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 향촌질서 재편운동
  • 4) 향촌질서 재편운동의 성과

4) 향촌질서 재편운동의 성과

조선왕조의 유교적 왕정은 중앙집권 관료제를 매개로 수행되었다. 집권적 관료제는 왕정의 뜻과 시책을 지방사회 최말단까지 효과적으로 미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관료들에게 주어진 직권은 신분제사회에서 사적인 이익 추구에 남용될 우려가 많았다. 관료들의 직권 남용은 단순한 폐단에 그치지 않고 구조적인 양상을 띨 때는 지배체제의 존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우려는 조선왕조가 출범하여 1세기를 넘지 못한 시점에 이미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였다. 수령권의 원활한 수행을 보장하기 위해 가해지기 시작한 유향품관들에 대한 통제가 관권 절대 우위의 향촌정책으로 발전함에 따라 유향품관들조차 수령권과 경재소 임원의 현직 朝官들에 굴종하여 향촌사회는 3자의 分益的 수탈의 현장이 되다시피 하였다. 사림, 사림파의 향촌질서 재편을 위한 향사례·향음주례 보급운동, 향약보급운동 등은 그러한 수탈적인 장치들을 제거하여 향촌사회를 안정시키려는 것을 목표로 대두하였던 것이다. 각 향촌사회는 그들 자신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향촌사회의 안정은 곧 자신들의 기반의 안정에 직결되어 재편운동은 그만큼 강한 열의를 담고 있었다.

사림계의 향사·음례 보급운동, 향약보급운동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기성세력인 훈신·척신들의 반발로 사화가 일어나 다수가 처형되는 한편, 그 사이에 거두어진 성과들도 모두 혁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의 노력이 전적으로 허사로 돌아갔던 것은 결코 아니다. 사림계의 향촌질서 재편운동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유향소-경재소 체제를 붕괴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내용적으로 훈신·척신 중심의 기성정치 판도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초기의 향촌질서 재편운동은 처음부터 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기 마련이었으며, 그 때문에 정치적 탄압으로 끝나는 전개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사림계의 유교적 향촌질서 확립운동이 사회적 기반이나 경험을 전혀 결여하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택한 방안은 서책에서 처음 찾아낸 것이 아니라 이전에 이미 특정한 지역에서 시행 하여 성과를 거둔 것도 있었다. 향사례는 이미 세종대에 安東에서 시행된 적이 있었으며550) 李泰鎭, 앞의 책(1986), 168∼169쪽., 향음주례는 성종 6년(1475)에 正言을 지낸 丁克仁이 泰仁縣 古縣洞에서 사족 중심으로 소규모로 시행한 적이 있었다.551) 金仁杰,<조선후기 鄕村社會統制策의 위기-洞契의 성격변화를 중심으로->(≪震檀學報≫58, 1984), 106쪽. 추진자들은 결국 이러한 대소의 지역적 경험을 확대시켜 현안의 사회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성종대의 향사·음례 보급운동이나 중종대의 향약보급운동은 어느 것이나 시행 단위를 고을(주·부·군·현)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시행하고자 하는 방안들은 본래 소규모 마을을 단위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를 고을 단위로 시행하려 했던 것은 이로써 극복하려 했던 대상인 유향소제도가 고을 단위로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운동에서는 신분적 차별의식이 크게 작용되지 않은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향음주례나 향약 시행에서 신분의 귀천은 특별히 언급되지 않았다. 향약의 경우 소행의 선악을 구별하는 善籍, 惡籍의 구분은 두어도 신분에 따른 錄籍의 구분은 없었다. 신분보다는 연령을 더 중시하는 경향도 보였다.552) 韓相權,<16·17세기 鄕約의 機構와 性格>(위의 책) 참조. 그러나 이 점은 사림계가 신분적 차별의식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당시 중앙의 기성 권세가에 대한 대결이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에 아래 신분층과의 변별을 굳이 의식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향촌질서 재편운동의 중요한 명분은「鄕中의 協和」를 통한 안정이었다. 이에는 향촌의 다수 구성원인 일반 소농민의 경제적 안정도 크게 의식되고 있었다. 농민들이 바로 유향소-경재소 체제에서 수탈의 주된 대상이었던 만큼 재편운동에서는 이들의 경제적 안정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班常의 신분관념이 전혀 개재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명종 20년(1565)경 靈巖郡 鳩林里에서 작성된 西湖洞憲을 비롯해 이 시기의 촌락단위의 향약적 규약들은 사족과 평민의 조직단위를 上契, 下契로 일단 구분한 다음 하나로 결속하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553) 金仁杰, 앞의 글.

향촌질서 재편운동은 상·하계의 구분의식을 내재시키고 있어도 소농민=평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소농민들은 지금까지 유향소-경재소의 수탈체제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림이 추구하는「협화」의 보호막이 비록 완전한 것은 아니더라도 상대적으로는 크게 유리한 것이었다. 중종대 향약보급운동이 서울과 지방에서 큰 지지를 받은 것은 바로 이런 상대적 비교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향약보급운동 단계에서 사림계 인사들은≪二倫行實圖≫의 보급도 함께 꾀하고 있었다. 長幼와 朋友의 윤리를 강조하는 윤리서였다. 그것은 곧 신분을 초월한 연령에 의한 질서의 존중과 함께 사림 자체의 결속을 함께 보장해줄 수 있는 지침서가 될 수 있었다.554) 韓相權, 앞의 글. 사림의 향약보급운동이 아랫사람들과의 관계 개선과 사림 자체의 결속 확대를 함께 도모했던 것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림계의 재지 지식인들은 촌락 단위의 향도나 노동계 조직으로 생활하고 있는 향촌의 일반농민들을 수령권의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나게 해 향음주례·향약과 같은 유교적 공동체 조직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자신들의 일차적 영향권에 넣는 것이 사회를 보다 더 안정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림의 향약에 대한 인식은 16세기 후반 선조대에 들어와 개별적 시행론이 우세해지는 가운데 크게 달라진다. 이전에 비해 신분적 차별의식이 강해지는 것이 큰 차이였다. 선조대의 향약은 개별시행론의 차원에서 현지 조건에 맞추는 변용이 가해지는 것과 함께 신분을 일단 구분하고 그 구분의 틀 안에서 연령을 중시하는 차이를 보였다. 신분에 대한 강조는 곧 사족들의 배타적·독점적 지배체제 구축과 관련이 깊었다.555) 韓相權, 위의 글. 선조 즉위 후 중앙정계에서도 사림세력의 진출로 훈신·척신 계열의 권세가 현저하게 약화되었으며 향촌사회에서도 수령권과 유향소-경재소의 위세는 크게 줄어들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사림계는 이제 오랜 투쟁의 최후의 승자가 되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해 사림계의 배타적 신분의식은 그 나름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과거 훈·척신류의 신분의식과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향촌사회에서 지배자로서의 신분의식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15세기 후반에 시작된 사림계의 향촌질서 재편운동은 16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일단 그 소임을 완수한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기존의 유향소-경재소체제의 약화 내지 붕괴의 조짐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임진왜란을 치른 뒤 선조 37년(1604)에 드디어 경재소제도가 혁파되었다. 사림계의 오랜 투쟁이 여기에 와서 결실을 보았다. 사림계는 기묘사화로 향약보급운동이 실패한 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을 바꾸고 있었다. 書院건립운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선조 즉위 후 사림의 다수 의견이 향약 개별시행론으로 기울 수 있었던 것은 과거 그것을 통해 달성하고자 한 목표의 일부를 서원건립운동을 통해 이미 이루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556) 李泰鎭,<士林과 書院>(≪한국사≫12, 1977 ; 앞의 책, 1989). 과거 획일적 시행론에서 얻고자 했던 고을의 鄕論 주도는 서원을 통해 점차 이루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16세기 후반 이후 서원은 한 고을 재지사족들의 향론의 결집처로 기능하여 경재소 같은 제도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어졌다. 재지사족들의 향촌 소농민에 대한 의식은 신분제에 입각한 것이기는 하나 과거 경재소제도를 통해 발휘되던 중앙 권세가들의 그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훨씬 개선된 것이었다. 그들의 의식세계는 기본적으로 재지 중소지주적 이해관계에 서있으면서 성리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새로운 면모였다.

<李泰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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