗實錄≫권 7, 문종 원년 4월 계사.라는 규정으로 정착하게 되었고, 生員覆試에서는≪소학≫과≪가례≫를 考講하게 하였다. 成均館에서는 “생원과 진사가 부족하면 곧 15세 이상의 4학 생도로≪소학≫과 4서 가운데 一經에 통한 자와 有蔭嫡子로≪소학≫에 통한 자, 일찍이 문과 생원·진사시의 鄕試나 漢城試에 入格한 자로 보충한다”452)≪經國大典≫권 3, 禮典 生徒.는 등의 규정으로 법제화되었다.

그러나≪소학≫교육은 이와 같은 법제적인 뒷받침과 역대 군주들의 정책적 배려에도 불구하고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선초 교화정책 실현의 중심이었던 학교교육 자체가 쇠퇴하면서≪소학≫교육 역시 약화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선초 제도정비를 통한 체제 안정과 더불어 詞章學風으로의 傾斜가 시작되고, 이에 따라 興學運動도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과거에 있어서도 講經보다 製述이 점차 중요시되기에 이르렀던453) 李秉烋·朱雄英,<麗末鮮初의 興學運動-性理學 受容과 관련하여->(≪歷史敎育論集≫14·15, 歷史敎育學會, 1990). 시대적 상황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성리학의 기초적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소학≫의 현실적 필요성을 감소시켜 자연히≪소학≫교육을 경시하거나 기피하게끔 유도하였던 것이다.≪소학≫교육의 경시 내지 기피현상은 16세기초까지도 계속되었는데, 이는 훈구파의 존재양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과 더불어≪소학≫의 중요성은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하였다.≪소학≫한 책만으로 30세 이전의 학업을 삼았다는 金宏弼의 예는 이를 상징하고 있거니와, 修己의 차원을 극복하고 治人의 수준으로 나아간 중종대의 사림파에 있어서≪소학≫교육 내지 그 실천운동은 현실적인 관심사로 다시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소학≫교육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중종 4년(1509) 持平 柳雲·大司諫 崔淑生이≪소학≫을 考講하여 근본을 배양할 것을 계청한454)≪中宗實錄≫권 8, 중종 4년 6월 신미. 데서 다시 제기되었다. 그리고 사림파의 진출이 활발해진 동왕 11년에 이르러≪소학≫은 인륜과 일상생활에 요긴한 節目이 두루 갖춰진 ‘修身大法’의 책이므로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종래 생원·진사복시에서≪소학≫을 고강하게 한 조치와 학교에서≪소학≫을 반드시 배우게 한 법전의 규정은 엄수되어야 하고, 학교에만 국한되었던≪소학≫교육을 전국의 향촌 어디에서나 시행할 수 있도록 필요한 책을 충분히 印頒하라455)≪中宗實錄≫권 26, 중종 11년 11월 계미.는 국왕의 하교를 이끌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같은 왕명에도 불구하고≪소학≫교육이 소기의 성과를 얻기는 어려웠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소학≫교육과 관련된 비슷한 주장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소학≫교육의 부진은 중종대의 사림파에게 강한 자극제로 작용하였다. 조광조는 “宿弊를 혁거하고 敎條를 닦아 밝히려면 先王의 법도를 차례로 거행해야 하는데,≪소학≫을 인재양성의 근본으로, 鄕約을 풍속교화의 방도로 삼아야 합니다”456) 趙光祖,≪靜庵集≫ 附錄 6, 行狀(李滉 撰).라고 강조하였다. 金安國도 “一國에 孝悌를 돈독히 행하게 하려면 위로는 공경대부로부터 아래로는 閭巷小民·國學鄕校·家塾 등에서 朱文公小學을 받들어 익히도록 해야 합니다”457) 金安國,≪慕齋集≫권 15, 附錄 行狀.라고 계청하였다. 또 그는 자신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직할 때에는 각 읍을 순방하여 유생들에게≪소학≫을 권장하였다.458) 任輔臣,≪丙辰丁巳錄≫(≪大東野乘≫所收). 이들과 함께 개혁정치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金淨도 “≪소학≫·≪大學≫모두 일상 행하는 일로 삼대에는 모두 이로써 덕을 닦고 학업을 연마하였는데, 후대에는 그것을 좋아하는 자가 적습니다”459)≪中宗實錄≫권 36, 중종 14년 7월 갑오.라고 상계하여≪소학≫교육의 진흥을 역설하였다.

≪소학≫에 대한 사림파의 깊은 관심은≪소학≫실천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 대표적 사례가 향약보급운동이었다. 향약의 보급은 결국≪소학≫에 수록된 呂氏鄕約의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과정에서 자연히≪소학≫의 내용도 널리 보급되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이미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려는 목적으로 留鄕所復立運動을 전개한 바 있었다. 그러나 복립 이후 유향소의 운영이 京在所를 통한 훈구파의 수중에 들게 되자, 이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향약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460) 李泰鎭, 앞의 글(1979).
李秉烋, 앞의 책, 149∼152쪽.
그리고≪소학≫교육이나 향약보급의 중요성은 그들 모두에게서 강조되기는 하였지만, 조광조 등 급진개혁파들이 기신재나 소격서 혁파 등 인습이나 구제의 혁거 쪽에 보다 많은 관심을 집중시켰던 반면, 새 윤리질서·새 통치질서의 수립을 위한≪소학≫실천운동과 향약보급운동에 보다 적극적이었던 것은 김안국과 같은 온건개혁파 계열이었다.461) 李秉烋,<慕齋 金安國과 改革政治>(≪碧史李佑成敎授定年記念論叢 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上, 창작과비평사, 1990) 참조.

향약보급운동은 전통적인 ‘淫祀’가 지배하는 향촌사회를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새로운 질서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목적과 함께 사림파 주도의 향촌질서를 수립하려는 의지가 작용된 것이기도 하였다. 훈구파가 주도하는 정국은 중앙집권체제의 수립을 지향하였으므로 선초부터 守令의 관권을 절대적으로 보장하고 있었다. 또 재지세력의 입지를 보장해 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유향소도 중앙집권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리하여 훈구세력·수령·유향소의 3자가 연결된 수탈구조는 16세기에 들어와≪經國大典≫의 여러 규정을 사문화시키면서 더욱 강화되어 피지배층의 광범한 유망을 초래하였다.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은 이러한 사회불안을 해소하고 스스로 재지적 기반을 보호하려는 것이었으므로 사림파는 이를 위해 열성적으로 노력하였다.462) 李泰鎭,<士林派의 留鄕所 復立運動-朝鮮初期 性理學 定着의 社會的 背景-(上·下)>(≪震檀學報≫34·35, 1972·1973).

사림파가≪소학≫교육을 중요시하고 그 보급에 힘쓰는 한편 실천운동을 전개했던 것은 그 내용이 성리학이 지향하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세계의 실현과 깊은 연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리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사회질서의 수립은 실천을 통해 도달될 수 있는 것이므로, ‘至治’를 지향하는 사림파는 ‘요순삼대’의 이상이 담겨져 있다고 여긴≪소학≫의 보급 및 실천에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463) 尹炳喜,<朝鮮 中宗朝 士風과≪小學≫-新進士類들의 道德政治 具現과 관련하여->(≪歷史學報≫103, 1984).

그러나 그들에 의해 추진되었던≪소학≫실천운동은 己卯士禍로 인해 중지되고 말았다. 향약이 폐지됨과 아울러≪소학≫은 ‘凶書’로 파악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464) 李秉烋, 앞의 책, 139∼145쪽. 이는≪소학≫실천운동이 정치성을 강하게 지닌 것으로 훈구세력에게 인식되었음을 뜻한다. 기묘사화 이후 향약을 통해 성리학적 향촌질서를 수립하려는 사림파의 노력은 더이상 표면화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金安老의 실세 이후 사림파가 재등용되고 국왕의 조광조 및 ‘己卯人’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호전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金麟厚는 기묘사림파에 의해 추진되었다가 중지된≪소학≫교육의 장려 및 향약의 실시를 건의하여 국왕의 호의적 반응을 얻어 내었으나 훈구파 대신들의 견제로 실현될 수는 없었다.465) 金 燉,<中宗代 言官의 性格變化와 士林>(≪韓國史論≫10, 서울大, 1984). 이미 향약보급운동이 사림파의 정치적 기반 확대운동이었음을 체험한 훈구파나 權戚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는 한 향약보급이 허용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소학≫은 孝悌의 道가 실려 있는 책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인출이 허용되었고,466)≪明宗實錄≫권 1, 명종 즉위년 7월 경진. 경연에서의 강의가 실현되었으며467)≪明宗實錄≫권 1, 명종 즉위년 7월 임오. 諺解로 된≪소학≫은≪三綱行實≫과 함께 서울과 지방에 반포되기에 이르렀다.468)≪明宗實錄≫권 3, 명종 원년 6월 갑오.

이에 사림파는 방향을 전환하여 향약보급보다는 書院건립활동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는 그들의 중앙정계진출이 억제된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사회적 혼란은 이미 교화적 방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들이 추진했던 향약보급운동은 향촌사회의 안정을 목적으로 하였지만, 그들 스스로 결집의 구심점을 얻고자 하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서원은 바로 그러한 목적의 하나를 달성하기에 충분한 것일 뿐더러, 선현봉사와 강학의 장소였으므로 훈구파의 직접적인 견제와 탄압의 대상에서도 쉽게 벗어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講明道學’의 실천장으로서의 서원의 정착과 보급에 주력하게 되었던 것이다.469) 사림파의 서원건립 의도에 대해서는 李泰鎭,<士林과 書院>(≪한국사≫12, 국사편찬위원회, 1977), 서원의 건립과정에 대해서는 鄭萬祚,<朝鮮 書院의 成立過程>(≪韓國史論≫8, 國史編纂委員會, 1980) 참조.

그 뒤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사림파가 정계를 주도하게 되면서 향약보급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재개되고, 결국 전국적인 시행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학문적인 면에서도 중종대 사림파가 지니고 있던 초보적이고 실천적인 성리학 이해 수준에서 벗어나 보다 심층적으로 정제된 이해체계가 정립되어 갔다.≪소학≫의 보급도 새로 간행된 朱子의≪童蒙須知≫와 朴世茂의≪童蒙先習≫, 柳希春의≪續蒙求≫, 盧守愼의≪童蒙須知疏義≫, 李珥의≪擊蒙要訣≫등의 저술을 통해 보편화되었다. 이들 저술은≪소학≫은 어려서부터 귀천의 구별없이 배워야 하며 서민이나 부녀들까지도 쉽게 익힐 수 있는 諺解本이나 類書가 간행되어야 한다는 당대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이에 의해 이제까지 통용된 여러 가지 註釋書를 종합하고 조선조≪소학≫에 대한 이해수준을 집대성한≪小學諸家集註≫가 간행되기에 이르렀다.470) 金駿錫, 앞의 글, 140∼144쪽. 이는 사림파가 정국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의 사회구조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변화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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