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 향촌질서 재편운동
  • 2) 사림파의 유향소복립운동

2) 사림파의 유향소복립운동

15세기 후반 관인층에는 귀족적 성향을 상대적으로 강하게 띠는 부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공신책봉이 세조대의 靖難·佐翼, 예종·성종대에 翊戴·佐理 등 15년간에 4차나 행해져 한 사람이 몇 차례 봉공되거나, 한 가문에 여러 사람의 공신이 나와 勳臣으로서의 입지가 확고해진 부류가 다수 생겼다.544) 李泰鎭,<15세기 후반기의「鉅族」과 名族意識>(≪韓國史論≫3, 서울大, 1976).
鄭杜熙,≪朝鮮初期 政治支配勢力硏究≫(一潮閣, 1983) 참조.
흔히 勳舊大臣으로 불리는 이런 부류 중에는 왕실과 혼인관계를 가져 가문의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정치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띠면서 경제적으로는 권세를 이용해 농장의 확대나 상업적 치부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면서 귀족적 욕구를 충족시켰다. 그들의 치부는 대부분이 민에 대한 수탈관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경재소제도가 이에 악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훈구대신들은 연고지 경재소의 임원으로서 그곳에 부임하는 수령들에게 압력을 가해 연고지에서의 자신의 경제적 기반 확대에 도움을 줄 것을 강요하였으며, 요구를 받은 수령들은 앞날의 승진을 위해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15세기 후반에 관료제적 향촌질서에 문제점을 유발시키고 있었던 궁극적인 장본인들은 바로 이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세기 후반 기성의 관인층이 보수적·귀족적 성향을 강하게 발휘해 가고 있을 때, 이에 대해 비판적인 정치세력이 서서히 등장하고 있었다.545) 李泰鎭, 앞의 글(1972) 참조. 흔히 士林 또는 士林派로 불리는 세력이 바로 그것이다. 사림, 사림파로 불리는 자들은 대개가 지방 출신 그것도 초기에는 영남지방 출신이 다수였다. 이들은 지방 출신으로서 각지의 농민들이 중앙의 대신, 현지의 수령 및 품관층 등에 의해 구조적으로 침탈당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성종 즉위 후에 국왕의 특별한 배려로 金宗直을 필두로 여럿이 한꺼번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이들은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치자들이 신유학의 정치이념에 보다 더 충실하여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정치가 실현되기를 원했다. 향촌사회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수탈을 개혁하는 것은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에 속했다.

영남사림의 내력은 멀리 고려말 易姓革命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신유학의「不事二君」의 명분으로 역성혁명에 반대했던 鄭夢周·吉再 등의 학통을 잇는다는 계보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역성혁명 반대론자들은 학문적으로≪春秋≫의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한편≪小學≫과≪家禮≫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경향은 역성혁명 주도자들이 대개≪周禮≫의 국가운영체계를 중시하면서 法家的 지향성을 띤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마치 이것은 중국 송나라 때 程伊川 형제 중심의 舊法黨과 王安石의 新法黨의 대립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구법당, 후자는 신법당에 준하는 정치적 입장으로 비교된다.546) 李泰鎭,<朋黨政治 성립의 역사적 배경>(≪朝鮮儒敎社會史論≫, 지식산업사, 1989), 163쪽. 이는 학문적 계보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 송나라 때의 신·구법당의 대립은 천자의 정치가 향촌지주들의 역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쟁점이 두어졌다. 신법당은 천자의 정치가 관료제만으로서 운영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한 반면, 구법당은 각 향촌의 민에 대한 지배와 교화를 일차적으로 향촌지주들의 임무로 부여하고 그 위에 관료제가 운영될 것을 주장했다. 역성혁명 반대파가「불사이군」의 春秋大義를 부르짖는 한편으로 향촌사회의 윤리를 가르치는≪소학≫을 중요시한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역성혁명 반대론 당시에는 향촌문제를 직접 거론할 기회가 없었지만, 혁성혁명파에 의해 창달되어 간 왕조의 통치기반이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을 때 그 후학들이 이를 시정할 수 있는 대안을≪소학≫의 세계에서 찾아 제시하고 있었다.

역성혁명 반대론자들의 후학들이 향촌질서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것은 세종대 후반이었다. 세종의 포괄적 인재등용책으로 조정에 나아간 역성혁명 반대파의 후학들은 세종말에 이르러 朱子의 社倉法을 시행하여 義倉制의 한계와 長利의 폐단을 없애자는 건의를 올렸다. 이 제안은 우선 영남지역에 국한해 희망하는 고을에서 시험해 보도록 했다. 그 성과는 괄목할 만한 것으로 나타나 점차적인 확대 실시를 전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조의 집권을 계기로 이 보급운동은 더 이상 전전을 보지 못하였다. 사창법 보급의 주역들은 대부분 세조의 집권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이를 못마땅히 여긴 세조는 이 제도의 전국적인 시행을 갑자기 단행하는 조치를 내렸다. 미처 시행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사창법이 획일적으로 실시되자 곳곳에서 문제점과 폐단이 발생하여 폐지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 갔다.

성종 즉위초에 국왕의 특별한 배려로 중앙관계에 진출한 영남지방 출신의 사림계 인사들은 따지자면 세종말·문종대의 사창법 보급 추진자들의 후배였다. 이들은 중앙에서 官歷을 쌓고 왕의 신임을 두터이 한 시점인 성종 14년(1483) 무렵부터 향촌질서의 재확립, 안정을 위한 구체적인 대책으로≪주례≫에 나오는 鄕射禮·鄕飮酒禮의 시행을 건의하였다.547) 李泰鎭, 앞의 글(1972) 참조.≪주례≫에 대해서도 역성혁명파가 통치조직과 관료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에 비해 이들은 향촌문제에 관한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향사례는 ‘孝悌·忠信·好禮不亂者’를, 향음주례는 ‘年高有德·才行者’를 각각 앞세워 ‘不孝·不悌·不睦·不姻·不任恤’한 자, 다시 말하면 향촌질서 파괴자를 다스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시행하자는 것은 곧 유교적 윤리관의 보급 즉 교화의 방식으로 자치적 향촌질서를 바로잡자는 의미였다. 이 두 의례는 일찍이 세종대에 편찬된≪國朝五禮儀≫에도 언급이 있었지만 이 때까지 한번도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을 정도로 이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두 의례 실행을 건의하는 자들은 이를 담당할 기구로 세조말에 혁파되었던 유향소제도를 부활할 것을 동시에 건의하였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유향소제도는 수령권과 결탁하여 향촌민에 대한 수탈의 앞잡이 노릇을 한 이유로 혁파되었다. 그런데 수탈을 배제하여 향촌질서를 바로잡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제도의 부활을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건의자들은 각지의 품관층 외에 이 일을 담당할 자가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품관층이 앞으로 유교적 이념을 수용하여 달라져야 향촌질서가 제대로 잡힐 수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두 의례 중 특히 향사례가 일반민보다 지식인 중심의 의례이기 때문에 이의 실행 건의에는 처음부터 품관층 자체의 순화 목적을 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성종대의 사림계 인사들의 향사례·향음주례 실행 건의는 당초 훈구대신들의 반대 내지는 소극적인 태도로 쉽게 채택되지 않았다. 그들의 건의는 여러 차례의 朝廷 회의 끝에 5년을 소요하여 성종 19년(1488) 5월에서야 비로소 복립 결정을 보았다. 훈구계 대신들은 당초 부활된 유향소에서 두 의례를 시행한다면 현재 경재소제도를 통해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지방사회에 대한 기득권이 손상을 입을 것으로 우려하였다. 신진의 젊은 인사들이 중앙정계에서 보여주고 있는 여러 동향을 보더라도 이런 경계심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림계의 주장도 집요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경재소제도가 존속하는 한 유향소제도의 부활이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사림계가 궁극적으로 목적하는 두 의례의 시행은 실제에서 유향소 부활과는 별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어떻든 다수 훈구대신들이 찬성쪽으로 의견을 바꿈으로써 이 논의는 결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복립 유향소의 대부분은 추진자들의 뜻과 같이 되지 않았다. 본래의 의도대로 두 의례를 시행하는 유향소는 사림계의 기반이 비교적 강한 영남지방의 몇 고을에 한정되었다. 그리하여 복립이 결정된 지 2∼3년 만에 중앙정계에서는 복립 건의자들이 오히려 혁파를 주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현지에서는 훈구대신들과 연결된 각지의 豪强들에게 복립 유향소의 주도권이 돌아가자 사림계에 속하는 재지 지식인들은 司馬所(사마는 生員·進士의 합칭)란 것을 따로 만들어 이에 맞서기도 했다. 향사례·향음주례 보급을 목적으로 한 사림계의 유향소복립운동의 이러한 귀결은 곧 그들의 힘의 한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정통 성리학파로서의 사림계의 기반은 실제로 이 시기에서는 아직 영남지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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