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 향촌질서 재편운동
  • 1) 관료제적 향촌질서의 한계

1) 관료제적 향촌질서의 한계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뀐 시기에 향촌사회의 구성과 운영체제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고려시대의 지방사회는 해당 지역에 내려온 지방관보다도 토착세력인 鄕吏들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지방관들은 향리들의 운영을 독찰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런데 이러한 체제는 고려말에 거의 붕괴되다시피 하고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리들 즉 守令들이 왕명을 받들어 각지를 직접 통솔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중앙집권력이 크게 강화되는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정치체제의 변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대변동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다.

고려사회는 중기까지도 休閑農法이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었다. 地力 회복을 위해 경작지를 한 해 또는 두 해씩 묵혔다가 다시 사용하는 방식을 많이 쓰고 있었다. 이를 易田이라고 하였다. 농업기술 발달과정에서 거름주기는 제초기술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제초의 효과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거름을 주면 농작물보다 잡초가 더 무성하게 자라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제초기술이 발달해야 거름주기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잡초의 뿌리를 드러낼 정도로 흙을 깊이 팔 수 있는 起耕具가 등장하면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휴한법의 극복은 보습날 위에 볏을 단 쟁기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볏달린 쟁기는 통일신라시대에도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 신종 농기구가 왕실·귀족에서 豪民層으로, 다시 일반농민들에게까지 보급되는 데는 생산도구 소유의 역사상 상당한 시간을 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527) 李賢惠,<韓國古代의 犂耕에 대하여>(≪國史館論叢≫37, 國史編纂委員會, 1992), 22·24쪽.
한국 농업기술 발달사에 대한 연구사적 정리는 李賢惠,<韓國農業技術發展의 諸時期>(≪韓國史 時代區分論≫, 한림과학원총서 26, 도서출판 소화, 1995) 참조.

한편 사회적으로 경작지에 대한 인구의 압박이 가해지지 않는 한 휴한법 극복의 충동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인구에 비해 可耕地가 많으면 기술개발의 필요성과 충동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조건 아래서 행해지는 농업은 粗放的인 것으로, 노동력의 집단적 구사에 의거했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적으로 인구현상은 15, 6세기의 ‘인구폭발’(유럽사의 경우)이 일어나기 전에는 영양상태의 불량으로 소아사망률이 높고 평균수명도 짧았다.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0.1% 미만의 선을 넘지 못하는 상황이 오래 계속되었다. 한쌍의 부부가 2명 정도의 자녀를 성인으로 키워내는 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528) 李泰鎭,<14∼16世紀 韓國의 인구증가와 新儒學의 영향>(≪震檀學報≫76, 1993), 1∼4쪽. 가족의 규모가 이런 상태에서는 가족 단위 노동력에 의한 자영농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휴한법의 조방농업기술로는 집약농업기술 단계에 비해 훨씬 더 넓은 면적을 경작해야 필요한 소출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2∼3명에 그치는 가족 노동력으로는 식량과 국가가 요구하는 부세를 마련할 수 있는 생산량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런 제약 아래서는 지역공동체에 의한 농사짓기 방법이 도입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사짓기에서의 공동체 조직은 휴한법이 극복된 뒤에도 물론 존속하였다. 그러나 휴한법 단계에서의 공동체 조직은 집약농업 단계의 것보다 규모가 더 컸고 공동체적 질서의식도 훨씬 더 강했다.529) 李泰鎭,<社會史的으로 본 韓國中世의 시작>(≪韓國史의 時代區分≫, 한국고대사연구회 편, 신서원, 1994) 참조.

고려시대의 향촌공동체는 일반적으로 香徒라고 불렀다. 부처님의 가호와 山川 수호신에 대한 신앙으로 결속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하나의 향도는 대체로 한 고을의 수호신에 대한 신앙으로 결속되듯이 고을 단위로 결속되어 고을의 향리들이 이를 집단적으로 통솔하였다. 향도 공동체는 2월에 農耕開始祭로서 燃燈會, 10월에 추수감사제로서 八關會를 열었다. 두 농경제의의 주재자는 물론 향리들이었다.530) 위와 같음. 향리들은 이와 같이 고을 단위의 공동체 조직을 확보하여 필요한 노동력을 규모에 구애받지 않고 그때그때 동원할 수 있었다. 농사짓기의 구체적인 모습은 자료의 한계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公田 경작에 동원된 노동력이 佃軍으로 표기된 사실, 그리고 휴한법 아래 火耕이 널리 행해진 사실로 보면531) 李泰鎭,<朝鮮初期의 火耕 禁止>(≪李載龒博士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90) 참조. 이 시대의 농사짓기는 공동체 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고려시대의 휴한농법은 늦가을이나 이른 봄에 마른 풀을 태운 다음 경작하는 방식을 많이 택하고 있었다. 이렇게 화경이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농사를 짓다가 일으킨 失火에 대한 책임은 고의적인 방화와 구별하여 가볍게 물어졌다.532) 李泰鎭, 위의 글, 386쪽. 들판을 불지르는 것과 같은 농사짓기 과정은 공동체적 규율성을 요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공동체 조직의 주재자이기도 한 향리들의 엄격한 통솔이 있었을 것이다. 휴한농법이라고 하더라도 한두 해를 거르는 방법은 발달한 농업기술로 나름대로 효율성이 기해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유럽 중세의 三圃農法도 경지간의 輪番體系와 犂耕의 왕복체계의 효율성을 위해 영주측의 엄밀한 통제 아래 공동체적인 규율이 유지되었다고 한다.533) 유럽 중세 삼포농법에서 윤작의 순차 정하기, 밭갈기의 방향 등은 정연한 질서 아래 이루어졌는데 이런 질서는 영주측의 통제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Werner Rösener, Peasants in the Middle Age, Polity Press, 1992, pp. 45∼47 참조. 향도조직을 통해 나타나는 고려시대의 擧郡縣的인 공동체 질서는 바로 당시의 영농체제에 뿌리를 두고 형성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의 향리조직이 중심이 된 지방사회 질서는 고려말·조선초에 거의 대부분 무너졌다. 향도란 이름은 존속하였으나 그것은 이제 자연촌락 단위의 소규모 공동체에 대한 지칭에 불과했다. 연등회·팔관회도 쇠퇴 끝에 왕정의 유교적 이념의 이름으로 금지되었다. 그 대신에 왕을 대신해 수령들이 각지에서 주재하는 社稷壇이 곳곳에 세워졌다. 향리들은 고려 후기에 접어들면서 향촌사회에 대한 지배권을 중앙에서 내려온 수령들에게 넘겨주고 가능하다면 자신들도 관리가 되는 길을 찾았다. 초·중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생성되어가고 있었다.534) 李泰鎭,<高麗末·朝鮮初의 社會變化>(≪震檀學報≫55, 1983 ;≪韓國社會史硏究≫, 지식산업사, 1986) 참조. 토착세력의 자치적 성향보다는 중앙집권력이 훨씬 더 강하게 작용하는 변화가 지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사회적·정치적 변화와 함께 농업기술이 휴한법에서 벗어나 連作常耕法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연작상경법으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여러 가지가 상정될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理生의 도모를 중요시하는 유교정치사상의 영향,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인구증가의 추세 등이었다.535) 李泰鎭, 앞의 글(1993) 참조. 고려 후기사회는 내외의 전란과 사회적 동요로 극히 불안하였고 민생도 크게 피폐해 있었다. 이런 상황이 오래 계속되는 가운데 治者들은 일반민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보장을 강구해 주지 않는다면 치자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각성이 생겨 來世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불교세계에서 벗어나 민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유교정치사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신유학의 수용을 통한 치자들의 생활개선의 의지는 새로운 변화를 이끄는 가장 중요한 역사의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고려말 이래의 유교적 왕정은 생명을 가진 것을 살아가게 하는 덕(生生之德)이 곧 天道로서, 왕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백성들의 衣食을 해결해 주는 것이라고 인식하여 農政을 왕정의 대본으로 삼았다.536) 李泰鎭, 위의 글, 13쪽 참조. 농정은 농사를 지을 노동력 즉 인구를 증대시키고 농사기술을 개발 보급하는 것을 요체로 삼았다. 왕은 자신을 대신해 지방에 내려가 백성들을 다스리는 수령들에게 農桑을 번성시키고 戶口를 늘리는 것을 거듭 당부하고 그 성과를 考課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537) 李泰鎭, 앞의 책, 114쪽 참조.

고려말에는 호구증대의 노력과 관련하여 의술이 발달하였다. 토산약재를 사용하는 의술이 鄕藥이란 이름으로 획기적으로 발달하고 있었다. 토산약재의 활용의 유래는 이보다 훨씬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의술로서의 체계성을 높여 진단과 처방의 가짓수를 대폭 늘려 중국 宋나라 이래의 의술에 못지않은 수준으로 발전하는 변화가 이 때 이루어졌던 것이다. 향약의술의 처방은 약값이 싸서 일반농민들도 어렵지 않게 혜택을 볼 수 있었다. 침술도 함께 발달하였다. 13세기 전반기에 나온≪鄕藥救急方≫에서 시작하여 세종대≪鄕藥集成方≫에서 일단 대단원을 이루는 향약의술은 진단과 처방의 가짓수나 보급률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거듭하였다.538) 李泰鎭,<高麗後期 인구증가 要因 生成과 鄕藥醫術 발달>(≪韓國史論≫19, 서울大, 1988) 참조.
金 澔,<『鄕藥集成方』에서 『東醫寶鑑』으로>(≪韓國史市民講座≫16, 一潮閣, 1995).

의술이 이처럼 농업기술과 함께 발달하는 시기에 소아사망률이 떨어지고 자녀의 평균수도 늘어나는 변화가 생겼다. 고려시대의 墓誌銘과 조선 초기의 족보자료를 이용한 분석은, 고려 전기 귀족 양반가족의 평균자녀수는 3명 미만이다가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사이에는 3.5∼4명에 이르는 숫자로 늘어난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539) 李泰鎭, 앞의 글(1983), 6∼9쪽. 귀족가문에 나타나는 이런 시대적 차이를 일반 평민신분층에 대입한다면 최소 1명 정도는 줄여 잡아야 할 것이다. 즉 귀족적 관인층에 비해 영양상태나 생활환경이 훨씬 열악한 일반농민 가족의 평균자녀수는 최소한 1명씩 내려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일반농가의 평균자녀수는 고려 중기까지 2명 정도이다가 고려말 이래 3명 이상으로 늘어나는 변화를 겪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말 이래 자연가호 3호를 묶어 1호로 삼던 軍戶 편성의 원칙이 조선 세종대를 거쳐 세조대에 이르는 시기에 자연가호 1호 안에서 3丁을 추출하여 1군호로 삼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도 자연가호의 평균자녀수의 증가를 전제로 한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가족 구성원 수의 증가는 국가에 대한 身役의 부담이 농사와 시기적으로 중복하지 않는다면 가족 단위의 최소 규모의 영농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가족노동력의 증가야말로 이 시기 연작상경법으로의 전환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 가족노동력의 단위성이 높아졌다고 공동체적 협력관계가 소멸한 것은 결코 아니나 과거처럼 큰 규모의 공동체적 질서의 존속 필요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고려말부터 일어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변화는 결국 왕정의 중앙집권력을 높여주었고 이에 따라 관료제가 크게 발달하였다. 향촌질서도 토착세력보다는 수령권을 강화시키는 방향에서 잡혀갔다. 전날의 향리들을 포함하여 향촌의 유력자들 가운데는 그 사이 士族 品官으로 신분을 상승시킨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관료제의 현직관리로 수용될 수는 없었다. 품계만을 따고 향리에 돌아와 있는 이른바 留鄕品官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는 누대에 걸쳐 살아온 근거지에 그대로 살고 있는 자들도 있고 근거지를 옮긴 자들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거주지에서 향촌의 운영을 자담하려는 성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왕명을 받아 그 고을에 내려온 수령은 중앙의 입장에서 정사를 돌보아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언제든지 대립 또는 충돌할 소지가 많았다.540) 여말선초의 유향품관층의 동향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李泰鎭,<士林派의 留鄕所 復立運動-朝鮮初期 性理學 定着의 社會的 背景-(上·下)>(≪震檀學報≫34·35, 1972·1973 ;≪韓國社會史硏究≫, 지식산업사, 1986).
李樹健,<高麗後期 支配勢力과 土姓>(≪東洋文化≫20·21, 1981 ;≪韓國中世社會史硏究≫, 一潮閣, 1984) 참조.

조선왕조가 개창한 후 각지의 유향품관들은 의사결집기구로 留鄕所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들은 지방을 대변한다는 명분 아래 수령과 충돌하기 시작했다.541) 이하 유향소제도의 치폐에 관한 서술은 李泰鎭, 앞의 글(1972) 참조. 그리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추구하던 태종은 재위 6년(1406)에 유향소를 모두 혁파하는 조치를 내리기도 하고, 13년에는 억제책에 대한 유향품관들의 불만이 높자 그들 중 한두 명만 골라 ‘申明色’이란 이름으로 수령의 자문역을 삼아 불만을 완충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혁파조치가 명실상부한 중단을 가져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 초기 왕정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수령권을 강화하였다. 백성들의 의식을 보장하는 농정의 목표를 국왕이 직접 주도하면서 수령들이 현지에서 지침을 수행하여 뒷받침하는 체제를 지향하였다. 유교정치의 이러한 지향은 실제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고 따라서 관료제는 계속 강화되는 추세였다. 중앙집권 관료제는 수령들로 하여금 각 자연촌락을 담당하는 里長·里正들을 직접 관장하여 집권력을 최하부 단위에까지 관철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일반 농민들이 살고 있는 촌락들에 대해 수령의 행정력 외의 다른 것이 침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한편 유향품관들은 당초에 기층사회에 대한 통제가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하였다. 유향품관들은 세종대 이후 勸農官의 자격으로 수령이 주도하는 租稅·貢物·軍役 등의 부역 할정에 관여할 수는 있었으나 자문 이상의 역할은 어려웠다. 촌락의 농민들은 향도를 구성하여 이를 농경공동체 조직으로 겸하기도 했으나 쟁기 사용을 목적으로 한 소겨리나 김매기를 함께 하는 들계 등의 조직이 향도와는 별도로 존재하였다.542) 李泰鎭,<17·8세기 香徒組織의 分化와 두레발생>(≪震檀學報≫67, 1989), 19쪽. 수령권은 이장·이정제도를 통해 이 조직에 직접 닿으면서 권농과 조세 징수의 임무를 수행했다.

조선 초기의 이러한 중앙집권 관료제적 향촌질서는 국가 기틀의 안정이라는 차원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신분제 사회에서 관료에게 많은 권한이 주어졌을 때는 그 직권이 아랫사람들을 침학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 쉽다. 조선 초기 왕정도 이 결함에 대한 우려와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폐단은 의외로 큰 폭으로 나타났다. 수령권에 대한 도전은 유향품관들뿐만 아니라 수탈에 시달린 일반평민들까지 돌발적으로 수령을 모욕하는 행위들로 표출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2년(1420)에는 유향품관이나 향리, 일반민이 당해 지역의 수령의 비행을 宗社의 안위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면 고소할 수 없다는 법을 세웠다. 그러나 이 법은 반발을 억제하기보다 촉발을 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고소금지법은 수령에게는 하나의 보호막이 되어 그들의 비행이 더욱 늘어났으므로 억울한 일을 당한 “아랫사람들”의 “윗사람들”에 대한 능멸행위가 갈수록 늘어났다. 이러한 사회질서의 문란은 유교지향국가에서 방치될 수 없는 것이었다.543) 초기의 유향소제도의 치폐에 대해서 종래 태종 6년(1406)의 혁파조치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한편, 光武 6년(1903)에 편찬된≪鄕憲≫에 실린<世宗大王十年戊申留鄕所復設磨鍊節目>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 태종 6년 혁파→세종 10년(1428) 복설→세조 말년 혁파→성종 19년(1488) 복설로 변천을 파악했다(柳洪烈·李泰鎭·金龍德·田川孝三). 그런데 최근 李樹健이≪향헌≫편찬자들이 성종 19년의 戊申을 세종 10년으로 착각한 사실을 바르게 지적함으로써(≪朝鮮時代 地方行政史≫, 民音社, 1989, 324∼326쪽), 태종 6년 혁파조치 후에도 대부분 존속하다가 세조말에 전면 혁파된 것으로 조정이 불가피하다.

중앙정부는 세종 17년에 京在所제도를 세워 유향소에 대한 통제체제를 강화하였다. 현직의 중앙관인들로 하여금 품계에 따라 2鄕에서 8향까지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찰하는 제도를 만들어 경재소라고 이름하였다. 중앙정부의 현직관리들이 연고지의 鄕風에 대해 책임을 지우려는 조치였다. 경재소는 산하 유향소의 좌수·별감의 선정권을 가지고 유향소에 어떤 잘못이 생기면 간여할 수 있었다. 8향에서 2향까지 연고지 경재소의 임원이 되어 각 유향소를 통제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유향소에 대한 제어장치가 이렇게 강화될수록 유향소 품관들은 당해 지역 수령과 타협하고 중앙의 경재소 관원들에게는 굴종하는 경향이 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로서는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들의 현재의 지위와 기반을 유지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런 추세는 곧 유향소가 민에 대한 수탈기구가 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세조 즉위(1455) 직후 수령고소금지법이 폐지되는 중요한 조치가 단행되었다. 이를 폐지하는 한편으로 사헌부의 行臺를 비롯한 御史類의 직임을 지방에 직접 파견하여 지방관의 비행을 독찰케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상황의 개선보다 수령들의 비행이 이제 국왕 차원에서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도달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수령고소금지법이 혁파되는 상황에서 유향소의 비행도 어떤 지경에 이르렀을까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유향소제도는 세조말에 마침내 수령과 한 통속이 되어 지방민들에 대한 수탈을 일삼는 기구가 되었다는 이유로 전면적으로 혁파되는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이런 충격적인 조치로서도 이미 고질화된 수령과 유향품관류의 비행은 줄어들지 않았다. 세조가 훙거한 후 수령고소금지법이 즉각 되살아났듯이 당시 집권층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관권의 일방적 우위의식이 크게 팽배해 있는 상황이 되었다. 수령·유향품관층·경재소 임원 등의 유착관계는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어 15세기 말엽의 시점에서 향촌사회는 결국 이들 3자의 分益的 수탈의 현장으로 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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