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 향촌질서 재편운동
  • 3)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

3)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

복립 유향소가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훈구세력 및 이와 연결을 가지는 재지 豪强들의 차지가 되자 재혁파론과 함께 본의대로 시행을 보다 더 철저히 해 보려는 시도도 없지 않았다.548) 이하 李泰鎭,<士林派의 鄕約普及運動-16세기의 經濟變動과 관련하여->(≪韓國文化≫4, 서울大, 1983 ; 앞의 책, 1986) 참조. 연산군 원년(1495)에 忠淸都事 金馹孫은 ‘利病二十六事’ 중 제22조에 향사·음례의 재시행을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즉 3년의 시한을 설정해 감사·수령의 협조를 받아 향사례·향음주례를 실행하도록 하는 한편 사헌부가 해당 지역의 경재소에게 책임을 묻는 방법을 병행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두 의례 시행에 대한 실제적인 방해자가 경재소의 권신들이라는 사실을 숙지하여 사헌부가 이를 감독하는 방도를 생각해 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향사·음례를 실제로 행한 유향소가 사림계의 기반이 강한 영남의 몇 개 고을에 불과한 상황은 쉽게 타개되지 않았다. 사마소란 것을 따로 세워 대항하는 곳도 있었지만 이런 움직임은 오히려 기성 훈구세력을 자극하는 결과만을 초래하였다. 향사·음례 보급운동이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판단한 사림계 인사들은 언관활동을 통해 훈구대신들의 비행을 규탄하는 데 힘을 모았다. 이즈음 훈구대신들의 직권과 권세를 이용한 부의 축적은 실제로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림계의 비판활동은 이들의 부정한 축재행위를 자성케 하기보다는 반발심만 높였다. 훈구대신 중 과격한 자들은 연산군 4년에 戊午士禍를 일으켜 사림계에 대해 대탄압을 가하였다. 궁지에 몰린 훈구대신들이 직접적인 보복으로 맞서는 상황이 벌어졌다.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가는 가운데 경재소-유향소제도의 수탈체제로서의 기능은 멈추지 않았다. 향촌의 일반 농민들에게는 이제 이들뿐만 아니라 궁중에서 요구하는 것도 크게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견디기 어려운 정도에 이르고 있었다. 경재소제도를 통한 지방사회에 대한 침탈은 이득이 컸기 때문에 이 무렵 왕자·諸君들도 노골적으로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왕자·군은 본래 제도상으로 경재소제도에 관여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도 재물에 대한 관심이 높았기 때문에 불법적으로라도 이 제도에 관여할 기회를 노렸다. 연산군 10년에 일어난 甲子士禍는 다 알듯이 勳臣類와 宮禁 세력간의 알력의 양상을 보였다. 후자가 전자의 재산과 이권을 탐하여 일으킨 것이었다. 후자가 노린 것 중에는 경재소 지배권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사화에 희생당한 成俊에게 내려진 죄목에 양자의 그러한 대립상이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 있다.

성준은 욕심을 내 거두는 것이 끝이 없어 吏曹·兵曹를 맡아서 貨賂를 공공연히 하여 집을 크게 짓기를 대여섯 채나 하고 재산이 넘쳐 흐르며 또 관찰사·절도사로서 오래 함경도에 있으면서 토호들을 불러 모아 戚族이라 부르면서 恩義를 그릇되게 베풀고 함경도의 여러 고을들을 本鄕이라 하여 경재소의 일을 총관하고 양민을 많이 점유하여 伴倘이라 칭하고 官賤을 골라 부리니 一道의 사람들이 다투어 붙어 그를 都堂上이라 불렀다(≪燕山君日記≫권 55, 연산군 10년 9월 정사).

경재소-유향소제도를 통한 향촌사회 침탈 상황은 연산군 12년(1506)에 中宗反正이 일어난 후에도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반정공신들이 대부분 훈신계였기 때문에 그들의 집권으로 달라진 것은 수탈의 주역이 왕과 이에 아첨한 부류에서 옛 대신들로 바뀐 것뿐이었다. 향촌사회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반정 후 7년이 되는 시점에서 사림계 인사들이 향음주례 시행문제를 재론하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향음주례는 名節을 닦고 이웃간의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道로서≪국조오례의≫에 실려 있는데도 오랫동안 행하지 않고 있으니 지방관을 통해 시행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이 나왔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국왕의 동의와 시행 지시는 3년 뒤인 중종 10년(1515) 정월에 비로소 나왔다. 이 기간은 趙光祖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계 인사 등용이 있기 전이지만 그 사이 조정에 나가 있던 蘇世讓·孫仲暾 등 소수의 인사들이 선배들의 뜻을 이어 제안하였다.

그런데 중종대 초반의 재론에서 시행 대상 의례가 전날과는 달리 향사례가 빠지고 향음주례 하나만 거론된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변화였다. 이 시기의 논자들은 향사례는 儒生들 사이에서나 행할 수 있는 것이므로 ‘鄕隣相睦’을 목적으로 할 때 굳이 이를 거론할 것은 못된다는 의견이 있었다. 사림계가 의식한 보다 중요한 시대적 과제는 ‘향린상목’ 즉 향촌질서의 안정이었고 이를 실현하는 방도는 향음주례로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향촌질서의 재확립을 위한 방법은 2년 뒤 鄕約으로 대치되었다. 즉 중종 12년 6월에 咸陽유생 金仁範이 呂氏鄕約을 준행하여 풍속을 바꾸자고 상소한 것을 계기로 이후의 논의는 거의 향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향약이 향음주례보다 더 구체적이고 적절하다고 평가되었다. 이 제의는 국왕으로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받아 곧 이를 검토하라는 지시가 예조에 내려졌다. 예조는≪소학≫·≪正俗≫등이 이미 다수 인쇄되어 널리 배포되었으니≪소학≫ 중 한 대목인 여씨향약을 따로 거행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의견을 의정부에 보냈다. 이에 의정부는≪소학≫에 실렸더라도 이를 따로 거행하지 않으면 심상하게 여겨 행하지 않을 것이므로 건의대로 별도로 인쇄해 널리 배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국왕에게 올렸다. 국왕은 의정부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여씨향약 시행론자들도 기존의 경재소-유향소제도를 먼저 혁파할 것을 제의하였다. 경재소-유향소제도 아래 빚어진 향촌사회의 혼란을 안정시키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으므로 향촌사회의 불안정을 초래하고 있는 기존의 수탈체제를 혁파하자는 것은 당연한 주장이었다. 논자들 가운데는 향약을 시행하면서 기존의 유향소는 없앨 것을 주장하는 의견을 직접 내기도 했다. 그러나 유향소-경재소제도의 혁파조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제도가 그대로 존속하는 가운데 향약보급운동이 별도로 추진되고 있었다.

여씨향약 시행 건의가 받아들여진 중종 12년(1517)은 사림계가 정치적으로 우세한 때였다. 중종반정 후에 사림계 인사는 소수로 기용되었다. 그러나 중종 6년에 柳崇祖의 천거로 중앙에 진출한 조광조가 국왕의 신임을 받으면서 10년을 전후해 사림계의 정치적 입지는 대단히 우세해졌다. 향음주례·여씨향약 등의 보급에 관한 논의 및 건의는 바로 이런 정치적 상황의 호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상황은 유향소-경재소체제의 전면 혁파를 앞세울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정치적 우세는 구세력의 축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왕의 신임이 높아진 것에서 얻어진 상대적 우세에 불과한 것이었으므로 여러 가지로 한계가 있었다. 향약보급도 획일적인 시행령을 갖추는 것보다도 중심적인 인사들이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 그 관할 도내의 여러 고을을 대상으로 향약의 시행 보급을 직접 주관하거나 지원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렇게 해서 성과가 쌓이면 저절로 유향소-경재소체제를 대신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던 것이다.

중종 12년 이후의 여씨향약 보급에 가장 많은 공적을 쌓은 사람은 金安國이었다. 그는 향약보급에 대한 국왕의 허락이 나오기 전인 같은 해 2월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임지에서≪呂氏鄕約諺解≫를 인쇄하여 여러 고을에 배포하면서 이를 시행할 것을 독려하였다. 같은 해 6월에 咸安유생 金仁範이 여씨향약의 시행을 건의한 것도 그의 이러한 활동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김안국은 이듬해 4월 同知中樞府事로 조정에 올라와≪여씨향약언해≫를 다시 讎校하여 印頒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 사이 서둘러 간행한 것에 잘못된 것이 많으니 조정에서 撰進廳을 별도로 세워 올바른 것을 만들어 배포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 해에 淸州를 다녀온 弘文館 應敎 韓忠은 충청도에서도 감사의 주관 아래 수교본≪여씨향약언해≫가 활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하면서 이를 8도에 널리 보급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수교본 간행 배포 이후 여씨향약의 보급은 자못 활기를 띠었다. 중종 13년 9월에 조광조가 經筵 자리에서 溫陽郡 사람들이 향약을 잘 시행하고 있다고 지적한 다음, 며칠 뒤에 大司憲 金淨이 장기간의 시행 대책을 의논하였고 이듬해 4월에는 국왕이 구휼책으로 향약을 장려하라는 전교를 8도의 감사들에게 내렸다. 이어 6월에는 都城에서의 시행 타당성 여부가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 7월에는 한충이 지방 유향소와 경성 5부 각 洞에 여씨향약 책자를 일제히 분급하자고 건의하여 국왕의 동의를 얻었다. 중종 14년 6∼7월은 여씨향약 보급의 최절정기였다고 해도 좋다. 국왕은 이 해 6월에 김안국을 전라도관찰사로 임명하여 그 곳에도 여씨향약을 보급하여 風化에 이바지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여씨향약 보급운동은 중종 14년 5월 무렵부터 그 시행이 ‘王化의 근본’인 京城 즉 서울에 미치면서 물의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一鄕에서 행하기 위해 만든 것을 一國의 규모로 행하는 것은 타당치 않을 뿐더러 국왕이 있는 왕도에서조차 이를 행하여 刑政을 따로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런데도 향약은 좋은 것이므로 서울에서도 못할 것이 없다는 강경론이 우세하여 5部 坊里의 각 동마다 約正이 정해지고 서책도 계속 보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한 진행은 반대세력이 己卯士禍의 정변을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말았다. 기묘사화는 僞勳削除論에 대한 반발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지만 사화를 일으킴과 동시에 그간 사림계가 추진한 일 중 가장 역점이 두어졌던 賢良科와 향약을 모두 혁파하였듯이 사림계의 향촌질서 재편운동에 대한 반발이 큰 원인이 되었다.

여씨향약 보급운동은 勳臣·戚臣 등의 권신들이 유향소-경재소제도를 통해 각지에서 치부를 위해 수탈을 자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향촌사회의 불안을 해소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추진되었다. 따라서 이 운동은 기층민으로부터는 큰 호응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기묘사화 후 반대론자들이 향약의 죄악으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는 것(下凌上)’, ‘천한 자가 귀한 사람을 능멸하는 것(賤凌貴)’ 등을 가장 큰 문제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향약 자체에 대한 일반민의 호응은 분명히 컸다. 조광조 등이 죄인으로 몰려 鞫問을 당할 때 광화문 밖에 5부 방리의 향약의 무리들이 몰려와 왕에게 上言을 올려 그들을 구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決杖 때에는 의금부에 몰려와 곤장을 치는 자가 손을 올릴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어떻든 사림계의 향약보급운동은 기묘사화로 그간의 성과가 전면적으로 혁파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향약시행에 관한 논의는 이후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중종 38년(1543) 7월에 檢討官 金麟厚가≪소학≫의 보급과 함께 향약을 시행할 것을 제의하면서 다시 대두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자극을 받아서인지 이 해 11월에 국왕이 몸소 서울과 지방에서 향사례·향음주례·향약 등이 거행되지 않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三公들이 이 문제를 의논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3공들은 이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즉 조정에서 政令을 내려 시행을 강요하기보다는 각 향촌에서 개별적으로 실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향약 시행에 대한 조정의 견해는 이후 명종대에 들어와서도 개별 실시론이 우세했다. 선조대에 들어와 척신정치가 일단 종식되고 사림계의 진출이 우세해진 가운데 예조와 사간원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 실시론을 제기하여 논의가 재연되었다. 그러나 국왕은 조정에서는 향약 관계 서적을 반급하는 선에 그치고 시행 여부는 개별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택했다. 사간원이 선조 6년(1573) 9월에 다시 적극적인 시행을 주장하자 국왕이 이를 따르는 것으로 태도를 바꾸었으나 5개월 만에 李珥가 ‘先養民 後鄕約’의 견해를 개진하자 다시 태도를 바꾸어 개별 시행으로 결정을 보았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면 사림사회는 16세기초 기묘사화 전의 사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급진적인 개혁의지와 강력한 추진력은 보이지 않았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수령을 매개로 향약에 깊숙히 침투하기 시작하였으며, 향약에 대한 인식도 주자학적 교화를 의미하는 勸善的인 성과에 만족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나마도 이이가 “향약 실시는 아직 이르다” “養民을 먼저 한 다음에 敎民을 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폄으로써 획일적인 시행은 중단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인 선조 7년 2월에는 柳希春이 향약 중 ‘化民成俗’에 도움이 되는 長幼 예절 부분만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으며549)≪宣祖實錄≫권 8, 선조 7년 2월 기미., 이는 같은 해 5월 예조에서 啓目을 작성해 올려 국왕의 재가를 받아 반포되었다. 이것은 禮俗相交 부분 중에서 ‘長長貴貴’와 같은 장유 예절에 관계되는 것만 뽑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선조 7년을 고비로 전국적인 실시를 추구하던 흐름은 중단되고 각 향촌마다 특수성을 반영한 개별 향약들이 다수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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